'개 구충제' 항암 논란의 교훈

[서리풀 논평] '유행'의 불행한 부작용을 막으려면…

'개 구충제'인 펜벤다졸을 복용하는 말기 암 환자가 유행처럼 늘어난다고 한다. 의학계와 정부가 근거가 없다고 복용을 말리지만, 별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놀랍지 않다. 약효가 있다 없다, 부작용이 심하니 견딜만하니, 의학적 판단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치료법에 기대는 환자의 심정을 들어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설령 거짓일지라도 희망이라는 이름의 플라세보효과를 믿기 때문입니다. 병원과 의사분들은 직업상 과학과 논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저희 같은 시한부 환자의 경우에는 (병원과 의사가)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사실상 없습니다."(관련 기사 : <한겨레21> 1287호 '과학과 가능성 사이 '개 구충제' 항암 논란')

지금 시기 정설로서의 과학적 판단은 비교적 명확하다. 일부 성공 사례라는 것이 전파되고 있으나(특히 유튜브),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할 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부작용 때문에 환자에게 오히려 해를 미칠 수도 있으니, 요약하면 전문가와 보건당국은 "복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이런 의학적 판단이나 전문가의 권고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앞서 인용한 한 환자가 한 말에 나와 있다.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사실상 없습니다." 차갑고 건조한 전문가의 메시지는 환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데, 이럴 때 한 개인으로는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은가?

유감스럽지만 우리 또한 다른 대안을 말할 능력이 없다. 다음과 같은 환자의 말에 무어라 답을 하겠는가. "치료나 응원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말기 암 환자들의 살려고 하는 처절한 노력과 몸부림을 과학 운운하며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지만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실존을 넘어, 사회적인 것은 또 다르다. 한 개인의 선택과 결단이 유튜브를 통해 널리 전파되고 언론이 이를 '유행'으로 다룰 때, 의사협회와 정부 당국이 '최선의 지식'에 따르라고 당부할 때, 개인은 사회적 영향에 묶인다. 자유 의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없다.

논란, 사건, 유행, 소동, 그 무엇으로 불러도 상관없으나, 우리가 마땅히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다. 언뜻 생각해도 의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비롯해 적지 않은 문제가 서로 얽혀 있으되, 사회적 차원에서 당장 급한 과제 몇 가지를 짚고자 한다.

첫째, 환자들이 정확한 정보와 행동 지침을 알고 제대로 치료를 받는 것. 말기 암이니 '시한부'니 하는 말이 흔하지만, 사람마다 뜻이 다르고 의사전달과 이해는 더 어렵다. 전무 아니면 전부가 아니며 치료 여부와 생사를 이분법으로 말할 수 없으니 당사자는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백에 하나 정도의 가능성이 있다는 지식을 개인은 어떻게 해석할까?

인류가 축적한 과학과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짐작하며 매달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최선, 최고의 지식에 따라 치료하면 될 환자까지 아무런 방법이 남지 않은 시한부 환자를 자처할까 걱정이다.

두 번 말할 것도 없이 정부와 전문가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대안들을 내놓아야 한다. 모든 의료 전문가들은 당장 환자와 더 많이 만나고 대화해야 이 '유행'의 불행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여기서는 사람 중심의 관점이 중요하다. 집단 수준의 건강 논리와 개인 수준의 건강 논리가 완전히 다른 것이 한 가지 예. 개인으로서의 환자에게 "100명 중 하나"라는 식의 확률이나 "아직 효과가 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라는 식의 '근거기반 의료(evidence-based healthcare)'는 아무 설득력이 없다. 누구나 "혹시 나는 다르지 않을까"라고 기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 일이다.

둘째, 첫째보다 조금은 시간이 더 걸릴 사회적 과제가 있으니, '말기'나 '시한부'에 해당하는 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제도를 좀 더 튼튼하게 꾸려야 한다. 따지고 보면 이번 사태 또한 사회적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각자도생'에 나선 결과가 아닌가.

사회적 제도는 다양하다. 벌써 국민청원에 등장했다는 임상시험 요구만 해도, (그동안의 임상시험 논리만 좇아) 해당 사항이 없다며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여전히 지지부진인 호스피스 활성화도 다시 추슬러야 한다. 효과가 어중간한 신약이나 치료법은 앞으로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과 비슷한 일이 거듭될 것이 뻔한 만큼, '제도화'가 아니면 사태의 재발을 막기 어렵다. 질병의 고통이 만성질환 중심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 특히 암과 같은 종류의 어려운 만성질환은 이번과 비슷한 사달을 내기 십상이다.

제도화와 불평등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도 소홀하게 다룰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펜벤다졸조차 유튜브를 비롯한 정보에 접근하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지에 따라 개인행동이 달라진다. 신약이니 호스피스니 하면, 얼마나 더 큰 차이가 날까. '형평 지향적' 제도화는 그저 고려 사항이 아니라 필수다.

마지막은 둘째 과제보다 더 어렵고 오래 걸리는 것으로, '사회적 동의' 또는 '사회적 신뢰'를 형성하는 일이다. 높은 차원은 빼놓더라도, 예컨대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신뢰, 전문가의 권고를 믿는 것,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규범 없이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도전을 해결하기는 어렵다.

이런 동의와 신뢰는 당연히 제도나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 한 가지 예로, 건강보험 급여를 결정할 때 재정이 아니라 환자의 삶이 일차 기준이 되어야 환자가 제도를 믿고 수용할 수 있다. 의사와 병원의 방침과 제도 또한 수익이 아니라 환자의 고통이 기준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제대로 작동한다.

펜벤다졸 논란은 환자의 고통, 의학지식과 기술, 건강과 의료를 둘러싼 제도와 시스템, 우리 사회의 규범과 문화 등이 한꺼번에 작용해 빚어낸, 어렵고 난감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더 잦아지고 더 복잡해질 문제라면, 한국 사회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도전을 맞닥뜨렸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우리는 이에 대해 다시 민주주의 강화라는 지향이자 방법을 강조하려 한다.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따르더라도 국가와 시장, 또는 그 둘의 '연합'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스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시민, 환자, 주민, 공동체 구성원 누구나 배우고 토론하며 주장함으로써 같이 결정하는 삶의 양식, 이것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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