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세력'은 '평화 파괴 세력'!

[김기협의 퇴각일기]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얼마 전 일기의 어느 댓글에 "해양세력이니 대륙세력이니 하는 용어는 지나간 아날로그시대의 낡은 개념”이라 한 말이 있었다. 눈 밝은 독자가 반갑다. '아날로그시대'는 무슨 뜻인지 몰라도 낡은 개념은 분명하다. 그런데 개념이 낡으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일까?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비는 해외 '진출'에 열광하던 시절의 일본에서 즐겨 써먹던 것이다. 서양인의 함대가 동양을 유린하던 시절에 해양세력은 곧 서세(西勢)였고, 보수적인 대륙세력에 대비되는 진취적 세력이었다. 섬나라 일본이 대륙을 떠나 해양세력이 되자는 주장이, 곧 '탈아입구(脫亞入歐)'였다.

제국주의 풍조에 이용된 이력이 있다 해서 꼭 나쁜 개념으로 규정하고 그냥 버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념을 잘 뒤집어 보면 시대의 흐름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00여 년 전의 세상에서는 정체(停滯)는 무조건 나쁜 것이고 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진보주의 이념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환경과 자원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지금 세상에서는 대륙세력의 보수성과 해양세력의 진취성을 그때와 다른 눈으로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대륙세력의 보수성을 '폐쇄성'으로 폄하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즐겨 써먹은 말이 '쇄국(鎖國)'이다. 청나라와 조선은 쇄국정책에 집착해 나라를 망친 반면 일본은 쇄국 중에도 란가쿠(蘭學)의 숨통을 터놓고 있다가 때가 되자 빗장을 열고 시대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유신(維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개항(開港)은 19세기 중-후반의 동아시아 각국에 강요된 과제였다. 17세기 이후 유럽세력의 팽창 과정에서 강한 정치조직이 없던 곳은 곧바로 유럽인에게 정복당했고, 정치조직이 강한 곳에는 우선 개항을 요구해서 시간을 두고 경제적-문화적 침투를 진행하는 점진적 정복이 상례였다. 지구의 반대쪽에 있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강한 국가 조직을 갖고 있던 동아시아 지역에까지 이 압력이 닥친 것이 19세기 중엽의 일이었다.

일본이 개항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인 까닭은 구체제의 한계가 분명했던 데 있었다. 1840년대 초의 덴포(天保)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고 바쿠후(幕府)체제의 개혁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변화의 돌파구를 새로 찾게 되었고 개항이 그 돌파구로 떠오른 것이다. 1854년 개항도 아직 일본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에야 개항-근대화가 일본의 주된 노선이 되었다.

당시 중국과 한국에는 일본처럼 개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계기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이고 일본은 신흥 열강으로 우월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우월감 위에서 중국과 한국이 개항을 거부한 정책을 '쇄국'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그 우월감은 길게 가지 못했다. 2차대전 패전으로 좌절감에 빠진 일본 지식인들은 중국의 공산화를 보며 부러워해 마지않았다. 일시적 성공에 도취해 본색을 잃고 나대다가 나락에 빠진 일본인과 달리 중국인들은 길고 고된 시련을 견뎌낸 끝에 인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정치체제를 이뤄낸 것으로 보였다. 이 관점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일본이 눈부신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일본이 발전의 한계에 부딪히고 중국의 굴기를 바라보면서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의 반복 앞에서 '쇄국'을 부정적으로만 보던 시각을 한 차례 되짚어볼 필요를 느낀다. 특히 중국 대외정책의 보수적-폐쇄적 측면을 살펴보면서 조선의 이른바 쇄국정책의 이해를 더 넓고 깊게 할 수 있다.

중국의 '쇄국정책'으로 흔히 지목되는 것이 '해금(海禁)'이다. 그 폐쇄성을 극적으로 드러낸 장면으로 1793년 건륭제(乾隆帝, 1736~1796 재위)의 영국 사절 매카트니 회견이 자주 꼽힌다. 황제는 영국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영국의 통상 확대 요청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오직 훌륭한 통치를 행하고 천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뿐이요. 진기한 물건이나 값비싼 물건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가 보내온 공물을 내가 가납하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그것을 보내온 그대의 마음을 생각해서일 뿐이요. 이 왕조의 크나큰 덕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모든 왕과 부족들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귀한 공물을 보내오고 있소.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소.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에서 나는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소."

한 마디로 중국 황제는 해외 무역의 확대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뜻을 둔 "훌륭한 통치"란 질서 유지였다. 건륭제는 열 차례 정벌의 승리를 뜻하는 '십전(十全)'으로 청나라 강역을 확장한 황제였지만 그의 정벌은 남의 땅 빼앗는 정복이 아니었다. '보천지하 막비왕토(普天之下 莫非王土)의 이념에 따라 천하의 질서를 책임지는 천자 입장에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벌일 뿐이었다. 민생(民生)의 향상도 물론 천자의 사명이었지만 질서 유지보다는 부차적인 과제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원거리 무역 상품은 고가 사치품 위주였다. 서양과의 무역은 서민의 민생과 관계없는 것이었다. 사치품의 범람으로 질서를 해치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였다.

한편 매카트니는 비망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

"중화제국은 낡고 다루기 어려운 초대형 전함과 같은 존재다. 운이 좋아서 뛰어난 선장과 유능한 선원들을 계속해서 만나 왔기 때문에 지난 150년간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고, 그 덩치와 생김새만 가지고도 그 이웃들을 겁에 질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능한 선장에게 한 번 걸리기만 하면 기강이고 안전이고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아마 바로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동안 난파선으로 떠다니다가 어느 날 해안에 좌초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그 배의 바닥 위에 고쳐 짓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 건륭제의 매카트니 회견을 그린 두 장의 그림. 당시 유럽인의 중국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上은 1793년 윌리엄 알렉산더 作, 下는 1792년 제임스 길래이 作) ⓒ위키피디아

매카트니가 고두(叩頭)의 예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행에 실패했다는 얘기가 많이 떠돌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 이듬해 북경을 방문한 네덜란드 사절단은 고두의 예를 행하고도 매카트니보다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이 없었다. 실패의 원인은 세계관의 차이에 있었다.

건륭제는 중국의 역사를 통해 '천자(天子)'의 이념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한 황제의 하나로 꼽힌다. 지금 중화인민공화국 영토로 대략 남아있는 청나라 강역을 완성한 황제가 건륭제였다. 매카트니를 접견할 때 83세의 건륭제는 재위 58년간의 업적에 만족해서 자신이 굳혀놓은 천하의 질서가 오래도록 다시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반면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1737~1806)는 당시 세계의 변화,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한 변화에 가장 민감한 사람의 하나였다. 평민 출신으로 공적에 의해 작위를 획득한 그는 서인도제도 그레나다(1776~1779)와 인도 마드라스(1781~1785)의 총독을 지냈다. 1773년 영국의 7년전쟁 승리로 파리조약을 맺을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a vast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이란 말을 대영제국에 처음 적용시킨 것이 청년 외교관이던 매카트니였다고 전해진다. 그 말은 앞서 스페인 세계제국을 두고 쓰던 말이었다.

매카트니는 외교관과 총독으로 근무하는 동안 무역활동을 통한 영국의 국력 성장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무역의 확대는 영국의 번영을 키우고, 또한 자신의 신분을 높이는 길이었다. (1787년에 영국은 캐스카트를 중국에 사절로 보냈으나 항해 중 병사했다. 다음 사절로 매카트니가 추천되었을 때 그는 작위 승급을 조건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매카트니는 비망록에 이렇게 이어 적었다.

"중화제국의 침몰은(상당히 유력한 전망이다.) 아시아에서 교역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곳곳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중국인들의 근면성과 재능은 위축되고 약화되겠지만 아주 없어질 수는 없다. 중국의 항구를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질 것이고 모든 나라의 모든 모험가들이 시장을 찾아 중국의 구석구석을 파고들 것이다. 상당 기간 갈등과 혼란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정치적으로나 해상활동으로나 상업상으로나 세계 제일의 강국을 이룩한 영국이 이런 변화 앞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고 다른 모든 경쟁자를 앞서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변화'를 원하는 매카트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어떤 변화 속에서도 가장 큰 이득을 얻을 경쟁력을 갖춘 나라가 영국이므로 갈등과 혼란에 개의할 것 없이 어떻게든 큰 변화를 빨리 일으키는 것이 영국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그로부터 50년 후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이 혼란에 빠질 때 영국이 가장 큰 이득을 얻을 것을 내다본 뛰어난 통찰력이다.

매카트니의 통찰력에 대비 시켜 건륭제의 완고함을 중국인의 우매함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고,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곤경이 이 우매함과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서양인들만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1860년대 이래 중국의 개혁가 중에도 그렇게 본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시각은 나타난 결과에 꿰맞춘 것이었다. 아편전쟁은 매카트니 회견 후 두 세대가 지난 후에야 닥칠 일이었다. 건륭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 상황에 관한 정보를 꾸준히 확보하고 있었다. 최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선교사를 교황에게 사절로 보낸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건륭제와 매카트니의 차이는 정보력과 판단력의 우열보다 세계관의 차이에 있었다.

세계관이란, '세계란 이렇게 생긴 것이다' 하는 현실 인식만이 아니라 '세계란 이래야 한다'라는 도덕적 관점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동-서양 간의 무역이 늘어나는 추세는 건륭제와 매카트니가 똑같이 인식하고 있던 현상이었다. 매카트니는 이 추세를 더욱 확장하는 것이 영국에 유리한 일이고 자신에게도 유리한 일이라고 보는 사람이었다. 반면 건륭제는 어떤 추세든 급격한 변화는 천하 질서에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무역이 늘어나더라도 관헌의 통제를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건륭제의 할아버지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재위)는 3번(三藩)의 난이 평정된 직후인 1685년에 네 군데 해관(海關)을 운영하는 정책을 세웠다. 그런데 건륭제는 1757년에 그중 영파(宁波)、천주(泉州)、송강(松江)의 세 곳 해관을 철폐하고 광주(廣州) 한 곳만 남겼다. 그리고 광주에서도 서양인이 일반 상인들과 직접 거래하지 못하게 하고 13행(行)의 전매상인에게 위탁하게 했다. 그것이 아편전쟁 때까지 청나라가 서양 상인들에게 허락한 공식 무역체제였다.

1685년에서 1757년까지 72년간 네 개 해관에 기항한 서양 선박은 모두 312척이었는데 1757년에서 1838년 아편전쟁 때까지 81년간 광주 해관에 기항한 서양 선박은 모두 5107척이었다는 통계가 있다.(<바이두백과> "淸朝海禁") 이것을 놓고 광주의 일관(一關)체제가 그 전의 사관(四關)체제보다 효율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합리적인 주장이 못 된다. 중국 해역에서 서양 선박의 활동이 엄청나게 늘어난 데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해관을 하나로 줄임으로써 얼마간이라도 증가를 억제한 결과가 이 통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는 동-서양 간의 해상 활동(경제 활동과 군사 활동 모두)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였다. 세계를 호령한 '대영제국'의 위세도 실상은 해상 활동을 장악한 동인도회사의 '바지사장' 격이었다. (1757년에서 1858년까지 인도를 지배한 주체는 영국이 아니라 동인도회사였고, 1857년 '세포이 반란'을 계기로 동인도회사가 국유화되었다. 1800년경 동인도회사의 군대는 영국 육군의 2배 규모였다.) 해상 활동의 과도한 증가가 천하 질서에 해로운 것이라는 믿음을 청나라 조정은 갖고 있었고, 급격한 변화를 막으려고 끝까지 버텼다.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해금 정책은 해체되었고 중국은 '치욕의 세기'에 접어들었다. 해양세력이 전 세계를 휩쓴 시대였다. 이제 중국의 '굴기'를 '난세(亂世)'의 종결로 보는 중국인들이 있다. 치란(治亂)의 반복은 중국인에게 '천하'가 거듭해서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전에 없던 오랑캐가 나타나 천하를 흔들면 난세가 오고, 난세가 오래되면 그 오랑캐까지 포괄하는 확장된 천하가 안정을 찾으며 치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유라시아대륙의 새 질서를 모색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이 해양세력의 혼란을 수습하고 천하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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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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