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샤(三峽) 댐을 바라보는 굴원(屈原)의 시선

[김기협의 퇴각일기] 열다섯 번째 이야기

내게 이번 여행의 중심 주제는 단연 장강(長江, 창장)이었다. 예전에는 양자강(揚子江, 양즈장)이란 이름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장강 하류 지역에서만 부르던 이름이라고 한다. 선교사 등 서양인들이 하류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장강'을 '양자강'으로 근년까지 우리 사회에서 인식해 온 사실이 두 나라 사이의 오랜 단절을 말해준다. (출발 직전 에든버러대학의 브레이 교수에게 보낸 메일에서 'Sanxia' 방면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는데 돌아와서 받은 메일에 'Yangzi' 잘 보고 왔냐는 인사말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Yangzi'가 통용되는 듯.)

40여 시간을 배위에서 지낸 200여 킬로미터의 물길은 장강의 작은 일부, 중류와 상류 사이의 산샤(三峽) 골짜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골짜기는 중국의 역사를 통해 매우 큰 문화적-전략적 의미를 가진 곳이었고 지금도 중국 최대의 전략자산 산샤 댐을 품고 있는 곳이다. 그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중국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어렸을 때 <삼국지>를 보며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천하 3분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북방과 남방이 맞서는 가운데 내륙의 제3세력이 끼어든다? 바다에 가까운 곳이라야 평지도 많고 인구와 산업이 집중된다는 것이 내가 확보하고 있던 상식이었다. 수천 리 상류의 파촉(巴蜀)이란 곳은 험악한 지형에 의지해 방어에나 유리한 척박한 골짜기뿐일 텐데 '천하 3분'이라니?

중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의문은 차츰 풀렸다. 깊은 내륙에 있으면서도 강우량이 많고 넓은 평야를 가진 스촨(四川)분지(盆地)가 농업문명 초기 발전의 중요 지역이었음을 신석기시대 이 지역의 고촉(古蜀)문화에서 알아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를 지나는 동안 고촉문화권은 장강 하류 유역의 양저(良渚)문화권과 함께 황허(黃河) 유역에서 출범한 중화문명권에 통합되었다.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 패권의 물적 기반이 기원전 316년 촉(蜀)나라와 파(巴)나라 등 스촨 지역을 장악한 데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사기(史記)> '화식(貨殖)열전'에 스촨 지역의 경제활동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진한(秦漢)제국의 정치체제는 앞 시대의 황하문화권에 기초를 둔 것이었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철기 보급 과정에서 장강 하류의 양저문화권과 상류의 고촉문화권이 합류, 융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변방이면서도 제국의 중심부에 필적하는 인구와 경제력을 갖고 있었던 것 아닐지. 그러다가 한제국의 쇠락을 맞아 오(吳)와 촉한(蜀漢)의 근거가 된 것 아닐지.

그렇다면 제갈공명의 '3분지계'란 스촨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방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조(曹操)가 장악한 북중국, 손권(孫權)이 자리 잡은 남중국에 필적하는 자원을 가진 스촨 분지는 '천하 3분'의 한 축을 세울 수 있는 곳이었다. 다만 방어에 유리하면서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소극적 전략이라 하겠다.

1937년 말 국민당정부의 충칭(重慶) 천도도 제갈공명과 같은 방식으로 스촨 분지의 전략적 가치를 활용한 것이었다. 한 국가의 규모를 유지할 만한 인적-물적 자원을 품고 있으면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것이 그 전략적 가치다. 방어에 유리한 조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산샤 협곡이다.

스촨 분지에서 외부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장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는 길과 서북쪽으로 한중(漢中) 고원지대를 거쳐 산시(陝西) 방면으로 나가는 길이다. 이번 여행에서 하나 아쉬운 점이 시안(西安)에서 스촨으로 들어가는 길을 밤중에 지나느라 지형을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기세를 피해 "잔도를 불사르고" 한중에 칩거했다는 대목을 보면 역시 험준한 지형인 모양인데. 한편 삼국지에서 촉한과 조위(曹魏)가 한중에서 일진일퇴를 오랫동안 거듭하는 장면을 보면 험준한 지형보다는 대규모 보급이 어려운 지리적 조건이 더 중요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대적 교통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단계에서 장강은 스촨 분지의 교통로로서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산샤, 삼협 이야기는 많은 글에서 읽었다. 사진도 꽤 봤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 보니,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강릉 거리에 맞먹는 길이의 협곡 거의 전부가 7~80도 넘는 수백 미터 높이의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었다. 김준엽과 장준하 등이 일본군을 탈출해 충칭으로 갈 때 이 일대를 강 따라 이동하지 못하고 절벽 뒤의 산길로 지나갔다는데, 그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이었을지 이제야 제대로 상상이 되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와 여행 중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바이두(百度)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놀란 대목 하나. 산샤 댐 저수지 면적이 1084평방킬로미터인데 그중 632평방킬로미터만이 수몰 면적이고 나머지는 원래의 하천부지였다는 것이다. 큰 댐으로 만들어지는 저수지에는 평지와 구릉이 많이 잠기기 마련인데 산샤 댐 저수지는 가파른 협곡을 채웠을 뿐, 평지가 물에 잠긴 곳이 아주 적은 것이다. 정밀한 지도를 봐도 충칭에서 이창(宜昌) 사이에 원래의 강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조금 굵어졌을 뿐이다.

산샤 댐의 이력서를 바이두에서 줄여 옮겨놓는다.

1992년 4월 제7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 《关于兴建长江三峡工程的决议》 통과.
1994년 12월 착공.
1997년 11월 강물을 가로막는 데 성공.
2003년 6월 담수 시작, 135미터 높이까지 물이 찬 후 5단 도크를 통한 선박 통항과 발전 시작.
2006년 5월 댐 완공. 9월 제2차 담수로 156미터까지 물을 채워 방홍(防洪) 기능까지 완성.
2008년 9월 175미터 정상수위를 향한 첫 담수 시도, 172.8미터에 이름.
2008년 10월까지 댐 좌우에 70만 킬로와트 발전기 26대 설치. (2012년까지 6대 증설)
2009년 17년의 공기 끝에 완전 준공.

이 대협곡의 지형을 수력발전에 이용할 가능성은 일찍부터 탐색되기 시작했다. 1918년 순원(孫文)의 <건국방략(建國方略)>이 그 출발점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1930년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항일전쟁에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미국과 합작으로 추진할 길을 찾게 되었다. 1944년 미국 기술자 소비지(J L Sovage)가 현지를 답사하고 제출한 보고서에 지금의 산샤 댐과 비슷한 규모의 모델이 제시되었다. 지금의 댐에서 30여 킬로미터 하류 지점에 225 미터 높이의 댐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계획의 실행이 추진되어 수십 명 중국 기술자가 미국에 파견되기도 했지만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퇴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공산정권도 장강 수리(水利) 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제대로 착수할 형편이 되지 못했는데, 1970년 문화대혁명의 열기 속에서 거저우 댐(葛洲坝) 사업이 시작되었다. 소비지가 생각한 위치보다 몇 킬로미터 하류에 높이 40여 미터의 낮은 댐을 세우는 공사가 1971년 시작되어 곡절 끝에 1988년 완공되었다. 그 과정에 어떤 시행착오들이 있었는지 <바이두백과>에 세밀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계획을 급박하게 잡고 설계와 준비와 시공을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공사를 시작한 후 적지 않은 문제가 드러났"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방면의 경험이 축적되어 산샤 댐 공사를 위한 전면적인 실전 준비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거저우 댐 공사의 전반부가 1981년에 완성되었는데, 그 무렵부터 '진짜 댐' 건설 논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1984년부터 150미터 높이의 댐 건설 논의가 구체화되었고, 180미터까지 높여 달라는 충칭시 정부의 제안이 이어 나왔다. 그렇게 해야 1만 톤급 선박이 충칭까지 항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8년간의 연구와 토론을 거쳐 1992년 전국인민대표대회 결정이 나왔다. 4월 3일 투표에서 출석 2633인 중 찬성 1767인, 반대 177인, 기권 664인에 25인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바이두백과>에 기재된 것은 이 사업이 과학적일 뿐 아니라 민주적인 원리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는 중국 당국의 자랑을 비쳐 보이는 것이다.

댐 구경에서 제일 흥미로운 것이 선박 통행로였다. 5단계로 된 갑문통행로(船闸)는 한 칸이 길이 280미터, 폭 34미터, 최소 깊이 5미터로 1만 톤급 선박까지 지나가는데,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따로 되어 있다. 한 차례 통과에 4~5시간 걸린다고 한다. 따로 선박엘리베이터(升船机)가 있다는데, 길이 120미터, 폭 18미터, 물 깊이 3.5미터로 3000톤급 유람선을 담은 1만여 톤 무게의 케이지를 한 시간 내에 올려 보내고 내려 보낼 수 있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바이두를 뒤져보다가 놀란 일 또 하나는 댐 건설을 통한 하운(河運) 수송량의 증가다. 거저우 댐 완성 후 수송량이 연간 400만 톤에서(1982) 1000만 톤으로(1994) 늘어났다 하고 산샤 댐 완성으로 5000만 톤까지 늘어났다 한다. 장강은 유사 이래 스촨 지역의 최대 수송로였다. 그러나 댐 건설 이전 산샤 협곡의 모습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조그만 배가 물이 얕은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인부들이 강 양쪽에서 밧줄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등에 짐을 실은 말이나 나귀를 험한 길로 몰고 다니는 것보다는 효과적인 수송로였을지 몰라도, 1만 톤급 선박이 충칭까지 편안하게 오르내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래서 철도와 도로가 개설될 만큼 개설된 지금까지도 화물 수송의 통로로 큰 역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도 큰 화물선들이 줄을 이어 산샤 댐 갑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산샤 댐의 발전용량은 2250만 킬로와트다. 70만 킬로와트 발전기 32대와 5만 킬로와트 발전기 두 대. 70만 킬로와트라면 수풍댐 발전용량이다. 2250만 킬로와트는 중국 전체 발전용량의 2%, 전국 수력발전용량의 10% 규모다. 그리고 저수량이 393억 톤이라는데 그중 222억 톤이 홍수 방지에 활용될 수 있는 용량으로 초당 2만7천 톤 내지 3만3000톤의 조절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2012년 7월 12일 순간 유입량이 초당 7만1200톤으로 최고기록을 세울 때도 댐의 홍수 방지 능력이 충분히 확인되었다고 한다.

문명사를 공부하면서 근대인의 자연에 대한 오만한 태도와 자연을 '정복'하려는 무모한 자세에 비판의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에 눈감고 자연을 신외지물(身外之物)로서 소유의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이 현대문명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보게 되었다. 산샤 대협곡의 웅장한 자연을 물속에 가라앉힌 이 댐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자연 '정복'의 한 사례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댐의 존재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은 내가 '친중파'이기 때문일까? 그런 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근현대문명을 비판적으로 보지만 극단적 러다이트(Luddite)는 아니라는 사실부터 분명히 하고 싶다. 자연의 착취가 심화(深化)되는 문명의 발전 방향을 나는 수긍한다. 다만 그 방향에 아무 괴로움도 느끼지 않고 자연 파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變態)를 걱정하는 것이다. 산샤 댐을 만들어야 하게 된 사정이 슬프다. 그러나 댐을 만들면서도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에게는 고마움과 연대감을 느낀다.

굴원(屈原, -340 ~ -278)도 이런 마음으로 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댐 인근에 있던 그의 사당이 물에 잠기게 되어 옮긴 곳이 댐을 1 킬로미터 남짓 거리에서 바라보는 언덕 위였다. 사당 앞에 세워진 거대한 입상이 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문장(文章)의 시조이자 지조(志操)의 상징으로, 중국문명의 큰 스승으로 모셔져 온 굴원의 시선이 이 거대한 사업으로 하여금 문명 파괴의 길로 흘러가지 않도록 지켜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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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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