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위기' 앞에서 '적응주의'를 생각한다

[김기협의 퇴각일기] 열한 번째 이야기

영국의 한 친구에게 오랜만에 근황을 적어 보내다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Retreat Diary'라고 했다. 쓰면서 생각하니 '퇴각일기'보다 '피정일기'로 읽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퇴각(退却)'에 '피정(避靜)'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일상생활의 틀을 벗어나 마음을 다듬는 시간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피정의 원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불교의 '정진(精進)'이나 도교의 '면벽(面壁)'은 말할 것도 없고 세속인의 '휴가(休暇)'에서도 피정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만 가톨릭교회의 경우 제도화된 신앙 활동으로서 '피정'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

궁금한 생각이 들어 사전을 뒤져보니, 가톨릭교회에서 피정이 제도화된 것이 뜻밖에도 근세의 일이었다. 16세기 중엽 가톨릭개혁 중에 이뤄진 일이고 예수회 창립자 이냐시오 로욜라(1491~1566)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30년 전 가톨릭교회사를 처음 공부할 때 주제가 예수회의 적응주의(accommodationism)였고, 2년 전 입교할 때도 적응주의 정신에서 열쇠를 찾았다. 피정에 관한 로욜라의 역할에 마주치니 혹시 피정 제도와 적응주의 정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흥미가 끌린다.

위에서 '가톨릭개혁(Catholic Reformation)'이란 말을 썼는데, 16세기 전반기 가톨릭교회가 겪은 변화를 가리키는 말로,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 더 많이 쓰인다. 내게도 '반동종교개혁'이 더 익숙했고 '가톨릭개혁'이란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가톨릭교회 안에서만 쓰는 말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얼마간 공부한 뒤에는 '가톨릭개혁'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나 자신이 입교할 생각이 전혀 없던 시절인데도.

왜 그런 판단을 하게 되었을까.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16세기 전반은 '종교개혁(Reformation)'의 시대로 알려져 왔다. 19세기 중엽 근대역사학의 형성 과정에서 굳어진 이 관념은 당시 유럽의 사조가 반영된 것이다. 교회를 중세의 유제로 보며 인간이 그로부터 풀려남으로써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본 19세기 근대인에게는 종교개혁이 근대로 들어서는 대문이었다. 그 앞에서 가톨릭교회는 구체제에 집착하며 '근대화'를 가로막은 '반동'세력으로 규정된 것이었다.

이 규정은 '역사의 발전'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중세보다 근대가 더 좋은 시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아버지의 일기 1950년 7월 7일 자 점령 당국의 요구에 따라 이력서와 자서전을 작성한 이야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상 경향'의 조목 밑에 “역사적 필연성을 믿었으나 성격이 다우지지 못해서 온건한 학구(學究)로 지냈음”이라고 써놓고 보니 내 딴은 너무 지나친 제스처를 보인 것 같아서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으나 보는 이는 “이따위 개수작이 다 무에람” 하고 눈을 흘길 것을 생각하니 등골에서 진땀이 날 노릇이다. 그렇다고 다섯 줄 모두 '없음'이라 써 바침은 일부러 반발하는 것처럼 보일는지도 모를 일이고 달리는 어떻게 써볼 재간이 없어서 그냥 써내었다."

'역사적 필연성', 즉 공산주의가 제시하는 역사의 발전에 대한 믿음을 표방하지 않으면 '반동'으로 몰리는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버지가 믿는다고 적은 '역사적 필연성'은 공산사회를 향한 필연성이 아니라 막연한 의미에서 역사의 법칙성 정도였을 것 같다. 처해 있는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필연성'이란 표현을 쓰면서 그분의 어지러운 심사를 읽을 수 있다.

내가 아버지 일기를 처음 본 때(1987)로부터 책으로 내기(1993)까지의 기간은 자크 제르네의 책을 본 때(1985)로부터 예수회 적응주의에 관한 학위논문을 제출하기(1993)까지의 기간과 대략 겹쳐진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마음이 자리 잡은 기간이다.

공산주의자들이 '필연성'의 믿음을 강요한 것처럼 자본가들도 자기들이 제시하는 역사의 법칙에 대한 믿음을 강요해 왔다. 도전자 입장의 공산주의자들처럼 과격한 방법을 쓰기보다 주류 담론의 은근한 지배를 통해 이뤄져 온 강요다. '자유', '평등' 가치의 절대화가 대표적인 방법이다. 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 가치의 절대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절대화는 관념화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며, 그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한 인간형이 관념화되어 온 것이다. 이 압력을 이겨내고 '있는 그대로' 인간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을 역사학도의 진정한 사명으로 나는 본다.

종교개혁의 시대, 16세기 초 유럽으로 돌아가 본다. 중세에서 근대로, 봉건체제에서 자본체제로 옮겨가는 상황이었다. 인구 증가, 기술 발달, 경제 확장 등 기반 조건의 변화에 따른 유동성의 증대는 분명히 유기론적 원리의 봉건체제에서 원자론적 원리의 자본체제를 향한 것이었다. 역사의 '법칙성'을 보여주는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을 수긍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도와 방법에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결정될 여지가 있다.

가톨릭교회는 귀족계급과 함께 유럽 봉건체제의 핵심 요소로서 특권층을 이루고 있었다. 특권층으로서 변화에 저항하는 '수구'의 길과 체제의 핵심 요소로서 변화를 원만하게 진행하려는 '보수'의 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어느 시점까지는 변화의 추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구의 길에 치우쳤고 그 때문에 종교개혁의 혁명적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서서는 변화의 방향을 수긍하고 그 안에서 교회의 역할을 찾는 개혁의 움직임이 자라나 '가톨릭개혁'을 이룬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옳은 것으로, 가톨릭개혁을 반동적인 것으로만 보는 미숙한 흑백론은 역사적 현실과 거리가 있다. 교회 입장에서 시대의 변화에 맞춰가려는 노력으로 양쪽 다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크게 봐서 진보 노선과 보수 노선의 차이로 볼 수 있는데, 어느 쪽에나 불순세력이 끼어든다. 진보 노선에는 혼란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급진세력이, 보수 노선에는 기득권에 집착하는 수구세력이 끼어든다. 가톨릭개혁을 '반동'개혁으로 보는 가장 큰 증거가 종교재판(Inquisition)이고 종교재판의 반동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고문 허용과 마녀사냥이다. 그런데 고문에 의한 재판은 그 시대에 종교재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마녀사냥도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더 성행했다. 유럽이 중세체제에서 근대체제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19세기까지 진보 노선이 우세했기 때문에 가톨릭개혁에 '반동'의 딱지가 붙은 것은 '선전전(宣傳戰)'의 결과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6세기 중엽 가톨릭개혁에 앞장선 조직이 로욜라의 주도로 창설된 예수회였다. 예수회 초기 사업의 양대 축이 교육과 선교였다. 유럽 안에서는 학문과 교육의 발전을 통해 교회 중심의 정신세계를 지키려 했고, 유럽 밖으로는 확장되는 유럽인의 활동영역을 교회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여기서 선교의 의미에 변화를 일으킨다. 종래의 선교는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개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원래 속해 있던 사회를 떠나 기독교사회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선교방식이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화(Reconquista) 과정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이슬람교도와 유태교도들을 강제로 개종시켜 놓고는 그 개종의 진정성을 믿지 못해 핍박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종교재판이 스페인에서 어느 곳보다 많은 문제를 일으킨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로욜라와 그 동료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552)가 모두 스페인 사람이라서 개인을 상대로 한 강제적 개종의 문제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비에르가 예수회 선교를 개척하면서 제시한 적응주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 노선이었다. 대상 사회 전체를 기독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교회의 최소한의 본질을 지키면서 대상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최대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문명권 사이의 접촉이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이 적응주의가 새로운 세계 문명을 빚어나가는 바람직한 '보수' 노선이었다고 나는 본다.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이 노선에 따라 중국 선교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리치가 죽은 몇 십 년 후 예수회 외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이 노선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느님을 '상제(上帝)'로 부르고 교인들의 제사를 허락하는 등 중국에서 예수회의 조치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항의한 것이다. 17세기 중엽부터 1742년까지 근 100년간 이어진 전례 논쟁(Rites Controversy)에서 적응주의가 패퇴하고 뒤이어 예수회가 해산된 것은 이 시기에 유럽중심주의(Eurocentricism)가 강화된 결과로 이해된다. 유럽인이 세계를 향해 적응 아닌 정복의 자세로 나선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은 역사를 통해 부단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질적인 문화와 마주쳤을 때 내 문화를 지키려는 의지, 나아가 상대방을 내 문화에 포섭하려는 의지는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기려는 본능을 억제하고 상대방과 어울리려 노력할 때 발전이 이뤄진다. 본능을 벗어나지 못하고 '너 죽고 나 살기'로만 나갈 때, 설령 당장은 투쟁에 승리해서 이득을 누리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억압당하는 쪽의 불만이 위험부담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유리한 입장에 있더라도 내 욕심을 최소화해서 상대방의 불만을 줄여줘야 그 관계를 통해 쌍방이 얻는 이득이 오래갈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하는 적응주의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들이 어울려 '큰 나(大我)'를 키워온 상생(相生)의 길이 바로 문명 발전의 길이었다.

16세기 이래 유럽인의 활동 영역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의 적응주의는 기존 문명권의 물리적 통합보다 유기적 화합을 통해 근대문명을 빚어내려는 노력이었다고 나는 본다. 현실에서는 18세기 이후 유럽중심주의가 지배적 풍조가 되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여타 문명권을 파괴하는 '세계 정복'의 길이 열렸다. 그 결과 인류문명 전체가 지속가능성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버그루언연구소가 '미래 질서(future governance)' 모색에 나선 것도 이 위기감 때문이다. 그 연구소에서 '천하(天下)'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천하체계가 여러 문화권의 유기적 화합을 위한 좋은 모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천(天)'의 역할이 중요하다. 예컨대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양자 간의 직접적 관계에 그친다면 이해관계가 평면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천(天)'이라는 초월적 제3자가 개입함으로써 그 관계가 유기적 안정성을 갖게 된다. 어느 쪽에서도 당장의 작은 이득을 위해 '천(天)'의 원리를 등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두 나라 모두 장기간에 걸쳐 부담을 줄이고 이득을 늘릴 수 있었다.

고대 중국인이 생각한 '천(天)'과 고대 한국인이 생각한 '하늘' 사이에는 같은 점도 있었고 다른 점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서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 '천(天)'을 개입시킬 때는 그 의미에 기본적 합의가 된 것이다. 짐작건대 중국의 '천(天)' 개념이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문화권의 화합이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화합의 기제로서 '천(天)' 개념이 더 세련된 형태로 발전해 있었을 테니까.

예수회의 적응주의도 적응의 기제로서 '천(天)' 개념에 착안했다. 기독교의 '신(神)'과 중국의 '천(天)'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으려 한 것이다. 이 시도는 18세기에 한 차례 좌절되었지만, 그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패권주의에 뒤덮인 세상에서도 인류문명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이어왔다고 생각한다. 문명의 위기감 고조에 따라 그 복류가 드러나고 있다.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와 방향은 그의 습관과 생활방식에 따라 제한된다. 가톨릭교회의 피정 등 일상을 벗어난 침잠의 시간에는 그 제한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의미가 있다.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 자라나는 노력이다. 길들여진 이해관계를 넘어 더 큰 새로운 이해관계를 꿈꾸는 시간이다.

내게는 인터넷도 원활하지 못한 연변에서 지내는 시간이 피정의 시간이다. 남한의 이해관계를 넘어 민족의 이해관계를 생각하고 한국인의 이해관계를 넘어 인류사회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데 쓰는 시간이다. 피정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진 로욜라는 책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을 쓰면서 어떤 초월을 꿈꾸고 어떤 화합을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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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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