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임시정부에 관한 '모든 이야기'

[반병률 교수 인터뷰 ①] 상하이 임정 말고 통합임정 주목해야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그 뿌리를 명확히 밝혀, 일제에 항거한 임시정부가 한국의 출발점임을 강조하고 있다. '3.1운동-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진 국가의 정체성 성립 과정을 헌법 전문이 뚜렷이 밝혔다.

한때 극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의 뿌리를 이승만 정부에서 찾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음에도 국민 여론이 그 같은 주장에 흔들리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 헌법 전문의 이 같은 내용이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지적이 역사학계 일부에서 나온다. 전문에서 평가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인지, 같은 해 9월 11일 상하이에서 확대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통합임시정부)'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엄밀히 말해 1919년 4월 만들어진 상하이 임시정부를 뿌리로 보는 듯하다. 근거가 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추진하려 했다. 4월 11일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로 알려졌다. 즉, 통합임시정부 수립일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었고, 이들이 일제를 상대로 무장 투쟁을 조직하는 한편 세계 만방에 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전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간단한 서사로 과거를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 서사에서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는 엄밀히 말해 통합임시정부여야 한다.

통합임시정부 수립 전 한국의 임시정부는 약 6개가 있었다. 이처럼 곳곳에 산재했던 임시정부 역량을 한데 모아 상하이에 그 거점을 확고히 한 정부가 통합임시정부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르면 올해 임시공휴일 지정을 추진했어야 하는 날은 4월 11일이 아니라 9월이어야 한다. 4월 11일은 '여러 임시정부 중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만의 수립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지적이다. <프레시안>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 여론이 깊이 주목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논할 가치가 크다 여겨지는 반 교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반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반 교수는 최근 저서 <통합임시정부와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신서원 펴냄)에서 통합임시정부의 수립 과정과 이 정부 건립에 영향을 미친 주요 독립운동가 세 명의 행적과 입장을 조명했다. 책에서 반 교수는 통합임시정부 수립 과정을 세세히 짚어야 우리 역사 인식이 재정리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사를 상하이 임시정부만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당시 선조들의 활발했던 독립운동 움직임을 오히려 축소·왜곡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반 교수는 아울러 역사학계의 주류적 입장인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 4월 11일설' 역시 반박하고 나섰다.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주장에 반발하는 움직임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앞서 살핀 임시정부의 적통성에 관한 문제 제기이고, 다른 하나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4월 11일로 바꿀 것이 아니라 4월 13일로 두어야한다'는 지적이다. 반 교수는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은 9월의 하루로 정하는 게 최선이나, 굳이 4월로 두자면 4월 11일보다 4월 13일로 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4월 11일은 사실상 임시정부 헌법 제정 기념일이고, 4월 13일이야말로 대내외적으로 정부수립을 공포한 날인 만큼, 4월 13일이 임시정부수립기념일로 더 정확하다'는 게 반 교수의 주장이다. 1989년 이후 한국은 4월 13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해 왔다.

즉, 반 교수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은 1919년 4월 13일로 봐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의 정통성은 1919년 4월 13일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가 아니라, 같은 해 9월 설립된 통합임시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반 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임시정부의 역할은 물론 한계도 짚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가 오직 임시정부만을 중심으로 항일 역사를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임시정부 바깥의 독립운동, 즉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의 무장투쟁과 국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노동자·농민 투쟁 등 다양한 주체들의 독립 운동 역사를 자칫 왜곡하거나 잊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다.

반 교수는 자신의 첫 논문 <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조직, 1987년>을 시작으로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의 통합정부 수립운동, 1988> 등을 통해 지난 30여 년 간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과 러시아 원동(극동), 북간도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을 연구했다. 박인규 프레시안협동조합 이사장이 진행한 반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전체 인터뷰를 두 편으로 나눠 싣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출범한 '상하이 임정'이 아니라, 같은 해 9월에 상하이에서 출범한 '통합임시정부'에서 한국 정부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상하이 임정과 통합임정, 구분해 인식해야 한다

프레시안 : 최근 <통합임시정부와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이란 저서를 펴냈다. 서문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온갖 행사들이 "일회성 행사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100주년을 계기로 3.1운동과 임시정부에 관한 일반시민들의 역사인식이 한층 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했다.

또한 "학계의 연구수준이 지나치게 상하이 임시정부에 편중"돼 있고 이는 "냉전과 분단에 따른 시대적 제약에서 비롯된 독립운동사 연구에서의 심각한 불균형 상태"를 반영한다면서 "임정법통론만으로는 국내외 다양한 분야, 여러 계층이 벌인 독립운동의 전체상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 현대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같은 지적은 조금 생경하게 들린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집중'하는 현대사 인식에 왜 문제가 있나?

반병률 : 3.1운동의 결과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건 맞다. 그런데 4월에 만들어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9월의 통합임시정부 출범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우리가 제대로 짚지 않고 넘어가고 있다. 그 결과 상하이 임시정부(통합임시정부 수립 이전 상하이에 따로 수립된 임시정부)만을 3.1운동의 총결산으로 인식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1910년대 당시 독립운동 세력이 지녔던 문제를 되풀이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발표한 내용을 종합하면,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만들어진 임시정부가 중첩된 일부를 제외하더라도 국내에 3개, 상하이에 1개, 노령에 1개, 간도에 1개 등 6개에 달한다(이 중 실질적으로 활동한 조직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노령 대한국민의회).

당장 1919년 3월 17일 노령(러시아 원동 지역과 시베리아 일대)의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 기능을 수행하는 중앙기관으로서 독립선언서 선포와 함께 내외에 공포되었다. 의장은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 선전부장(군무부장) 이동휘, 외교부장 최재형, 재무부장 한명세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 당시 가장 먼저 출범한 첫 임시정부다. 종래 대한국민의회가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국무경) 이승만을 각원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설립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오류다.

1919년 4월 23일에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이동휘를 국무총리총재로 선임한 세칭 한성정부도 국내에서 출범했다.

1919년 4월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만을 3.1운동의 결과로 인식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등치하면, 나머지 국내외에서 선포 또는 조직된 임시정부들의 의의는 사실상 잊히는 결과를 낳는다.

프레시안 : 1919년 9월 설립된 통합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인가?

반병률 : '정통성' 이라는 표현은 과하지만, 그렇다. 4월에 설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는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당장 상하이 임정의 국무총리로 선임되어 있던 이승만마저 한성성부 성립 소식을 접한 이후에는 상하이 임정을 부정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조직할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이동녕조차 상하이 임정을 떠나 있었다. 서·북간도와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 세력 역시 상하이 임정 지지를 유보하고 있었다.

1919년 당시 여러 임시정부 중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던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노령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한성정부다. 한성정부는 국내에서 조직되었는데 그 조직자들은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인사들을 각원에 임명하고 이들에게 그 운영을 위임하였다. 더구나 한성정부를 조직했던 주요 인사들은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해 버린 상태였다. 한성정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한성정부가 새롭게 부상했다. 상하이 임정과 노령 국민의회 어느 쪽도 유일한 중앙기관 위상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성정부가 △국내 13도 대표들에 의해 조직됐다는 대표성과 △국민대회라는 선포절차를 거쳤다는 점 △그리고 국내에 존재한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한성정부의 이러한 권위와 우위성에 주목하고 한성정부 정통론을 고집한 인물은 다름 아닌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였던 이승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 임정 측은 국내외적으로 대표성을 인정받던 한성정부 안에 맞춰 1919년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근 한 달에 걸친 개조작업(헌법개정안 통과, 각원구성, 관제개편)을 마치고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총판 안창호를 주축으로 하는 통합임시정부를 구성하게 됐다. 이 과정에 안창호의 공이 컸는데, 그는 협상대표로 현순과 김성겸을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측에 파견해 통합협상 합의를 이끌어냈다.

우리가 1919년 가을에 출범한 통합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중시하고, 상하이 임정의 진정한 출발점을 이 때로 잡아야 하는 이유다.

프레시안 : 기존 주류 역사 서술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노령 정부를 흡수했다'는 식으로 서술되는 내용을 반 교수는 다르게 해석한 듯하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노령 국민의회 양측이 각자 해산하고 한성정부를 승인·봉대하기로 합의한 배경이 무엇인가.

반병률 :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조직을 논하면서 국외 세력이 임시정부의 중심이 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국내에 임시정부 기반을 만들어야 하느냐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국외에서 독립 운동을 한 세력은 당연히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봤지만, 3.1운동 당시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국내의 33인과 임시정부가 어떻게든 연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만만치 않았다.

어쨌든 전체 인구 2000만 명의 10퍼센트가 넘는 연인원 200만 명이 3.1 만세시위에 나설 정도로 국내의 독립 열망이 컸는데, 그렇다면 그들과 직접 연결된 국내 임시정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세 인식 상황도 봐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곧바로 독립이 이뤄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곧 다가올 독립에 대비해 정부 수립을 위한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정 추진세력들이 각자의 종교적 또는 지역적 기반을 배경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는 경쟁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 간에 나름의 근거와 이유로 손병희, 이동휘, 이승만 세 사람이 지도자로 거론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곳곳에서 출범했다. 초기 출범한 여러 임시정부 요직에서 이들의 이름을 중첩적으로 볼 수 있는 이유다. 결국 최종적으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한 이승만의 고집과 상해 임정과 노령 대한국민회의 통합을 중재한 안창호의 조직력에 의해 9월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했다는 게 결론이다.

▲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언제로 정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헌법상 임시정부가 바로 우리 정부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호국보훈처

"임정수립기념일, 4월 11일 아닌 4월 13일"

프레시안 : 올해 정부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고려했었다. 지난해 4월 13일 99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이낙연 총리는 "최근 학계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이 4월 13일 오늘이 아니라 국호와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내각을 구성한 4월 11일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제안했다"며 "법령 개정을 거쳐 내년(2019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1일로 수정한다"고 말했다. 반 교수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인 듯하다.

반병률 :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은 기존 안인 4월 13일로 두거나, 아예 9월로 바꿔야 한다. 9월로 바꿔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지만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한 때이기 때문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공식적으로 정한 것은 1989년이다. 당시 임시정부 전공 학자들이 임정 수립일을 4월 13일로 정리했다. 이에 따라 작년까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은 4월 13일이었다. 그런데 학계 일부에서 '4월 13일설'의 사료적 근거가 된 <한일관계사료집>의 일부 내용이 오류라고 주장하며 4월 11일이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이라는 설을 내세웠다. 이번 임시공휴일 논란은 이러한 학계 일부의 의견을 정부가 받아들인 결과다.

이를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에서 독립이 선포된 후, 민족대표 33인은 옥에 갇혔다. 그러나 이 열기를 이어가려던 사람들이 조직한 경성 독립단 본부에서 3월 말 또는 4월 초에 임시정부조직안과 임시헌법을 제정했고, 4월 8일 강대현이 이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들어가 임시정부 수립을 알렸다. 이 임시정부의 집정관은 이동휘였고, 국무총리는 이승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월 10일 당시 상하이에 집결한 인사들이 각 지방 대표회를 개최하고 이동녕을 의장으로 하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임시의정원은 4월 10일 첫 회의에서 우선적으로 국내 독립단 본부에서 조직한 임시정부를 부인하자는 안건을 표결에 부쳤으나 부결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새로운 창립이 아닌 개편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은 다음날인 4월 11일 국호제정, 관제 개편, 임시헌장 제정 등을 단행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였고, 관제 개편(집정관제에서 총리제)에 따라 국무원을 조직하고 이를 내외에 반포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관제개편의 목적이 정부의 수반으로 집정관인 이동휘 대신 국무총리인 이승만을 내세우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틀 후인 4월 13일에는 열강과 내외 인민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코자 파리로 간 김규식에게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 신임장을 발송했다.

즉, 4월 11일은 '4월 8일 국내 경성독립단 본부가 조직한 임시정부를 상하이에서 개편한 날'이며 '국무원을 내외에 반포한 날'이다. 반면 4월 13일은 '열강과 내외의 인민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날'이다. 기념일을 정할 경우, 당연히 대내외 열강에 한국 정부 수립을 공포하고, 정부 명의로 김규식에게 신임장을 발송한 사실을 더 중시해야 한다.

이 같은 인식은 당시에도 있었다. 1919년 11월 3일 출범한 통합임시정부 국무원은 4월 11일을 헌법반포일로 명명하고 이를 기념했다. 1920년대는 물론, 193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1948년에도 임정의 한독당 계열 인사들이 주도한 비상국민회의는 4월 11일을 (임시) 입헌기념일로 기념했다. 당시 인사들은 4월 11일의 역사적 의미를 임시헌장 10장을 제정한데서 찾았던 것이다. 즉, 당시 사람들에게 4월 11일은 요즘 우리 개념으로 하면 제헌절이었지 정부수립일이 아니었다.

프레시안 : 말씀만 듣고 보면 4월 11일설이 제기될 자리는 없어 보인다. 더구나 수립일을 정했던 1989년 당시에도 4월 13일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기념일로 봤다. 그렇다면 학계에서 제기된 4월 11일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반병률 : 4월 11일설 옹호론자들은 "4월 13일에 ... 임시정부를 상해에 치(置)하고 ... 평화회 열방대표와 내외인민의게 정부성립을 공포하고 김규식은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의 신임장을 발송하다"라고 정리된 <한일관계사료집> 내용에서 '4월 13일' 부분이 1919년 4월 13일 하루가 아니라 4월 중 이뤄진 일을 압축 서술한 내용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4월 11일을 임시정부 수립기념일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상하이 임정이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해 제작한 <한일관계사료집>에서 4월 13일에 일어났다고 기록한 가장 핵심적 사실, 즉 임시정부 수립을 열강과 내외 인민에게 선포한 사실, 김규식에게 신임장을 발송한 사실을 반박할 1차 사료는 제시하지 못한다. 이 핵심적인 사실까지 4월 13일에 없었다고 부정한다면 <한일관계사료집>에서 구태여 4월 13일조를 설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한편 이들은 통합임시정부가 1937년 이후 1945년까지 4월 11일을 정부수립일로 기념했던 사실을 주요 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들 행사는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전반 시기에 임시정부 해체론이 제기된 시기에 치러졌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열강의 임정 승인이 더 중요한 시기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당시는 4월 11일이냐 4월 13일이냐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더구나 앞서 지적했듯, 당시 임정 요인들은 4월 11일을 오랜 기간 헌법반포일이라는 명칭으로 기념해왔다. 1936년~1945년의 정부 수립 기념일 행사는 아주 제한적 의미로 행해졌다는 뜻이다.

프레시안 : 반 교수 입장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의 뿌리인 통합임시정부가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통합 출범했다. 통합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은 언제가 되어야 하나?

반병률 : 통합임정이 각원을 선출한 1919년 9월 6일이나 임시헌법개정안의 임시의정원 통과를 대외에 선포한 9월 11일, 혹은 각원들이 취임식을 거행한 11월 3일 등을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정 중심 독립운동사 서술, 문제 있다"

프레시안 : 일제 강점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전체 독립운동사의 맥락에서 통합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어느 정도로 평가할 수 있나? 임정을 독립운동의 대표격으로 인식하는 게 맞나?

반병률 :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임시정부가 통합 출범 후 중앙기관으로서 위상을 가지긴 했다. 1919년과 1920년에는 국정과제도 제시할 정도로 잘 돌아갔다. 당시 국무원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할 정도였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1920년 하반기 이후에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임정 출범 초기 가장 중요한 자금줄은 미주 동포 사회의 모금이었다. 그간 상하이 임정은 미주 국민회중앙총회에서 수합한 애국금 6만 원으로 재정을 근근이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가 미주지역에서 임시정부 활성화를 위해 상하이로 온 안창호다. 안창호는 미주동포들이 모아준 자금과 탁월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초기 임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명의로 1919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를 독단적으로 조직하고 이를 근거로 미주 재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미국으로부터 오던 자금줄이 완전히 끊겼다. 당시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를 겨냥하여 여느 사회단체가 자체적으로 독립자금을 모금할 경우 반역으로 처리하겠다고 엄포할 정도였다.

만주나 간도 사회 동포들은 대부분이 빈농이라 독립자금을 기대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나마 국내에서 오던 자금마저 끊어진 후, 상하이 임정은 "돈 일전이 없어 집세를 몇 달치 못 주고 또 사무실도 줄여야" 할 형편으로 내몰렸다. 이 무렵 상하이 임정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외교기관의 위상을 뛰어넘는 사실상의 분립정부로서 운영했고 상하이의 국무원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상하이 임정의 누적된 불만이 1920년 중반 국무총리와 차장들의 이승만 불신임운동으로 표출됐다. 이후 상하이 임정은 대통령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할 어떤 방도도 찾지 못하다가 결국 1925년에 이르러 가까스로 이승만 탄핵을 단행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크게 봐야 한다. 남북한 이념 갈등 등으로 인해 우리의 인식이 오직 상하이에만 갇히기 쉬운데, 우리 독립운동이 그뿐만이 아니다. 사회운동, 청년·학생운동, 무장투쟁 등이 각지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크게 일어났다. 임시정부 법통론에만 매몰되면 이 같은 순국선열들의 움직임이 다 무시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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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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