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마 1/2>이라는 일본 만화는 1987년부터 96년까지 약 10년간 주간 소년선데이에 연재된 작품으로 세계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이 만화는 상당히 흥미로운 설정을 가지고 있다.
만화의 주인공인 16세 소년 란마는 무술수련을 위해 중국의 '주천향(呪泉鄕)'이라는 곳을 찾았다가 찬물을 끼얹으면 몸이 여자로 변하고 뜨거운 물을 끼얹어야 남자의 몸으로 돌아오는 저주에 걸린다. 그 외에도 주천향의 저주에 걸려 돼지, 고양이, 오리 등으로 변하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여 갖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의 몸이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등을 구유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전에 짚어야 할 점이 있다. 왜 란마가 저주에 걸린 곳은 하필 중국일까?
만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란마 1/2>은 중국에 관한 클리셰로 가득 차 있다. 우선 란마는 언제나 소림사 도복 차림이다. 란마를 사랑하는 한 중국 소녀는 항상 몸에 딱 달라붙는 치파오를 입고 갖은 교태를 부린다.
중국의 어딘가에 있다는 주천향은 그야말로 신선이 살법한 동양고대의 이미지를 재현하며, 그 안내인은 인민복을 입고 어색한 일본어를 구사한다. 마찬가지로 주천향의 저주를 받은 란마의 아버지는 찬물이 몸에 닿으면 중국을 상징하는 판다로 변한다. 고대세계의 지속을 암시하는 주천향이 오래된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의 반복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한편 패전 후 공산진영과 담을 쌓고 있던 일본의 대중사회에 중국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를 통해서였다. 당시 베이징을 방문한 일본의 총리대신을 인민복 차림으로 맞이하는 저우언라이의 모습, 그리고 이를 기념하여 중국이 일본 우에노 동물원에 보낸 두 마리의 판다는 일본인들의 현대중국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란마 1/2>은 이와 같은 신비한 고대와 발랄한 현대라는 당대 중국의 표상을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인데, 여기에는 물론 전쟁과 침략의 근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일본 동양학의 유래
이와 같은 중국 표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확정하기란 쉽지 않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산업화, 근대화를 추진하며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이 '동양'을 새롭게 발견한 시기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보편적 리를 담지하는 고도의 추상적 개념인 '중화'가 특수한 지역적 개념인 '동양'으로 전환됨에 따라 '일본'의 의미까지 연쇄적으로 바뀌는 획기적인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가령 도쿄제국대학 철학과 교수를 지낸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1856~1944)는 1891년에 발표한 <동양사학의 가치>라는 글에서 "동양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역사상 사실을 서양에 알리는 것"은 일본인 이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바, 이는 일본에 관한 서양인의 경멸을 감소시켜줄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처럼 중요한 동양연구를 "지나인들이 손을 대기 전에 먼저 시작"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노우에는 '서양'이 원하는 '동양'을 먼저 구축하는 일이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이 중국보다 앞서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 믿었다. 이후 청일전쟁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의 속도에서 앞선 일본과 뒤처진 중국이라는 인식이 정착하기에 이른다.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론
1930년대에 본격화하는 중국과의 전쟁은 일본의 중국관에 발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 일종의 사태였지만, 곧바로 이어진 냉전체제의 고착화는 사상의 가능성을 봉인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1910~1977)를 비롯해 새로운 중국인식을 모색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가 전쟁과 아시아침략 문제를 덮어둔 채 경제적 상호관계만을 추구하는 형태로 이루어짐으로써 그들의 사유는 일부 지식인들의 담론 속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 이후 중국이 세계 굴지의 대국으로 등장하자 일본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위기감의 표현인 '중국 위협론',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 거품론'이었다. 이 두 가지 반응은 명백히 앞선 일본과 뒤처진 중국이라는 편견이 낳은 이란성 쌍생아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자기 환상과 중국 표상을 철저히 비판한 대표적인 지식인이 바로 미조구치 유조(1932~2010)다. 도쿄대학 중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그는 '중국 사회문화학회', '일중(日中) 지의 공동체' 창설에도 깊이 관여하는 등, 90년대 이후 '동아시아론'의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미조구치는 평생에 걸쳐 약 30권의 저서와 200편에 가까운 글을 썼는데, 그 대부분의 내용은 '중국을 방법으로, 세계를 목적으로'라는 거대한 테제로 압축할 수 있다. 중국에 신비한 고대를 투영하는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현대중국을 치파오나 판다 등으로 이해하는 소비적 인식을 모두 거부하고 '중국을 중국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 미조구치의 논의는 서양식 개념과 가치에 의거하지 않고 중국의 역사와 사상을 이른바 '내재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이론적 도전에 다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는 그는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중국 근대를 설정하거나 신해혁명을 유럽식 국민국가의 단초로 자리매김하는 시대구분을 부정하고, 명말청초에서 시작되는 긴 호흡에 입각하여 중국 고유의 역사적 변화를 추적한다. 미조구치는 무엇보다도 서구식 자치나 자유의 개념과는 결을 달리하는 공사(公事) 관념의 확대, 혹은 민주주의식 권리로 환원되지 않는 도덕적 행위를 중심으로 '중국의 대동적 근대'를 그려내는데 힘을 쏟는다.
이는 다시 서구식 사유방식으로 뒤덮인 근대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다원적 근대성'의 제시로 이어지고, 나아가 중국 공산주의조차 맑스·레닌주의라는 서양산 렌즈가 아닌 종족(宗族)의 상호부조적 전통으로 재해석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한다.
새로운 동아시아론을 위해
<란마 1/2>과 같은 중국 표상이 아직도 큰 인기를 끄는 일본에서, 중국에 대한 서구식 이론 및 이를 앞장서서 실천한 동양학의 전통과 힘겨운 싸움을 거듭해온 미조구치의 논의는 대단히 흥미롭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한편으로 '중국식 사회주의' 찬미라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가?
가령 미조구치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서구식 자유개념에 근거한 중국 몰이해로 규정한다. 또한 그는 문화대혁명에 담긴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을 중국고유의 대동적 근대라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 속에 희석시킨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서 문혁을 거쳐 개방개혁에 이르는 시기를 '혁명의 전진기·심화기' 또는 경제발전의 과도기로 규정하는 미조구치는 "중국이 지금은 세계의 어떤 나라에서도, 역사의 어떤 과정에서도 모델을 찾을 수 없는 진정한 혁명"(<중국의 충격>, 2004)을 일으키는 중이라고 주장한다.
다양한 편견과 선입관을 걷어내고 중국으로서 중국을 파악하려던 그의 이론적 시도는 어쩌면 다원적 근대라는 이름의 또 다른 본질주의, 혹은 중국의 약진을 옹호하는 논리에 매몰된 것은 아닐까? 일본의 중국사상사연구가 보여주는 이러한 딜레마를 주변 국가들 또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도 간행되지 않은 미조구치 전집이 중국에서 나왔으며, 한국에서도 많은 연구자들이 미조구치를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미조구치는 과거의 중화문명권이 오늘날 '환중국권'이라는 경제관계구조로 재편되고 있음을 지적하는데, 그가 말하는 '환중국권' 개념이 바람직한 동아시아의 미래상을 담을 수 있을지 심히 의문스럽다.
일본의 중국사상사연구는 이처럼 미조구치 이후 중대한 비약을 이루었고, 90년대 이후 등장한 동아시아론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인식과 동아시아론의 새로운 비약을 위해서도 미조구치의 짙은 그림자를 넘어설 혜안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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