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1년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낸다. 일하면서, 또는 일 앞뒤로 출장을 간 도시의 이모저모를 접할 기회가 생긴다. '사람들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다. 똑같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우리나라에는 없는 그 나라만의 독특한 무엇인가를 보고 들을 때 사람 살이의 다양함에 놀라기도 한다.
우리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이국의 모습을 통해 한국인(South Korean)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갖고 둘러본 도시에 대한 정보와 느낌을 <프레시안>에 정기적으로 소개하려 한다.
첫 도시는 2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하노이다. 베트남을 북한에서는 '윁남'이라 한다. 윁남이 베트남어 현지 발음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일본 사람들은 '베트나무'로 부르는데, 북한의 윁남과 일본의 베트나무 사이에 한국인이 이해하는 베트남이 있는 것 아닐까.
하노이는 물의 도시다. 우리처럼 한자 문화권인 베트남도 대부분의 어휘가 한자를 갖고 있다. 하노이는 '河內(하내)'로 도시 곳곳에 물이 많다.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하노이로 가려면, 홍강을 건너야 한다. 하노이 중심에는 신성한 거북이가 왕의 칼을 물고 사라졌다는 '호안끼엠 호수(Hồ Hoàn Kiếm, 湖還劍)'가 있다.
이 호수는 남북 700미터, 동서 250미터로 호수 남쪽에서 서남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묵는 '멜리아 호텔'이 나온다.
멜리아 호텔의 주소는 '리 트엉 키엣(Lý Thường Kiệt, 李常傑) 44'다. 1019년 하노이에서 태어난 리 트엉 키엣은 하노이에 도읍을 정한 리 왕조의 장군으로 1075년과 1076년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송나라의 침입을 막아낸 민족 영웅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멜리아 호텔 인근에서 둘러볼 곳이 두 군데가 있다. '책방거리'와 '호아로 수용소'가 그것이다. 조성된 지 몇 년 안 된 책방거리는 김 위원장 또래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조그만 서점에 들러 책을 보며 코코넛 주스를 마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호아로 수용소는 프랑스 제국주의가 베트남의 민족해방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던 곳이다. 레 주언, 쯔엉 찐, 응우옌 반 린, 도 므어이 등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들이 투옥된 곳으로,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 같은 곳이다.
따라서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집권세력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미국의 베트남 침략 전쟁 당시에는 하노이를 폭격하는 전쟁 범죄를 저지른 미국 공군 전폭기 조종사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북한과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는 역사적 공통점을 갖고 있다.
멜리아 호텔 서쪽에 하노이시 인민법원이 있고, 법원 건물 동쪽으로 책방거리, 법원 건물 서쪽으로 호아로 수용소가 있다.
호아로 수용소에서 하노이역 방향으로 두세 블록 거리에는 '베트남-소련 우정 노동문화궁전'이 있다. 현재 이곳에는 2차 북미 정상회담 취재진을 위해 프레스센터가 설치되어 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이 원조하여 세운 문화궁전 맞은편에는 '베트남 노동 총연맹(TLDLDV)'이 자리해 있다.
베트남-소련 우정 노동문화궁전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하노이역이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식 건축물로, 스위스의 제네바역과 비슷하게 생겼다.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한가운데가 파괴됐지만, 보수했다.
베트남-소련 우정 노동문화궁전 남쪽에는 '통일공원(꽁비엔 통녓, Công viên Thống Nhất)'이 있다. 남북 800미터 동서 400미터의 통일공원은 아침운동을 하러 즐겨 찾는 곳이다. 동틀 무렵부터 운동과 산책을 즐기려는 하노이안들로 북적거리는 통일공원에 오면 베트남 인민들의 의지와 활력을 느낄 수 있다.
통일공원을 나와 서북쪽으로 20분 정도 걸으면 다시 호안끼엠 호수에 돌아오게 된다. 호수 동쪽에는 1009년 리 씨 왕조를 세우고 하노이를 수도로 정한 '리 타이 또(李太祖)'의 동상이 있다.
동상을 지나면 길 건너 '베트남 국가은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돌면 베트남 정부의 '영빈관'과 '노동부'가 자리하고 있다. 노동부 맞은편에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유력한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이 프랑스 식민지풍 건축미를 뽐내고 있다.
호안끼엠 호수 서쪽에는 지난 일요일 스티브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미사를 올린 '성요셉 성당'이 있다. 비건은 하느님께 무엇을 기도했을까? 제재와 봉쇄, 화해와 평화 중 신이 비건에게 가르쳐 준 길은 무엇일까?
성요셉 성당에서 북쪽으로 100미터 가면 소고기 쌀국수집 '리꾹수 퍼 10'이 있다. 소고기를 푹 삶았느냐 반쯤 삶았느냐에 따라 국수 종류가 나뉘는데, 국물에 '꽈이'라 부르는 꽈배기를 1~2분 담갔다가 먹으면 그 또한 진미다. '비아 하노이(Bia Hanoi)' 맥주를 곁들여도 10만 동(5000원)을 넘지 않는다.
'리꾹수 퍼 10'에서 서쪽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프랑스와 미국에서 온 침략자를 몰아낸 전승 기록과 유물을 볼 수 있는 '베트남군 역사박물관'이 있고, 맞은편에는 '레닌공원'이 있다. 우뚝 솟은 레닌 동상을 보면, 이 나라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느끼게 된다.
이는 베트남과 북한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베트남 공산당은 여전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중시하는 데 반해, 조선 노동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 이념에서 폐기한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 북한에서 레닌 동상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
레닌 동상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북미 정상회담의 실무를 돕고 있는 베트남 외교부가 있고, 그 너머에 베트남 국회의사당과 호치민의 영묘가 있는 '바딘광장'이 나온다. 바딘광장 너머에 주석궁이 있고, 여기서 응우옌 푸 쫑과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와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주석궁의 경비는 그리 삼엄하지 않다. 주석궁 뒤 숲속에 호치민의 소박한 집무실이 있다. 주석궁 맞은편에는 베트남 권력의 심장부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이 있다.
베트남에서는 노동조합 등 각종 조직의 위원장도 '주석(主席)'으로 부른다. 그래서 베트남의 일상생활에서는 많은 주석들을 만날 수 있다. 베트남어로 주석은 '쭈띡(chủ tịch)'으로 발음한다. 김정은 위원장도 당연히 김정은 '쭈띡'으로 불린다.
베트남 공공기관의 회의장에는 필수 장식물이 있다. 공산당의 상징인 망치와 낫, 국가의 상징인 별, 그리고 호치민의 흉상이 그것이다. 베트남에서 당은 국가에 앞선다. 이는 북한과 중국도 마찬가지다
"왜 '월남 패망'이라고 그래? 이렇게 보니, 망한 나라가 아닌데…."
북미 정상회담 뉴스를 보던 어머니가 묻는다.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의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궁 정문을 짓부수고 경내로 진입하던 순간은 미국에 빌붙은 세력에게는 패망(敗亡)을 뜻했지만, 민족 통일과 사회 정의를 꿈꾸던 세력에게는 해방(解放)을 뜻했다.
해방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을까. 민족 통일은 확고하다. 하나가 된 베트남은 견고히 나아갈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뜻하는 사회 정의는 어떨까. 패망한 사이공 체제와 비교할 때 더 자유롭고 평등한 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일까. 나는 단연코 '그렇다'고 평가한다.
고민은 남는다. 민족 해방을 이룬 베트남의 또 다른 과제인 사회 정의 실현은 빈부 격차와 부패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일당 지배가 제약하는 자유와 자본주의가 훼손하는 평등의 조합이라는 도전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서 베트남 공산당의 지혜는 얼마나 축적되어 있을까. 조선노동당 '쭈띡' 김정은은 이번 베트남 방문에서 무엇을 느끼고 또 무엇을 배울까.
묵중하면서도 짜릿한 역사적 순간이 펼쳐지고 있는 하노이로부터 우리 대한민국은 또 무엇을 느끼고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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