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치권의 이런 상상력이 얼마나 황당한 허구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최근 다른 사안을 취재하는 과정에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해 8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탈세혐의로 구속됐다.
조선일보는 태평양법무법인의 이명재 변호사를 방사장의 변론인으로 선임했다.
이명재 변호사는 최근 김대중대통령에 의해 검찰총장에 발탁됐을 정도로 법조계의 내로라하는 거물이다. 태평양법무법인 역시 로펌 랭킹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근래 급신장하고 있는 법무법인이다.
이명재 변호사는 방사장이 구속돼 있는 경기도 의왕의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워낙 상대방이 거물인 만큼 태평양법무법인의 이모 대표가 동행했다.
방사장을 만나니 그가 “조금 전에 김영삼 전대통령이 왔다 갔다”고 말했다.
“뭐라고 합디까?”
자연스레 화제가 YS쪽으로 향했다.
방사장은 “YS가 방사장, 얼마나 고생이 많느냐”고 위로하더라고 대화 내용을 전했다. YS는 DJ의 언론탄압을 맹렬하게 성토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YS가 “갇혀 있으니 대단히 답답할 텐데 요즘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방사장도 특별히 대답할 말이 마땅찮아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고 있다”고 무심결에 답했다 한다.
그러자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말을 들은 YS가 펄쩍 뛰더라는 것이다.
“아니, 방사장. 감옥에서 책을 읽어요?
절대로 안돼요!
방사장, 감옥에서 책을 읽으면 DJ처럼 돼요. DJ가 저렇게 된 것은 감옥에서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에요.
심심하더라도 절대로 책을 읽지 말아요.”
방사장은 예기치 못한 YS의 격렬한 반응에 한 순간 멍해졌다 한다.
어떤 화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YS가 DJ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로 지독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DJ에 대한 증오심이 뼈 속까지 박혀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이고, 말이었다.
이날 방사장과의 면회는 거의 YS 얘기만 하다가 끝이 났다 한다.
이명재 변호사는 이날 저녁 한 모임에서 자신이 들은 이 ‘기막힌 이야기’를 말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정치권이나 재야 일각에서는 “DJ, YS 두 김씨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온 두 사람이 화해를 해야 역사의 반동(反動)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 대통령선거 막판에 두 김씨가 손을 잡아 선거의 변수가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종종 정치권에서 흘러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공상가들의 허황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번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YS에게 DJ는 결코 손을 잡을 수 없는 ‘증오’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명체라 한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도 있다 한다. 그러나 YS와 DJ의 관계는 이미 ‘정치’의 틀을 벗어난 지 오래인 듯싶다.
YS는 현 정부 출범이래 DJ의 초청을 단 한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
YS의 지독한 증오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마도 YS는 죽는 날까지도 DJ와 만나지 않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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