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총' 애용한 노무현 정부, 11만 명 쫓아낸 MB 정부

[스탑 크랙다운] <6> 고용 허가제, 고쳐 쓸 수 없다

'스탑 크랙다운'이라는 밴드가 있었다. 서울역 앞 가설 무대에서 '스탑, 스탑, 스탑, 크랙다운'(단속 추방 중단)을 경쾌한 펑크 사운드에 실어 외치던 이 밴드의 멤버들은 모두 이주노동자들이었다. 밴드의 보컬로 '단속 추방 중단'을 외치며 인기를 끌었던 미누(미노드목탄) 씨는 자신의 노랫말과 정반대로 지난 2009년, 네팔로 단속 추방 당했다.

88올림픽 이후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각국의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이주노동자 역사는 얼추 25년이 됐다고들 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한국인들의 형, 누나, 부모는 과거에 이주노동자였다. 중국으로, 독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한국인들의 역사까지 합하면 한국의 이주노동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긴다.

그러나 2013년, 한국 내 이주노동자 현실은 처참하다. 2007년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참사로 이주노동자 10명이 사망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끌었지만, 그뿐이었다. 노동 환경은 통제돼 있고, 이를 악용한 '인종·인권 차별'은 전국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언론에 잘 등장하지 않을 뿐이다.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오히려 '강제 추방'을 실적화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미누'들이 말 못할 통제 속에서 인권 침해에 시달리다 해외로 추방되고 있다.

1993년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한 이후 편법 활용과 인권 침해 문제 등이 야기되면서 고용 허가제가 이를 대체했다. 고용 허가제가 시행된 지, 오는 8월 17일이면 9년이 된다. 연수생 신분으로 각종 불이익을 감내하던 이주노동자들의 신분은 다소 개선됐다는 평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파리 목숨이다. 회사를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고, 회사에서 잘리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한다. 심지어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더라도 회사 상황에 따라 불법 체류자로 전락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현행 고용 허가제의 문제는 무엇이고, 대안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와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공동행동)'과 <프레시안>은 고용 허가제 시행 9년을 되짚는 기획을 마련했다.

공동행동은 민주노총, 서울경인이주노조, 한국이주인권센터, 사회진보연대, 다함께, 전국학생행진,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민변 노동위원회, 인권단체연석회의, 아시아의창, 아시아의친구들, 지구인의정류장 등 30여 개 이주, 노동, 사회 단체들이 함께하는 연대체다. <편집자>

고용 허가제 9년
'일회용 인간'에게 강제 노동시키는 한국…언제까지?
이주노동자의 한탄 "노예시장에서 노예 고르듯…"
사장은 "야!개X끼"라 부르고, 맞아도 직장 못 바꾸고
두 캄보디아 여성은 왜 농장에서 도망쳤나
"미국·유럽인은 좋은 사람, 아시아인은 무서운 사람?"

2003년 7월 31일, 국회는 '외국인 고용 등에 관한 법률'를 통과시켰다. 일명 '고용 허가제'라 불리는 이 제도는 현대판 노예제로 악명을 떨쳐 온 산업연수제를 대체하기 위해 마련됐다. 산업연수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끔찍한 자신들의 처지를 이렇게 증언했다.

"입국 후 6개월이 지나도록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고, 송출업체를 통하여 본국으로 송금해 준다고 했지만 송금되지 않았으며, 한국인 관리자들의 폭행·폭언 등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 12~13시간 노동과 열악한 근무 환경에 시달렸고, 배가 고파 간식을 사러 공장 문을 나서다 경비원으로부터 가스총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애초 약속했던 임금은 실제는 절반에 불과했고 그조차도 인력 송출 회사가 "연수 기간 중 사업체 이탈을 막는다"며 20퍼센트를 강제로 떼어 갔다. 묵타 지엠(당시 26세)이라는 노동자는 임금 체불과 부당한 처우에 항의했다가 인력 송출 업체 직원들에게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가 두들겨 맞았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짐승과 같은 삶이었다"고 이들이 절규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산업연수제 폐지 요구 끝에 10년 만에 고용 허가제라는 새로운 제도가 도입됐다. 그러나 정작 이주노동자들은 이 법률 제정을 환영하지 않았다. 고용 허가제는 그 자체로 이주노동자 운동 진영이 요구해 온 대안보다 훨씬 미흡한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 논의 과정에서 더 '누더기'가 돼 버렸다.

이 제도는 산업연수제와 달리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동자'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지만, 정작 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인 노동자에게 직장을 옮길 자유조차 없다는 것을 보통의 노동자들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이주노동자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런 터무니없는 차별을 정당화했다. 이 제도는 처음부터 사업주에 대한 인신 종속을 법제화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인신의 종속'이 그동안 이주노동자들이 겪어 온 고통의 근원이었다. 사업주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짐승이나 기계처럼 부리고 학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업주의 권력과 차별을 산업연수제라는 제도가 '합법'적으로 보장해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처럼 '사업장 변경 원칙적 금지'라는 치명적 결함을 가진 고용 허가제는 조금 더 '세련되게' 이주노동자를 관리·통제하는 제도로 도입됐다. 그조차 산업연수제와 병행 실시됐다. 산업연수제는 2007년까지 유지됐다.

게다가 고용 허가제는 살인적인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추방 정책과 따로 떼어 놓고 볼 수 없다. 그동안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추방은 바로 이때 시작된 것이다.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2004년부터 그다음 해까지 무려 5만7000명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단속·추방됐다.

ⓒ프레시안(손문상)

이주노동자들의 저항과 함께 시작된 고용 허가제

2003년 7월 국회에서 고용 허가제 법안이 통과된 후, 정부는 또 한 번 부분적인 합법화 시한을 부여한 뒤 11월 17일 이후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2005년 9월까지 단속된 수가 1987년부터 2003년 11월까지 이뤄진 단속보다 훨씬 많을 정도였으니, 단속의 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2003년 11월 17일부터 전국적인 단속과 강제 추방이 시행됐다. 이주노동자 단속에 '그물총'과 가스총이 동원됐고, 이주노동자들은 인적이 뜸한 곳으로, 출입국 단속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몇 달만 지나면 정부의 단속이 끝날 것이라는 불안한 기대를 품고 라면 몇 박스와 쌀 등을 사들이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단속의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심지어 목숨을 끊는 이주노동자들이 속출했다. 11월부터 한 달 동안 8명의 이주노동자가 자살했다.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절망과 분노가 함께 퍼져나갔다. 사실 적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이 노무현의 당선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3년 11월 15일, 전국 각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정부의 단속에 항의하는 농성에 돌입했다. 서울, 안산, 마석, 창원, 대구 각지에서 농성장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이 농성장은 해고를 당해 오갈 데 없고, 단속을 피할 방도가 없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피난처 구실을 하기도 했다. 전국에서 1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농성장에 합류했다. 대표적인 이주노동자 저항의 기록으로 남은 '명동성당 농성 투쟁'도 이렇게 시작됐다.

명동성당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중단을 요구하며 벌인 이 투쟁은 무려 380일 동안 지속됐다. 이 운동은 단속 중단, 노동 비자 쟁취라는 요구는 성취하지 못했지만, 값진 성과를 남겼다. 한국 사회에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가장 널리 알린 투쟁이었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가장 광범하게 만들어진 계기이기도 했다. 민주노총의 이주노동자 연대도 이때부터 본격화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낯설기만 했던 이주노동자들을 자신들의 동료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일부 노동조합들은 이주노동자를 같은 노조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투쟁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민주노총 산하 노동조합을 조직했다. 현재의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은 이 투쟁의 산물이다.

이주노조는 수많은 이주노동자 투사들의 희생 속에서 건설됐다. 그 이후에도 명동성당 농성을 이끌고 이주노조를 건설한 수많은 리더들 거의 대부분이 정부의 표적 단속으로 강제 추방됐다.

정부는 이주노조 인정을 한사코 거부했다. 정부는 고용 허가제 시행으로 이주노동자들도 노동3권을 보장받게 됐다고 말했지만, 이주노조 불인정은 정부의 말이 거짓임을 보여줬다. 2007년 고등법원이 노동부의 이주노조 설립 신고 반려는 부당하다고 판결했지만, 정부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주노조는 노조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고, 이주노조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편, 정부는 기존 노조들이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조직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2002년 대구 성서공단 노조는 이주노동자까지 포괄하는 노조로 출범했다.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나 건설노조 일각에서도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런 시도들은 이주노동자들과 기존 조합원들에게 모두 득이 되는 일이었다. 이주노동자가 함께 노조에서 단결하면서, 사측은 이주노동자를 파업 파괴를 위한 대체 인력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이주노동자들 역시 노조의 단체교섭으로 임금 인상과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조들은 고용 허가제의 체류 기간 제한 때문에 법률의 제한 범위에서만 이들의 조건 개선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인식하게 됐다.

고쳐서 쓸 수 없는 고용 허가제

고용 허가제 시행 이후, 이 제도 시행을 반대했던 목소리가 옳았음이 현실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 금지가 이주노동자들의 손발을 묶고 속절없이 부당한 대우를 감내하도록 강제했고, 고용허가제의 성공적 정착을 이유로 지속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추방은 이주노동자들을 계속 죽음과 끔찍한 고통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기존 노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정말 극히 소수였고, 이주노조의 손길이 닿는 이주노동자 역시 극히 소수였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더 악화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고용 허가제 시행은 이주 운동에도 커다란 시련을 가져왔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끔찍하기 짝이 없던 고통을 목격해 온 여러 지원 단체들은 그나마 고용 허가제가 '차악'이라는 생각에 이 제도에 맞서기를 주저했다. 사실, 이 문제는 애초 고용허가제 법안 통과를 앞두고 벌어진 논란이기도 했다. 이 논란 속에 이주노동자 운동은 분열했고, 이 때문에 고용 허가제 시행 후 수년 동안, 고용 허가제 폐지 운동은 이주노동자 운동의 가장 급진적 목소리를 대변한 이주노조와 성서공단 노조가 중심이 된 소수의 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이 때문에 안타깝게도 고용 허가제 폐지 운동은 강력하게 건설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제도는 고쳐서 쓸 수 없는 제도임이 분명해졌다. 현실에서 이 제도가 만들어내는 온갖 문제들이 시간이 갈수록 드러났고, 정부는 더욱 이주노동자들을 억눌렀다.

작업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저항도 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국말도 서툴고 한국의 법과 제도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극히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이해했다.

2010년 인천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베트남 이주노동자 200여 명이 형편없는 식사와 부당한 처우에 항의해 작업을 거부하는 집단 항의를 벌였다. 즉 파업을 벌인 것이다.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에 놀라 사측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고, 노동자들은 승리를 거둔 후 파업을 풀었다. 그러나 경찰은 1년이 지난 후 이주노동자 20명을 이 파업의 주도자로 몰아 줄줄이 체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의 무죄 석방을 촉구하는 운동이 건설됐고, 통쾌하게도 이 운동은 승리했다. 특히 건설노조의 연대가 이 운동의 승리에 큰 몫을 했다.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모두 이들이 무죄 판결을 끌어냈다.

베트남 노동자들의 파업 항의는 고용 허가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열악한 노동 조건과 처우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단적인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울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특히 2012년 정부가 극히 제약된 사업장 변경 허가조차 사실상 가로막는 고용 허가제 지침을 시행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이 조치에 항의하는 집회 소식이 이주노동자들의 커뮤니티들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생전 처음 집회에 나오는 수백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우리가 짐승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적어 든 팻말을 들고 집회에 나왔다. 1995년 명동성당에서 산업연수제 폐지를 요구하던 이주노동자들이 외치던 바로 그 구호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이주노동자들의 처지가 최근 몇 년 사이 얼마나 더 악화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가 몰아닥친 후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이주노동자들 입국을 규제하며, 이주노동자들을 노동 시장을 교란시키는 '일자리 도둑'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위선적이게도 이주노동자 고용을 금지할 생각은 없었다. 기업들에게 값싼 노동력인 이주노동자 공급을 중단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을 경제 위기의 속죄양으로 삼으려 했다.

▲ 2008년 8월,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서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와 인권 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 행동'이 이주노동자 단속 및 추방 중단,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뉴시스

MB 임기 동안 무려 11만 명 추방…고용허가제를 추방해야

2008년 11월 마석에서 280여 명의 출입국관리소·경찰 합동단속반이 군사작전 같은 토끼몰이식 단속으로 13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을 싹쓸이 연행해 가는 최대 규모의 이주노동자 단속 사건이 일어났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동안 11만여 명이 추방됐다. 정부는 외국인 범죄 증가 운운하며 상시적인 범죄 단속반을 가동하고 통계를 과장해 이주노동자를 범죄 집단인 양 호도했다. 전체 범죄에서 이주민이 차지하는 범죄 비중은 전체 이주민 인구 비중에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인데도 말이다.

고용 허가제 시행 7~8년이 되어서야 이주 운동 내에서 고용 허가제 폐지라는 합치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주 운동은 고용 허가제를 폐지하고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영주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현재 이 운동은 아직 매우 작은 운동이다. 30만 명이 넘는 고용 허가제 노동자들 중 극히 소수가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20년 전 산업연수제 폐지 운동도 명동성당에서 십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시작됐다.

그에 앞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역시 아무런 법적·제도적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크고 작은 저항과 투쟁으로 산업재해 적용 같은 권리들을 쟁취해 왔다. 고용 허가제 폐지 운동도 조금씩 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8월 18일, 고용 허가제 시행 9년을 맞아 "고용 허가제 폐지! 이주노동자 노동3권 보장을 위한 2013 이주노동자 투쟁의 날" 집회가 열린다. 많은 사람이 이 집회에 참가해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자리가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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