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국가인권위원회는 '손톱 밑 가시'였다. 이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다양한 수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다 뽑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급기야 살생부를 썼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정리된 지 1년 후인 2009년 10월 어느 날,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이 인권위 사무총장을 불렀다. 비서관이 내민 것은 10여 명의 인권위 직원 이름이 적힌 인사기록카드였다. 살생부, 이른바 '블랙리스트'였다. 블랙리스트를 전달하며 비서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정부와 도저히 같이 갈 수 없는 사람"
블랙리스트 전달은 사실상의 '지시'다. '독립 기관' 인권위의 위상을 해치는 행위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독립 기관' 인권위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인권위는 '침묵'했다. 2009년 청와대로부터 블랙리스트를 받은 사무총장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라는 의미'로 생각해 내부에서 공론화해 조직적으로 항거하지 않았다. 이후 2012년 이러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지만 인권위는 진상조사를 하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인권위는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MB정부 청와대+경찰 블랙리스트 작성..."이명박 등 관련자 수사의뢰"
최영애 인권위원장과 조영선 사무총장을 비롯한 인권위 인사들은 11일 오후 서울시 중구 인권위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최 위원장은 "인권위는 청와대의 블랙리스트와 같이 인권위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스스로 독립성을 약화시켰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 결과 한때 세계적 모범이었던 인권위가 지난 정부에서는 그 위상이 급속도로 추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최 위원장은 "이제라도 진상을 밝히고 필요한 조치를 함으로써 국가인권기구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지난 10년간의 퇴보를 만회하고 인권파수꾼의 역할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대국민 사과는 지난 7월부터 11월 초까지 약 4개월 동안 벌인 자체 조사 결과에 따른 결정이다.
조사단에 따르면, 인권위는 지난 2008년 촛불집회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을 공론화했다. 안경환 당시 위원장은 대학 특강에서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 등을 정면 비판했고, 경찰청에 책임자 징계 등을 요청했다.
이후 감사원이 움직였다. 행정안전부를 통해 인권위 축소 등 조직개편을 요구했다. 행안부는 처음에 102명 감축안을 제시했다가 44명으로 줄여 직제개정령을 공포, 시행했다. 진보성향 시민단체 출신 별정, 계약직 직원을 대거 내보내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인권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도 미처 축출하지 못한 직원들이 있었고, 이에 청와대가 사후 관리 차원에서 블랙리스트가 작성, 전달한 것으로 파악했다.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실은 두 차례에 걸쳐 인권위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2009년 10월 현진권 당시 시민사회비서관이 김옥신 당시 사무총장을 불러 "이명박 정부와 같이 갈 수 없는 사람"이라며 인권위 직원 10여명이 포함된 블랙리스트를 건넸다.
인권위 관계자에 따르면, 인권위가 사실 확인을 위해 현 전 비서관에게 연락을 했으나, 현 전 비서관은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두 번째 블랙리스트는 이듬해인 2010년 작성됐다. 시민사회비서관실은 '2010년도 업무계획 보고' 자료를 통해 인권위를 과거 문제위원회로 규정하고, 인권위 운영 건전화를 시민사회비서관실 2010년 주요업무로 설정해 추진 계획을 세웠다.
당시 청와대뿐 아니라 경찰청에서도 인권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으로 파악됐다. 인권위에 따르면, 경찰청 정보국이 2008년 11월 27일 인권위 직원들의 성향을 분류한 '현안 관련 보고' 자료를 작성했다. 이 문서에는 인권위원들의 성향 분류, 좌편향성 원인, 인권위 내부 분위기 등이 기록돼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인권위는 밝혔다.
인권위는 MB 정부 시절 청와대와 경찰청의 블랙리스트 작성은 인권위의 독립성 훼손은 물론, 형법상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이 전 대통령을 포함한 관련자들에 대해 검찰총장에게 수사를 의뢰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법적, 제도적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인권위 내부적으로는 전 직원의 인권교육을 강화하고, 외부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관련 내부 규정을 정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우동민 사망, 인권위에 책임 있다" 반성
인권위는 또 2010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인권위를 불법 점거농성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고(故) 우동민 활동가에 대해 인권침해를 했다고 인정했다.
당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은 장애인활동지원법의 올바른 제정과 국가인권위원회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인권위 사무실 등을 불법점거한 뒤 농성을 벌였다. 이에 인권위가 점거장의 난방과 전기 공급을 차단하고, 경찰 신고를 통해 중증장애인을 위한 활동보조인 출입을 제한적으로 통제했다. 우 활동가는 농성 도중 12월 6일 폐렴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이듬해 1월 2일 사망했다.
인권위는 당시 인권위가 경찰에 의한 출입 통제, 엘리베이터 통제 등을 통해 활동 보조인 출입을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난방 등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우동민 활동가를 비롯한 중증장애 인권활동가들이 활동보조인의 조력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장시간 추위에 노출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우 활동가가 농성 참여로 인해 사망한 것인지 명확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인권위의 조치가 우 활동가의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최 위원장은 "유족과 국민들께 사과드리며, 향후 우 활동가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 및 인권위 차원의 인권옹호자 선언 채택 등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고 인권친화적인 점거농성 대응매뉴얼 등을 마련하도록 의결했다"고 밝혔다.
최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오늘의 소중한 교훈을 승화시켜 저와 인권위원, 직원 일동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더욱 배가하여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확산시키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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