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부모도 모르게 30년 전 입양 보내졌다"

[해외입양인, 말걸기]<30>입양인 정의는 곧 사회정의

30년 전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유래 없는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태어났다. 그 개발 프로젝트는 전쟁으로 참사가 된 농경사회 한국이 세계 경제 강국으로 변화되는 것이었다. 당시 내 친부모님은 아주 가난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나는 임시로 고아원에 보내졌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가 고아원에 나를 찾으러 오셨을 때, 나는 부모님 동의도 없이 이미 해외입양 보내진 상태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디로 보내졌는지 전혀 알 수 있는 길이 없었고 나는 내가 고아가 아니고 입양 보내질 필요가 없다는 말을 주위 어른들에게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물론 이런 모국으로부터의 추방을 경험한 아이는 나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약 20만 명의 한국아이들이 해외입양 보내졌고, 그 대부분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과 1980년대 전두환 정권시기에 일어났다.

해외입양과 관련한 진부한 이야기는 한국의 과거의 빈곤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한국경제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한국이 단지 빈곤 때문에 그 많이 아이들을 해외입양 보냈는가 하는 전제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 해외입양의 역사를 보면서 나는 한국의 해외입양이 급진적 경제발전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해외입양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시기는 한국이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던 시기였던 것이다.

1980년에 이르러, 내가 해외입양 보내졌을 때, 한국은 세계에서 더 이상 가난한 나라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해외입양은 인구증가를 줄이는 방법이자 정부가 사회복지비용을 줄이는 방법으로 아주 효율적인 도구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 입양아 1명 당 한국은 수 만 달러를 외국으로부터 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외화는 한국정부에서 엄격하게 통제했다. 한국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외국에서 융자를 받았고 그 융자금을 달러로 갚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속적인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한국은 달러 벌어들이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이 해외입양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은 매년 2천만 에서 4천 만 달러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국 기업이 백만 달러 수출만 해도 정부는 훈장을 수여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국민의 아이를 해외에 판매에서 벌어들인 매년 2천에서 4천만 달러의 수입은 한국정부 입장에서는 엄청난 수익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 소외계층 자녀를 해외입양 보냄으로써, 정부는 사회복지비용을 줄이고 그 돈으로 대신 경제발전에 재투자했다.

이런 한국경제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해외입양인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저임금에 시달리던 한국의 농민 그리고 공장노동자와 함께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한국의 급격한 경제발전에 공헌했다. 물론 독일에 보내진 한국의 광부, 간호사, 중동에 보내진 건설노동자, 베트남에 보내진 군인들과 함께 말이다.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해외입양 보내진 후에도 성인이 되어서 한국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방문함으로써 지금도 경제적으로 한국사회에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한국의 호텔과 식당 등지에서 돈을 소비한다. 어떤 해외입양인들은 한국에서 살기로 결정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한국사회를 위해 공헌 한다.

많은 해외입양인들은 한국정부의 문화여행 지원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다. 그때 한국 관리들은 우리 해외입양인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 문화, 경제적 성공 그리고 이상적인 모습을 소개한다. 우리는 유명한 절, 궁궐, 거대한 쇼핑몰 등으로 안내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의 과거는 어려웠지만 지금 현재는 한국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한강의 기적'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서울의 격조 높은 호텔에서 최고의 요리를 대접받는다. 한국정부와 입양기관의 대표들은 우리를 맞이하며 우리가 자랑스럽다고 인사하고 한국과 입양 보내진 나라사이에 우리가 "좋은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하며 또 한국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우리는 "글로벌 한국인"이자 "두 나라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기에 자부심을 가져야 되고 그것은 한국에 도움에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종류의 "찬사"는 듣기 좋은것 같다. 그러난 격조 높은 고궁, 화려한 호텔과 찬란한 쇼핑몰을 볼 때 우리는 왜, 어떻게, 이렇게 살기 좋고 훌륭한 나라에서 우리가 해외입양을 보내지게 되었는지, 또 지금도 여전히 해외입양 세계 4위국으로 한국 아이들이 계속해서 해외입양 보내지고 있는지 이해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 해외입양인들의 가난한 한국 친가족의 이야기, 그 부모님들이 겪었을 수치심. 죄의식 등은 화려한 불빛에 다 묻혀버린다. 우리는 오직 화려한 한국만을 보도록 초대된 사람들인 것이다. 한국정부가 우리 해외입양인들의 가정사, 입양역사를 보여 준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고아원, 공장바닥, 미혼모, 피폐한 삶의 터전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한국정부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해외입양인들의 입양의 역사는 여전히 한국정부에 의해서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은, 부분적으로는 우리 해외입양인들의 공헌으로, 과거보다 부유해 졌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은 경제적 불평등이 가득하고 사회적 양극화 또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가 남아있다. 이러한 구조적 불의와 불평등 때문에 지금도 한국은, 그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해외입양 세계 4위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지 않고 입양을 보내도록 권장 받고 있고, 그 후 미혼모는 부끄러움과 침묵으로 나머지 생애를 살도록 사회적 압력을 받고 있다.

자기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은 사회적 멸시와 인종차별로 고통 받고 있다. 한국에서 또 혼혈아들은 지금도 2등 국민으로 대우 받고 있다. 한국에서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있지만 다수 서민은 더욱 가난해 지고 있다. 지금 한국은 모든 OECD 국가 중 소득 불평등 수준이 가장 높고 사회복지는 가장 열악하다. 나는 한국에서 해외입양과 관련한 정의문제가 입양인들의 정의문제에만 한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입양문제는 한국인들이 약자를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한국사회 전체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해외입양인으로서 나는, 내 해외입양의 역사가 어떻게 한국의 경제발전과 연결되었는지 이해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모국인 한국이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가 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내가 만난 많은 해외입양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많은 해외입양인들은 지금 미혼모, 이주노동자, 다른 입양인들을 도우면서 한국사회를 좀 더 인간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공헌하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해외입양인들이 다른 단체들과 연대하여 한국을 더욱 정의와 평등이 넘치는 나라로 만드는데 지속적으로 공헌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모든 일은 주고받는 것이다. 진보적인 한국인들도 우리 해외입양인들의 한국사회와 역사에서의 역할과 공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한국문화와 언어에 대해서는 이방인일 것이다.
앤더스 리엘 뭘러ⓒ프레시안
그러나 우리 해외입양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것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인정을 바탕으로 우리 해외입양인들과 한국인들이 새로운 연대의 네트워크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위해 한국을 더 정의로운 사회로 이끌 수 있기를 희망한다. (번역: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앤더스 리엘 뭘러는 한국에서 태어 난 후 덴마크로 해외입양 되었다. 그는 현재 덴마크 국제학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 앤더스 이메일 주소는 anders.mull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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