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동시에 입양…인신매매? 친모의 거짓말?

[해외입양인, 말걸기]<28>친생가족 권리 보호가 최우선이다

요 며칠 사이 24년 전 호주로 입양되었던 한 입양인의 출생 당시 인신매매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입양인이 모국으로 돌아와 친생가족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자신은 사산아였다는 것이었다. 가족은 사산으로 알았는데, 자신은 살아남아 호주로 입양 보내어졌으니 명백한 영아인신매매 사건으로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아기를 입양 보낸 기관에서는 친모의 자필 서명과 지장이 찍힌 입양동의서가 있다고 밝히고 있으니, 이것이 입증되면 사안은 친모가 가족에게 거짓말을 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 사건은 입양의 본질이 모성의 실패와 가족의 실패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은폐하고자 한다. 실패는 사람을 다른 사람의 면전에서 오욕에 내몰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오욕을 모면하기 위해 사람은 변명하거나 거짓말을 한다. 24년 전에 사산으로 둘러댄 이 입양 사건은 친모에게는 24년 동안 혼자만 간직해온 비밀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친모는 자신의 몸 안에서 열 달 동안 생명을 나누었던 입양 보내어진 아이의 안위에 대한 염려와 탄원의 눈물을 남몰래 흘리며 살아왔으리라. 친모와 친언니들이 인생사의 크고 작은 일들을 시시콜콜 나누면서 사는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모녀지간이었다면, 친언니들은 그토록 중요한 일에 대한 친모의 은폐에 당혹과 배신의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살아서 태어난 동생과 함께 나누었어야 할 그 회복 불가한 자매애의 상실을 뒤늦게 애도하는 마음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또 친생모와의 결별에 뿌리를 둔 원초적 상처(primal wound)에 일생을 시달리는 것이 입양인의 삶이거늘, 24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영아인신매매의 잔혹함에 노출된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그녀가 겪어야 했을 아픔과 혼란과 분노를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사건의 진위를 떠나 거짓으로 모성의 실패와 가족의 실패를 모면하려 했던 한 가난했던 여성에게 모든 귀책사유를 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지난 60년 동안 위기가정의 아동양육문제를 고아원과 입양기관을 통해서 해결해온 우리 사회의 무책임에 대해서 통렬한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는 10월 18일부터 극장상영에 들어갈 양육미혼모의 삶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 <미쓰마마> ⓒ프레시안


전국적으로 고아원 아동이 2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거기다가 해마다 공식적으로만 입양 보내어지는 아동이 2500여 명이다. 사실상 유럽에는 우리나라처럼 거대한 아동보육시설이 없다. 가정일탈아동 혹은 학대아동을 위한 소셜하우스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뜨이지 않고 그 규모와 숫자는 미미하다. 전쟁 직후의 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그러기에 당연히 양부모가 다 돌아가신 경우가 흔치 않은 현실에서, 시설아동이 2만에 이른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경악할만한 일인 것이다. 인구 500만 명인 덴마크에서 2011년 한 해 동안 자국 내에서 입양 보내진 아동은 15명이다. 우리나라가 덴마크 인구의 10배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미 거의 선진국 수준에 들어선 우리나라에서 1년에 2500여 명의 아동이 입양 보내어진다는 사실 역시 경악할만한 수준이다. 시민사회는 이런 일을 앞에 두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고아원 아이들에게 더 사랑을 베풀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한 아이라도 더 입양을 할까 하고 사실상 인간애로 가득한 고민과 염려를 한다. 정부는 고아원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일을 잘하는 일로 알고 입양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국가의 아젠다로 설정하는 데에 부끄러움을 모른다. 미시적 차원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지지할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당혹스러워하고 아동양육체계의 몸통인 친생가족권리보호의 전방위적인 강화를 통해서 사안의 몸통부터 바로 잡을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친생가족권리보호의 결과로 시설과 입양에 내몰리는 아동의 숫자를 줄여나가는 것을 우리 사회의 아젠다로 설정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정책의 로드맵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정 반대이다. 정부가 고아원 아동 1인당 월 105만 원을 지원해주고 있으니 시설보강비 등에 대한 지원을 감안하면 년 3조원 내외의 정부예산이 고아원보육체계로 투입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해외입양을 통해서 몸집을 불려온 입양기관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망라한 전국적인 아동흡수체계를 갖추고 치열하게 입양사업을 펼치고 있다. 정부는 입양기관이 1건의 국내입양을 수행할 때마다 270만 원을 지급해주고 있다. 1516건의 국내입양을 성사시킨 2011년에는 입양기관들에게 약 40억 원 내외의 정부예산이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거기다가 입양가정들에 대한 양육비와 의료비 지급 등을 가산하면 국내입양활성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정부의 예산 규모는 수백억대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국가예산의 흐름은 우리나라가 한 마디로 친생가족보호정책을 뒤로 하고 고아원에서의 시설보육과 입양을 아동양육체계의 중심적 해법으로 삼아왔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이런 지원을 강화할수록 가족결별이 증가하고 사회의 정서적 안정성과 건강성은 손상될 가능성이 높다. 친족성폭력이나 방치와 같은 친생가족의 아동학대에 있어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 원칙으로서 아동이 친생가족의 품 안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안은 없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으리라. 문제는 이런 대원칙으로부터 벗어나 정부나 시민사회가 시설보호의 호화로움과 입양의 선의에 열광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 길을 잘 못 든 것이고 아동양육시스템의 심각한 부작용이 예견되는 일이다.

아프리카에는 세계 각국의 기독교선교사들을 비롯한 각양의 후원기관들이 들어가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선교사들이나 활동가들이 마을로 들어가서 고아원을 세우는 일인데, 고아원의 음식과 옷과 시설을 비롯한 복리와 심지어 학업지원체계의 혜택이 아동이 친생가족의 품에서 자라는 것보다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해서 온 마을 사람과 아동들에게는 고아원에 입소하는 것이 소원 중의 소원이 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고아원의 복리가 좋아질수록 친생가족과 아동의 애착관계가 깨어질 위험에 온 마을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선교사들이나 후원기관들의 영웅적 활약은 결과적으로 아프리카의 마을공동체를 오히려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면 혹자는 한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말할 것이다. 일반적인 일은 아니라고 할 지라도 요즈음 극빈가정에서는 자녀들을 고아원에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정서가 형성되고 있다. 국가가 고아원 아동 1인당 월 105만 원을 지원해주니, 시설들은 아동들의 복리를 위해 공부방과 체련장과 수영장을 갖추고 있으며, 아동들의 정서적 복리를 위해서 오케스트라단을 조직해서 곳곳에서 연주활동을 벌이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대학등록금 지원체계까지 개발하고 있으니 극빈가정의 아동들이 차라리 고아원 입소를 선망하고 극빈가정의 부모들은 스스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보다 고아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한결 더 나은 아이를 위한 선택이 아닐까하고 흔들린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프리카에 살고 계신 분들에게는 이런 어법이 조금 송구하지만 우리나라의 기형화된 아동양육체계에 대해서 따끔하게 말하고 싶어서 이를 '아프리카현상'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문명의 상징인 자동차와 손전화를 전세계 방방곡곡으로 수출하며 또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가득찬 최첨단 문명국인 한국에서 적어도 아동양육시스템에 있어서만은 '아프리카현상'이 현재진행형이고 나아가 심화될 조짐이 보인다고 말한다면 너무 미리 걱정을 하는 것일까. 아동복지시설에서 이런 아름다운 아동의 복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잘못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시적 차원에서 한 나라의 아동복지체계의 몸통을 먼저 보자는 것이다. 친생가족복리와 권리 옹호를 충분히 발달시키고 그래서 이 땅의 가족들이 자녀의 양육을 시설복지나 입양복지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도록 아동양육시스템에 관한 국가의 아젠다를 설정하고 우리 사회를 재구성해가자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지금 누가 아동을 양육할 것인가를 두고 양육주체들 간에 치열한 다툼이 펼쳐지고 있는 나라이다. 친생가족, 위탁가족, 아동보육시설, 입양기관들 사이에서 누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최선의 아동의 복리가 될 것인가를 두고 담론투쟁 중인 나라다. 입양기관은 아동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일이 아동을 위한 최선의 복리라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민주당의 김춘진 의원실에서 요보호 아동에게 제공되어야할 최우선적인 복리는 위탁가정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아동복지법의 개정을 시도하다가 아동보육시설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아 법개정을 유보한 바가 있다. 아동이 우선적으로 위탁가정으로 넘어가게 되면 아동보육시설로 배치되는 아동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고 그럴 경우 아마도 아동보육시설들은 한 아동당 월정 정부지원금의 지원규모가 축소될 것이 내다보인 까닭일지도 모른다. 아동보육시설들로서는 아동이 시설에 있어야만 년 간 거의 3조 원에 달하는 정부지원금을 받고 그렇게 해야 아동들에게 최선의 복지를 제공할 수 있다고 당연히 생각할 것이다. 또 최근에는 정부가 예탁결제원의 자금 10억 원을 '세이브드칠드런'에 제공해서 아동위탁사업을 운영하도록 기획하고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일에 대해서 미혼모자립시설의 시설장들이나 미혼모 당사자들은 아동은 임신과 출산과 보육 단계에서 친생모와의 애착관계 형성이 가정 중요한데 위탁을 우리 사회가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은 모성성의 성장과 아동의 애착 성장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하는 정책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친생가족의 편에서 보면 한 마디로 입양도 시설보호도 위탁도 아동양육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민사회와 정부는 정작 정답인 친생가족보호라고 하는 아동양육시스템의 몸통을 제대로 갖추어 가려하는 대신에 지엽인 입양과 위탁과 시설보호에 해답이 있는 양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한국의 미혼모권익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는 미국의 안과의사 리차드 보아스 박사는 "한국에 사는 모든 여성들이 동등한 인권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미혼여성도 기혼여성들과 동등하게 자신들이 낳은 아이를 키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렇다. 이 땅의 모든 아동은 우선적으로 친생가족의 품에서 자랄 권리가 있다. 국가의 우선적인 의무는 이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입양복지와 고아원복지가 기형적으로 성장한 나라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계속 성장시켜갈 수는 없다. 오히려 아동복지시스템의 몸통인 친생가족의 아동양육권리보호에 최우선적인 사회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 못한 우리 자신의 성찰 부족에 대해서 스스로 칼을 댈 수 있어야 한다. 썩은 나무 등걸에서 큰 버섯이 피어오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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