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는 일주일에 이틀이나 사흘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적은 돈을 벌고 나머지 시간은 이웃이나 친구들과 음악이나 목공을 하거나 시민단체나 마을 일을 하며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 마음 맞는 청년들이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생계를 함께 하며 따로 또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다. 녹색 정치에 참여하여 모든 생명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는 청년들도 많다. 수조에 갇힌 돌고래가 너무 불쌍해서 돌고래 보호운동에 뛰어든 청년들도 있다. 이들은 '반백수'로 보이지만 자신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며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이미 성장 중독에서 벗어나 성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들의 삶이 평탄하고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스스로 만드는 삶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소득주도 성장에서 녹색 전환으로
성장 중독은 좌우를 가릴 것 없이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앓고 있다. 경제성장은 현대 국가의 당연한 책무가 되어 버렸다. 지구의 자원과 오염정화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데도 성장주의자들은 기술과 자본으로 성장이 영원히 가능하고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설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와 자연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사이비 종교에 가깝다. 성장주의자들이 '오직 성장!'을 외치는 동안 가난하고 몸이 약한 이들,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미세먼지와 폭염으로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지구 이곳저곳에서 배타적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권위주의가 자라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 혁신 성장, 포용 국가 같은 국가 목표를 내걸고 성장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미덕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자원을 집중한다는 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탈원전, 탈석탄으로의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문재인 정부가 기후변화와 원전의 위험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서서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나라로 전환할 비전과 정책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 개발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과 생태민주주의로의 전환, 즉 녹색 전환이 시급하다.
녹색 전환과 지속가능한 사회
녹색 전환이란 성장중독에서 벗어나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 생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자원과 오염정화 능력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경제,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정치사회적 과정이 녹색 전환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는 물론 미래세대와 자연의 권리를 고려하고 이들의 대리인이나 후견인들이 정치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생태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녹색 전환을 지금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개발과 성장에 매몰되면 기후변화와 같은 피하기 힘든 폭풍이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며 다시 회복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국가는 국정의 목표를 경제성장이 아니라 생태민주주의를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바꾸어야 한다. 먼저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경제성장을 평가하는 주된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은 환경파괴로 국민들의 삶의 질이 떨어지거나, 계층간 불평등이 심화되어도 증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마티아 센이나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경제학자들은 GDP 성장을 정책의 목표로 삼지 말고 삶의 질을 측정할 수 있는 다른 지표들을 사용하라고 권고한다. 성장이 GDP에 초점을 맞춘 양적 성장이라면 지속가능한 발전은 미래세대와 자연을 함께 고려하는 질적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에서 중요한 것은 지구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석탄과 석유, 원자력에 의존한 공업 체계를 재생가능한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만 굴러가는 생산의 쳇바퀴에서 내려와 더 적게 생산하고 더 적게 소비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삶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는 녹색 전환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정부는 경제성장이 영원히 지속가능하다는 잘 못 된 전제 아래 소득도 늘리고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기본 전제로 삼고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함께 만드는 현명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생태민주주의와 생태자치연방
생태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는 지구 환경문제를 풀기에는 너무 작고 동네의 쓰레기 문제를 풀기에는 너무 크다. 지구적 위험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산업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사람들의 이해를 조정하는 틀을 넘어서서 거대한 전환을 시작할 새로운 리더십, 참신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기후변화와 핵의 위험으로 인류와 지구의 생존이 위협 받을 때 우리는 좁은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서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지구와 자연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을 할 필요가 있다. 이제 미래세대와 자연도 중요한 참여자로 초청하는 생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말을 못하는 약한 존재이지만 이들이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총칼을 들고 무장한 군대가 기후변화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는 없다. 지구적 위험의 시대에는 무기를 내려놓고 모두를 위한 세계시민정치를 담대하게 시작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한반도 평화의 큰 걸음을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남쪽의 민주적 개발국가가 북쪽의 권위주의적 개발국가와 손잡고 개발주의의 가속 페달을 밟는다면 한반도 전체가 미세먼지로 가득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을, 지역, 지자체로 연결되는 자율과 자치의 정치 공동체를 키우고 이러한 자치체들의 연합으로서 한반도 생태자치연방을 만드는 비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과 북은 무기를 녹여 풍력발전기를 만들 것이다. 평화를 키워갈수록 억압하는 국가, 통제하는 국가의 강제력은 약화되고 공동체의 공동 자원을 관리하는 능력은 커질 것이다. 순진해 보이는 상상 속에서 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힘이 나온다. 틀을 바꾸는 꿈을 틀 안과 밖을 오가며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발국가에서 생태민주 국가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권위주의적 개발 국가를 민주화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진퇴를 거듭했지만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민주정부'는 개발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또 하나의 민주적 개발 국가로 평가될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생태적으로 전환시켜 생태민주 국가의 기초를 다진 첫 번째 정부로 평가될까? 미래는 열려있다. 탈원전, 탈석탄을 천명한 문재인 정부는 아시아의 모범 국가로, 세계의 생태적 지도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제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의존한 지탱불가능한 공업 모델을 벗어나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면서 모든 사람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기획해야 할 때다. 지속가능성 전환, 녹색 전환을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그 목표에 따라 경제와 사회를 재구성해야 할 때다. 지금 시작하면 기후변화로부터 좀 더 안전한 나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사는 나라, 모든 이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나라를 더 빨리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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