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이하 현지시간)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양원 모두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두며 이번 결과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심판임이 명확해졌다. 미국인들은 이란 전쟁으로 인한 고유가, 트럼프의 사익 추구 및 부패 의혹 등에 반기를 들었고 무리한 이민 단속 또한 역효과를 낳은 것으로 풀이됐다.
미 언론들은 이번 선거 결과가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 비인기"에 대한 평가이며 패배가 오롯이 트럼프 대통령에 귀속된다고 입을 모았다. 미 CNN 방송은 민주당이 이번 중간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 비인기"를 발판 삼아 양원 장악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방송은 이로써 민주당이 "트럼프 임기 마지막 2년 동안 그 전엔 제약 받지 않았던 트럼프 및 그의 행정부를 견제할 상당한 권한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영국 BBC 방송도 미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 "쉽게 잊을 수 없는 통렬한 질책"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내가 투표 용지에 있는 것처럼 생각해 달라'고, 47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그렇게 했다. 단지 그가 바라던 방식이 아니었을 뿐"이라며 "중간선거를 의도적으로 자신에 대한 국민투표로 만든 트럼프는 대가를 치렀다"고 꼬집었다.
신문은 4일 오전 기준 자사 추정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전국적으로 13%포인트(p)를 더 득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1976년 이후 최대 득표 차로 임기가 2년 남았음에도 "미국인들이 트럼프 시대의 종말의 시작을 예고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패색이 짙어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투표지에 내 이름이 없었다. 만일 내 이름이 있었다면 우린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을 것!"이라며 공화당의 선거 패배와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이란 전쟁을 시작해 에너지 가격을 올린 것도 트럼프 대통령이고 공화당 후보자, 쟁점, 전략, 메시지도 트럼프가 직접 골라, 이번 선거가 트럼프에 대한 심판임은 분명하다고 짚었다. 신문은 트럼프가 선거 기간 동안 그와 거리를 두려던 후보들에게도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고 트럼프가 선택한 상원의원 후보인 텍사스주 켄 팩스턴 및 사우스캐롤라이나 달린 그레이엄이 패한 것은 "트럼프 개입이 초래한 결과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패배 요인으론 인플레이션, 트럼프 관세, 이란 전쟁 및 그로 인한 기름값 상승, 트럼프의 사리사욕 추구 및 부패 우려 등이 꼽혔다. 선거 전 조사와 선거 당일 투표소 인터뷰 결과를 종합한 CNN 유권자 조사에 따르면, 4일 오전 12시12분 기준 조사 대상 7만9668명의 유권자 중 62%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중 65% 응답자가 트럼프 경제 정책이 경제 상황을 악화했다고 답했고 62%의 응답자는 물가 상승의 주된 원인도 트럼프 정책에 기인했다고 봤다. 응답자 62%는 트럼프의 우선순위가 그의 개인적 이익이라고 봤고 38%만 우선순위가 국가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는 많은 유권자들이 여론조사원들과 인터뷰어들에게 트럼프가 새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물가를 낮추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속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민 정책에 있어서도 유권자들은 국경 폐쇄는 예상했지만 미국에 오래 거주한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체포하는 데에는 분개했다. 소비자 물가를 올리는 관세에 대해서도 반발했다.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 승리에 기여했던 라틴계 유권자들도 돌아섰다. AP 유권자 조사를 보면 하원선거에서 히스패닉 유권자 62%가 민주당에 투표했다. AP 보트캐스트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라틴계 유권자 55%가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에 투표했다. 이는 2020년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얻은 지지율(63%)보다 크게 하락한 것으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됐다.
트럼프 정부의 강경 이민 정책 탓에 라틴계 유권자들이 다시 민주당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풀이된다. 텍사스주 하원 선거에서 히스패닉 유권자 비율이 높은 멕시코와 맞닿은 3곳 지역구 의석은 민주당이 싹쓸이했다. BBC는 플로리다주에서도 공화당이 선거구 재획정을 통해 탈환하려 했던 하원 의석들을 민주당이 사수하는 데 히스패닉 유권자들이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공을 들인 젊은층도 대거 민주당으로 돌아섰다. AP 유권자 조사에 따르면 18~29살 유권자 72%가 하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 투표했다. AP 보트캐스트를 보면 이 연령층의 2024년 대선에서 해리스 전 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51%였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47%였는데 이는 2020년 대선(36%)보다 크게 오른 것이었다.
유권자들은 트럼프 정부에 대한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뉴햄프셔주 포츠머스 거주 은퇴 교사 로던 도노호(85)는 "그 끔찍한 사람에게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서라면 깨진 유리조각 위를 기어서라도 갈 수 있다"며 "트럼프 정부가 추구하는 모든 것에 진저리가 났고 우린 더 나은 것을 원한다는 걸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민주당에 투표했다고 밝혔다.
캔자스주 도지시티에 거주하는 주 판사 출신 밴 햄턴은 민주당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선출된 1976년 대선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 후보에게만 투표했다며 트럼프의 억제되지 않은 부패에 역겨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이전에 트럼프에 두 번 투표했다. 뉴욕주 글랜코브에 사는 환경미화원 댄 베일리는 "전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국방장관을 임명한 데 대해 분개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 전날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DC 반사연못 앞에서 마지막 유세를 펼치며 민생이 아닌 배관 문제에 치중한 건 "그의 정치적 감각이 상황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덧붙였다.
민주당 대승 윤곽이 드러나며, 법무부 등을 통해 부정선거 주장 포석을 깔아 온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불복 시도에 대한 우려가 커졌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결과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긴장이 어느 정도 가라 앉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3일 오후 10시30분께 백악관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보던 중 <뉴욕타임스>에 "나는 결과를 전적으로 수용할 용의가 있다"며 "우린 민주당과 협력할 것이며 그들과 협력하길 기대하고 있다. 우린 아마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만 한 시간 뒤 소셜미디어(SNS)에 "거부권"이라고 적힌 붉은 모자 이미지를 게시해, 향후 민주당이 장악할 의회에서 올라오는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적극 행사할 것임을 시사했다.
유권자들은 공화당의 극단화에 거부감을 표했다. 공화당 집안에서 자란 텍사스주 오스틴 거주 무소속 유권자 라몬트 피셔(46)는 <뉴욕타임스>에 "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어야 하나"라며 이번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제임스 탤러리코에 투표했다고 밝혔다. 그는 "탤러리코의 시각은 보라색을 원한다는 것"이라며 "나도 같은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시카고 시장을 지낸 민주당 람 이매뉴얼은 이번 선거의 "제일 큰 뉴스는 마가(MAGA·트럼프 강성 지지층)가 아닌 공화당원들이 공화당과 결별했다는 것"이라고 봤다.
다만 중간선거 핵심 불만은 고유가로, 미국인들이 트럼프주의와 결별했다는 평가는 이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미국 정치·공공정책 교수 린 바브렉은 이번 선거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천정부지로 솟는 휘발유값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정치 성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트럼프 인기가 시들해진 건 맞지만 공화당원들이 이민, 다양성 등 "정체성 중심 정책"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지진 않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미시간 주지사를 지낸 민주당 제임스 블랜차드는 이번 선거가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민주당 대승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미국 정치가 트럼프 이전으로 돌아가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고 봤다. 그는 "불행히도 우린 돌아갈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양원 장악에 따라 향후 민주당은 트럼프 정책을 저지하고 트럼프 대통령과 그 가족의 부패 의혹, 행정부에 대한 조사를 개시할 수 있으며 탄핵을 시도할 수도 있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우주기업 스페이스엑스(X)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도 조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는 3일 축하행사에서 선거 결과를 "상원 지도의 세대 교체"로 평가했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하킴 제프리스는 "미국인들이 변혁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민주당이 양원 장악에 성공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상원에서 대부분 법안 통과에 필요한 60표 확보가 쉽지 않은 탓에 생각보다 정책 추진에 속도가 붙지 않을 수 있다.
'반트럼프' 기치로 승리한 당의 목표를 재정비하고 당내 부상 중인 진보 진영과 중도파의 화합도 숙제다. <뉴욕타임스>는 당내 진보 진영은 이번 성공 원동력이 좌파에 기인했다고 주장할 것이고 중도파들은 캔자스나 텍사스 같은 주에서 불만을 품은 공화당원들에게 온건 전략이 먹혔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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