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출신 문세화 작가의 화면에는 바다가 있고 그 안에는 작게 그려진 사람들이 있다. 멀리서는 하나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삶을 가진 사람들과 작가 자신의 시간이 포개져 있다.
문 작가에게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20대의 불안에서 출발해 삶의 변화를 지나 지금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평생 살아온 부산의 정서와 감각을 담아내는 공간이다.
최근 <프레시안>과 만난 문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바다를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처음 문 작가의 화폭에 들어온 것은 부산의 바다가 아니었다. 출발점은 한때 꿈꿨던 에메랄드 빛 휴양지였다.
20대 시절 화가의 길에 막 들어선 문 작가는 거대한 미술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막연한 불안과 걱정을 안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중 찾은 휴양지에서 눈앞에는 꿈꿔왔던 바다가 펼쳐졌지만 정작 마음속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토록 꿈꿔왔던 바다 앞에서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아름다운 풍경과 그 안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저 자신을 한 화면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문세화의 바다를 만들었다.
초기의 바다가 휴양지의 선명한 에메랄드 빛이었다면 작업을 이어갈수록 그 위에는 평생 바라봐온 부산의 색과 정서가 포개졌다. 문 작가가 기억하는 부산의 바다는 화려한 관광지의 이미지만은 아니다. 감만부두와 영도처럼 정취가 묻어나는 정적인 바다, 도시의 차가운 빛과 한적한 해안의 따뜻함이 공존하는 풍경이다.
"제가 느껴온 부산의 바다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포개진 것 같아요. 그 풍경과 색이 제 내면의 감정과 만나면서 저만의 바다가 만들어졌습니다"
군중 속 작은 사람들 '랄라'가 품은 자신만의 시간
문세화의 바다에는 넓은 풍경에 비해 작디작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개개인보다 군중 전체가 중요했다. 당시 문 작가는 사회 속 사람을 거대한 체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바라봤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 사람들을 한 명씩 그려나가면서 시선도 달라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더라고요.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없었고요"
그 변화의 중심에는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랄라'가 있다.
랄라는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존재다.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람들과 어우러지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채운다.
초기의 랄라가 바다를 바라보는 소녀의 뒷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보다 발랄하고 생기 있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거친 바위가 부드러운 돌이 되기까지...
문세화의 초기 작품에는 거칠고 거대한 바위도 등장한다.
미술계에 첫발을 내딛던 20대 당시 바위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 버팀목이면서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도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문 작가의 내면을 닮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를 키우며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작품도 변했다.
바다와 계곡에서 오랜 세월 깎이고 다듬어진 돌을 바라보며 이전과는 다른 안정과 치유를 경험했다. 화면 속 거칠고 무거웠던 바위는 점차 둥글고 부드러운 돌이 됐고 그 안에는 따뜻하고 다채로운 빛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문 작가는 이를 "불안을 견디기 위한 버팀에서 삶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평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부산의 색이 해외에서는 낯선 감각으로...
해외 관객들과의 인연은 20대 때 참가한 대구아트페어에서 시작됐다. 당시 한 갤러리 관계자가 문 작가의 작품을 구입했고 수년 뒤 해당 작품이 미국에서 소개되면서 뉴욕과 LA 등 해외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계기가 됐다.
문 작가는 해외 관객들이 자신의 바다를 국내와는 조금 다르게 바라봤다고 말한다.
"외국에도 바다를 그리는 작가는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제 작품에서는 조금 다른 감각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부산에서 살아오며 쌓인 정서와 색감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형태로 다가갔던 것 같습니다"
최근 열린 'PIXELS'는 지나온 작업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문 작가는 "지금까지 축적해온 작업의 형태와 언어를 한자리에서 돌아보고 내면화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며 "지난 작업을 다지는 동시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전시였다"고 전한다.
떠날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부산'
문세화에게 부산은 단순한 활동지역이 아니라 작품의 색과 정서를 만들어온 원천이다. 한때 부산을 떠날 기회도 있었지만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상하게 아쉬움과 여운이 많이 남더라고요. 부산을 쉽게 떠날 수 없었어요. 제 작품의 원천이기도 하니까요"
부산이라는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정과 함께 아쉬움도 남아있다.
문 작가는 광안리와 해운대 같은 대표 공간에서도 이미 익숙한 이미지와 형식을 반복하기보다 자연과 지역의 특성을 살린 문화적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고 했다. 지역 작가들의 작품과 에너지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부산을 찾는 사람들도 도시만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생각이다.
"관광객들이 부산에 와서 부산만의 무언가를 느끼고 영감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유명한 것들의 집합이 아니라 부산만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신인작가로 돌아가도 부산에서 시작하겠느냐고 묻자 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네"
멀리 돌아 다시 자신의 색으로...
최근 문세화는 자신의 초기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여러 경험과 시각적 자극을 거치며 자신만의 감각을 찾아왔지만 돌이켜보니 많은 정보와 경험이 없던 시절 오롯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용했던 색이 오히려 가장 자기다운 색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앞으로의 바다는 부산의 정서와 자신의 내면을 닮은 조금 더 정적인 색으로 향한다. 화려한 무언가를 좇기보다 오래 바라봐온 부산의 바다와 자신의 감정을 다시 겹쳐내며 문세화만의 색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작품 밖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쌓인 감정과 기억, 과거 심리미술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미술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 안의 감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도록 돕는 마음 미술 프로그램이다.
"미술은 어떤 형태로든 아이의 감정과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자기 안에 가진 특별한 감각을 제가 옆에서 자연스럽게 꺼내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작가로서 꼭 서보고 싶은 특정한 해외 무대나 화려한 목표를 앞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제 작품을 보고 누군가 힐링이나 안식처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요"
훗날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냐고 묻자 문 작가는 다시 자신만의 색을 이야기했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온 작가였다고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 서양화가 문세화는 1988년 부산에서 태어나 동아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2024년 스마트갤러리 개인전 '너의 등불이 되어줄게'를 비롯해 국내외 전시를 이어왔으며 KIAF와 화랑미술제, LA Art Show, BAMA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 URBAN BREAK 등 주요 아트페어와 기획전에 참여했다. 뉴욕 SM Fine Art Gallery 등을 통해 해외에도 작품을 소개해왔으며 'When Was It', 'Find Myself', 'Ralra Beach' 등 작품으로 자신만의 색채와 조형언어를 구축해왔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 KNN 방송국 등에 소장돼 있다. 현재 부산을 기반으로 바다와 군중, 인간의 내면을 주요 모티프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