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라서 뒷줄로 밀려난 남자, 세상을 앞으로 밀었다

[인물로 본 세계사] '마틴 루터 킹의 숨은 설계자' 바이어드 러스틴은 누구인가?

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에 25만 명이 모였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외친 바로 그 자리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한 사람의 이름은 정작 그날 연단에서 거의 불리지 않았다. 버스 노선을 짜고, 화장실 개수를 계산하고, 안내요원 훈련까지 도맡은 이 사람은 행진이 성공한 뒤에도 사진 뒤편으로 밀려났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감옥에서도 밥그릇 순서를 따진 사내

바이어드 러스틴(Bayard Rustin, 1912~1987)은 191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퀘이커교도인 할머니 손에 자랐다. 간디(Mohandas Gandhi, 1869~1948)의 비폭력 저항에 감명 받아 평생 비폭력 노선을 걸었다. 1944년에는 징병협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식당에서 흑인과 백인이 따로 앉아야 한다는 규칙을 보고는 곧장 항의농성을 조직했다. 그가 교도소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불의를 대하는 태도는 셋뿐이다. 가만히 받아들이거나, 피해 다니거나, 비폭력으로 맞서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곧 불의를 영속시키는 일이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남부 여러 주를 돌며 '화해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버스 좌석분리에 맞서는 운동을 벌였다. 이 여정에서 몇 번이나 붙잡혔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사슬에 묶인 채 도로 노역을 하는 형벌까지 받았다. 훗날 널리 알려진 '자유승차 운동'의 원형이 바로 이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숨은 설계자

1956년, 러스틴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벌어진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이끌던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에게 비폭력저항의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쳤다. 킹이 훗날 세계적인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전략과 조직기술을 채워 넣은 사람이 러스틴이었다. 노동운동가 에이 필립 랜돌프(A. Philip Randolph, 1889~1979)가 러스틴에게 워싱턴 행진의 실무총괄을 맡긴 것도 이런 능력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25만 명의 행진, 이름은 지워지고

러스틴은 단 두 달 만에 25만 명 규모의 행사를 완성했다. 버스와 기차편성표, 물과 화장실 배치, 심지어 무대 음향장비까지 그의 손을 거쳤다. 하지만 남부의 보수정치인들과 일부 흑인 지도자들조차 그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또 젊은 시절 사회주의 활동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전면에 세우기를 꺼렸다. 행진이 역사에 새겨질 때 그의 이름은 각주로 밀려났다.

러스틴의 활동은 미국 흑인 인권에만 머물지 않았다. 인도, 가나, 나이지리아의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칠레, 폴란드, 아이티, 짐바브웨 등에서 선거 감시와 인권 관찰 활동을 벌였다. 베트남 보트피플 문제에도 앞장서 국제적 구호활동을 조직했다.

벽장 속의 전략가

말년의 러스틴은 흑인 인권운동과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나란히 놓고 사유했다. 1986년에 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흑인은 더 이상 사회변화를 재는 잣대가 아니다. 법이 어느 정도 흑인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 잣대는 동성애자다.”

사회변화를 이야기할 때는 가장 취약한 집단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1987년 아이티로 인권감시 활동을 떠났다가 병을 얻어 그해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게 남기는 질문

러스틴의 삶은 두 가지를 동시에 묻는다.

첫째,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대 뒤로 밀어내고 있는가. 한국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10년 넘게 표류하는 사이, 성소수자·이주노동자·장애인처럼 가장 취약한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각주 신세다. 러스틴의 잣대를 빌리면, 한 사회가 얼마나 정의로운지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인 가장 밀려난 이들의 처지로 가늠해야 한다.

둘째, 조직력과 실무능력이 운동의 성패를 가른다는 사실이다. 구호만으로는 25만 명을 모으지 못한다. 버스표 한 장, 화장실 한 칸까지 챙기는 지루한 실무가 역사적 순간을 만든다. 화려한 연설가 뒤에는 늘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한국의 시민사회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러스틴은 죽고 나서야 제대로 조명 받았다. 2013년에야 미국 정부가 뒤늦게 훈장을 주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바이어드 러스틴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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