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전기의 시대'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인류가 석유 중심의 시대를 지나 '전기의 시대(Age of Electricity)'에 진입했다고 선언했다. 산업과 운송, 건물 등 전 분야에서 전기화가 확대되면서 세계 전력 소비가 증가하고 있고, 특히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확산, 전기차(EV)와 히트펌프 보급 등 일상의 전기화가 전력 소비 급증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2025년 세계 전력 소비는 전년 대비 3% 증가해 2024년의 4.4%에 이어 2년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2024년에는 글로벌 전력수요 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앞질렀다. 이는 경제 위기 등으로 성장률이 크게 주춤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30년 만에 처음으로,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 뚜렷해질 전망이다. 2026~2030년 동안 세계 전력수요는 산업, 데이터센터, 전기차, 냉방 수요 확대에 따라 연평균 3.6%로 높은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됐고 2030년까지 전력수요는 전체 에너지 수요보다 최소 2.5배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늘어나는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발전량도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2025년 총발전량(3만 2132TWh·테라와트시)이 전년 대비 2.8% 증가한 가운데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전체 발전량 중 34%(1만 808TWh)를 차지하며 전년보다 8.7% 급증했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최근 10년 동안 평균 6%로 다른 발전원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핵발전은 전년 대비 1.2%, 액화천연가스(LNG) 발전량은 0.6% 증가했고, 석유와 석탄 발전량은 각각 –1.7%, -0.4% 감소했다.
이처럼 전기의 시대는 최종에너지 소비 중 전기의 비중 증가와 전력 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비중 증가를 수반한다. 이는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 전환의 가장 기본적인 정책 방향이기도 하다. IEA에 따르면, 2025년 세계 최종에너지 소비 중 전기 비중은 21%이며 시나리오에 따라 2035년에는 26%에서 33%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재생에너지가 추가되는 에너지 수요의 대부분을 충족시킬 것으로 예상되며 발전량 기준으로 재생에너지 비중은 2035년까지 50% 이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전기의 시대와 함께 최근에는 '전기국가(electro-state)'라는 표현이 국내외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주목받고 있다. 아직 합의된 정의는 없지만 최근 논의를 종합해 보면, 전기국가는 '재생에너지 관련 산업을 육성하고 재생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하며 고도화된 전력 시스템을 구축해 이를 기반으로 산업·수송·건물 등 사회 전반을 전기화해 탄소중립을 달성하면서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국가'로 정의할 수 있다.
전기국가는 생산과 소비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국내총생산(GDP) 중 재생에너지 관련 산업 비중이 높으면 '생산자형 전기국가(producer electro-state)', 최종에너지 소비 중 전기 비중이 높은 경우, '소비자형 전기국가(consumer electro-state)'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에 모두 속하는 대표적인 국가로는 중국이 꼽힌다. 중국은 청정에너지 부문이 GDP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태양광과 풍력, 배터리 산업과 공급망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며 올해 들어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이 처음으로 40%를 넘어섰다. 최종에너지 소비 중 전기 비중도 최근 약 30%까지 급증하면서 미국(21%)과 유럽연합(23%)을 넘어 일본(30%)과 같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중국이 가장 강력한 전기국가로 전환하는 사이 미국은 석유 생산을 통해 패권을 유지해 온 '생산자형 석유국가(producer petro-state)'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난 10년간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국이자 LNG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이전 바이든 정부는 수출을 기후 목표와 연계하려 했지만, 트럼프 정부는 화석연료 사용을 극대화하고 세계적인 화석연료 공급국으로서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하지만 미국은 노후 전력망과 재생에너지 제조 기반 공백으로 인해 첨단산업 전력 공급에 한계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이 지난해에 25%를 넘어섰다. AI와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중심인 소비자형 전기국가로 전환하는 모양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7월 '전기화 행동계획(Electrification Action Plan)'을 발표했다. 전기화가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안보에 핵심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현재 23%인 전기화 비중을 2040년까지 46%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EU는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2025년에 47.3%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화 비중은 중국과 일본 등 주요국에 비해 낮아 전기화 전환 속도가 느리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산업·건물·수송 부문에서의 화석연료 의존도가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 변동성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대됐다. 이에 수입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고 역내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 전력을 중심으로 에너지 시스템을 재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번 행동계획은 기존 재생에너지 확대를 넘어 가격체계 개편, 전력망 및 유연성 강화, 산업·건물·수송 부문의 전기화 확대, 투자 및 제도 기반 구축 등을 통해 전력 소비 확대와 산업 전환을 포괄하는 종합 전략으로 마련됐다. 최종에너지 소비에서 전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확대하고, 화석연료 수입을 대폭 감축하는 한편, 전기화를 EU의 산업 경쟁력과 에너지 안보를 뒷받침하는 핵심 정책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한국도 전기국가를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탄소중립 시대로 가기 위한 핵심적인 정책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난 5월에 '제1차 재생에너지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중동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에 따라 석유 공급선 다변화와 비축 등 기존의 에너지 안보 전략을 재생에너지 중심의 국내 생산 에너지(home-grown energy) 확대 전략으로 재정립했다. 전기국가로의 도약과 에너지 대전환을 위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100기가와트 보급하고, 2035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30% 이상으로 높이기 위한 5대 과제와 10대 전략이 마련됐다.
지난 6월 29일에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는 반도체와 AI 산업을 국가 성장동력으로 육성할 수 있도록 전력 인프라 구축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는 'AI시대를 선도하는 전기국가 비전'을 발표했다.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핵심이 안정적인 전기공급에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도 전기 중심의 에너지 소비로 전환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한국은 2025년 최종에너지 소비 중 전기 비중이 21.9%로 낮고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장기 전망에 따르면 2050년에야 35.6%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재생에너지와 배터리 산업의 국제 경쟁력은 중국에 밀려서 갈수록 약해지는 상황에다 총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도 9.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여전히 꼴찌다. EU 평균(47.3%)은 물론이고 OECD 38개국 평균(35.3%), 세계 평균(34%)에 비해서도 크게 낮고, 정부 계획대로 실행되더라도 2035년에야 현재 세계 평균에 겨우 근접하게 된다.
전기국가 비전은 제시했지만, 국내외 상황은 열악하다. 태양광과 풍력, 배터리 산업과 공급망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넘어 명확한 전기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공급과 수요 부문의 체계적이고 전방위적인 정책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EU, 이란 침공 등 석유국가 패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언제든 전기국가로의 전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미국 사이에서, 한국은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기국가,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 자립국으로 전환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기본계획(에너지 감축과 부문별 전기화 목표)과 전력수급기본계획(석탄과 LNG발전 폐지와 재생에너지 발전 확대), 재생에너지기본계획(지역별 목표와 재생에너지 원별 세부 과제와 전략)이 체계적으로 수립돼야 하고,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분야에 전방위적인 정책 방안이 마련돼야 하며, 정책 방안이 계획대로 실행돼야만 가까스로 실현될 수 있는 과제다. '3대 메가프로젝트를 위한 전력 공급'이나 'AI 시대를 선도하는 전기국가' 비전을 선언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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