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김여정이 빨리 등판했다. 그냥 두고 보기에는 워싱턴과 서울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너무 빨리 커졌던 모양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연합군사연습의 대폭 축소를 지시했고, 실제 UFS 연습 기간 단축과 일부 야외기동훈련 축소로 이어졌다. 곧이어 트럼프가 김정은과 연내 만남을 추진한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서울에서는 조미대화에 대한 기대와 '페이스메이커' 역할론이 다시 등장했다. 언론은 벌써 조미대화 재개와 한반도 평화국면 가능성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평양 입장에서는 그냥 두고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이 자기 의도를 먼저 설명하고, 자기 반응까지 대신 만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19일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의 '주요국제문제들에 대한 립장'은 그래서 흥미롭다.
UFS 축소에 대한 평가, 트럼프와 김정은의 개인관계, 최근 조미 정상 간 소통설, 우크라이나가 제기한 추가 파병설, 일본의 군사력 증강까지 한꺼번에 정리했다. 단순한 대미 담화라기보다 평양을 둘러싼 여러 해석에 선을 긋는 일종의 '종합정리'에 가깝다.
김여정은 트럼프의 UFS 축소에 대해서는 아예 "평할 가치도 없고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훈련 기간이 줄고 규모가 작아졌다고 한미 군사활동의 적대적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미국이 이번 조치를 '선의의 조치'로 선전해 원하는 답을 얻으려 한다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가 "내가 이 정도까지 했는데…"라고 생각했다면 평양의 답은 일단 "그래서요?" 정도다. 셈법이 다르다는 뜻이다.
워싱턴은 개별 훈련의 축소를 선의나 유화조치로 볼 수 있지만, 평양은 연중 계속되는 한미연합훈련 전체와 군사협력 구조를 본다. 훈련 하나의 기간을 줄였다고 적대정책의 본질이 달라졌다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김정은과 트럼프의 개인관계는 살려뒀다. 김정은이 트럼프에 대해 "좋은 추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고 "두 지도자들의 관계는 의연 훌륭하다"고 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개인관계는 좋다. 그렇다고 그 개인관계가 현재 조미관계를 움직이는 변수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친분은 친분일 뿐 안보는 별개의 문제이다.
최근 워싱턴에서 흘러나온 조미 정상 간 소통설에는 오히려 더 노골적인 냉소를 보였다. 김여정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면서,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최고지도부의 대외정책과 관련하여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사안"일 것이라고 했다.
이 문장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비밀접촉 가능성을 열어둔 표현으로 읽는 해석도 나온다. 나는 반대로 "나도 모르는 김정은-트럼프 비밀대화가 있었다고요? 저도 좀 알려주세요."라고 읽힌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옮기면 "나 김여정인데, 내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에 가깝다. 문맥상 조미 소통설을 은근히 인정한 표현이라기보다 비꼼에 가깝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좋은 개인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실제 정책 소통과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추측은 차단한 것이다. 그래서 언론이 잡아야 할 헤드라인은 "조선이 트럼프의 손을 뿌리쳤다"도 아니고 "조미대화의 여지를 남겼다"도 아니다. 좀 더 자세히 해석하면 "김정은과 트럼프의 개인관계는 살려두되, 그것이 현재 조미관계를 움직이는 정책 변수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2018년과 2019년에는 두 정상의 개인적 관계 자체가 외교를 움직이는 자산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은 핵보유를 법과 헌법, 군사교리에 내재화했고 러시아와의 군사·안보협력도 크게 강화했다. 트럼프와 좋은 추억이 있다고 해서 평양이 그 추억만 믿고 협상장으로 나올 이유는 많지 않다.
추가 파병설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 김여정은 우크라이나 측의 조선군 '추가파병' 주장을 "사실무근한 자작극"이라고 명확히 부인했다. 여기서 멈추면 조선이 향후 추가 파병 가능성까지 닫은 것처럼 읽을 수 있지만 바로 다음 대목이 중요하다.
김여정은 조러조약의 "동맹적 성격"을 강조하고 "동맹체약국으로서의 의무"에 조선이 항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있으며 무한히 책임적이라고 했다. 현재 회자되는 특정 추가 파병설은 틀렸다고 선을 그었지만, 앞으로 조러동맹의 의무를 어떻게 이행할지에 관한 선택지를 스스로 닫지는 않았다. "지금 회자되는 이야기는 틀렸다"와 "앞으로 동맹의무를 어떻게 이행할지는 우리가 판단한다"는 메시지가 동시에 담겨 있다.
군사적으로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일본이다. 김여정은 일본의 군사적 팽창 때문에 일본을 "군사적 목표"로 간주하는 인식이 강해졌다고 사실상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본의 위협을 "억제하고 제압 또는 그 이상"으로 만드는 것을 군사전략의 일부로 보기 시작했다고까지 했다. 최근 조선의 대일 비판을 단순한 선전전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일본을 미국의 후방기지 정도가 아니라 독자적인 군사적 위협주체로 재인식하고, 그에 대한 억제와 타격 개념을 자신의 군사전략 안에 편입하기 시작한 것인지 추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최근 조선의 핵·미사일 전력 강화 논리에서도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질 수 있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북아와 아시아태평양의 군사적 힘의 균형이라는 더 넓은 공간에서 핵무력을 정당화하려는 흐름과도 연결된다.
이번 김여정의 이른 등판은 왜 필요했을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트럼프의 UFS 축소 지시가 실제 군사적 조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SNS 한마디였지만 연습 기간이 단축되고 일부 훈련이 축소됐다. 여기에 김정은과 트럼프의 개인관계가 다시 과잉소비되기 시작했고, 조미 정상 간 비공개 소통설과 연내 회담 추진설까지 나왔다.
이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미국은 "우리가 선의를 보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서울과 언론은 "북미대화의 계기가 마련됐다"며 의미를 더 키울 수 있다. 평양 입장에서는 남이 자기 반응을 대신 만들어주는 상황이다. 워싱턴과 서울은 선의와 평화의 주도권을 가져가고, 평양은 나중에 호응하지 않았다는 책임만 떠안을 수도 있다. 그 전에 김여정을 내세워 해석의 선을 그은 셈이다.
최근 며칠 사이 평양을 둘러싼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진 것도 이유일 것이다. 조미 정상 간 비공개 소통설, APEC 회담 추진설, 추가 파병설, UFS 축소에 대한 예상 반응까지 외부가 조선의 입장을 대신 말하고 있었다. 김여정이 한 가지 사안만 다루지 않고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정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입장 발표는 미국만을 향하지 않았다. 미국에는 "UFS 축소는 정책변화가 아니다" 한국에는 "한미동맹과 군사력 증강은 여전히 적대적이다" 우크라이나에는 "추가 파병설은 사실이 아니다" 러시아에는 "동맹의무에는 책임적이다" 일본에는 "군사전략상의 위협대상으로 보고 있다" 내부에는 "우리의 대외·안보노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의 문건에서 여러 상대에게 서로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입장 발표 첫머리에서 중동, 우크라이나, 한반도, 일본을 한 흐름으로 묶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 볼 수 있다. 평양은 미국과 서방의 패권적 군사행동이 중동·유럽·아시아태평양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UFS, 조러동맹, 일본의 재군사화, 우크라이나전은 서로 다른 현안이지만 조선의 전략인식 속에서는 하나의 연결된 안보환경이다. 그래서 이번 김여정의 등판은 단순한 대미 신호라기보다 해석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행동에 가깝다.
워싱턴은 회담을 추진한다고 한다. 서울은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한다. 언론은 조미대화라는 기사거리를 찾는다. 우크라이나는 추가 파병을 말한다. 일본은 군사력을 키운다. 평양 입장에서는 더 놔뒀다가는 자기들도 모르는 이야기가 꿈보다 좋은 해몽으로 기정사실이 될 판이다. 그래서 김여정이 조금 일찍 나와 한마디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기요, 잠깐만요. 우리 얘기도 좀 듣고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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