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진의 아름다운 우리 가락] 풍경보다 오래 남는 것…피서지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큰맘 먹고 해외로 떠날까. 아니면 가까운 도시를 천천히 둘러볼까? 이맘때가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분주하게 고민한다. 그런데 여행지를 고를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 것일까?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일 수도 있고 오래 기억에 남을 음식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그곳에서만 가능한 경험일 수도 있겠다.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 궁궐 문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청사초롱을 들고 어두워진 전각 사이를 걷는 사람들,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다과상을 받는 여행객들. 몇 해 전만 해도 낯설었을 이런 풍경이 이제는 여름 여행의 한 장면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달라진 것은 전통예술이 일정표의 빈칸을 채우는 구색이 아니라, 그곳으로 떠날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달 칼럼에서는 관객이 전통공연을 만나는 공연장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면, 이번 달에는 잠시 공연장을 벗어나보려 한다. 휴가지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예술의 이야기다.

시간여행자가 되는 시간 : 고궁의 밤과 한옥스테이

전통문화 관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고궁의 밤일 것이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청사초롱을 들고 약 100분 동안 인정전과 낙선재를 거쳐 후원의 부용지까지 거니는 프로그램으로, 상량정에서는 대금 독주가 참여자를 맞는다. 올해 상반기에는 선착순이 아니라 추첨 응모를 거쳐 당첨자가 우선 예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예매 방식을 바꿔야 할 만큼 사람이 몰린다는 뜻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2026 봄 궁중문화축전에는 72만 5281명이 방문해 역대 최다를 기록했고, 4대 궁과 종묘 기준 외국인 관람객은 18만 3427명으로 전년보다 약 33% 늘었다.

사랑 받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선 그 시간 그 자리에서만 가능한 경험이라는 점이 크다. 창덕궁의 밤은 낮에 가서도 다른 계절에 가서도 만날 수 없으니 화면으로는 결코 대체되지 않는다. 어떤 콘텐츠 하나를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다. 어두운 전각과 발밑의 자갈 소리, 여름 밤의 분위기, 후원의 공간이 주는 아름다움, 그 위에 얹히는 대금 소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여러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며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낸다.

또 하나의 축은 숙박이다. 세계관광산업이 관람형에서 체험형·체류형으로 옮겨가는 흐름 속에서 한옥스테이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국 문화 체험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고, 한옥은 숙박시설을 넘어 한국인의 삶과 철학을 경험하는 문화공간으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다. 문화예술경영의 시선으로 보면 이 지점이 제법 흥미롭다. 공연이나 체험 콘텐츠는 길어야 두 시간이면 끝나지만 숙박은 하룻밤, 더 길게는 여러 날을 통째로 보내기 때문이다. 저녁에 마당에서 바람을 맞고 아침에 창호지 너머로 스며드는 빛을 보는 경험은 아무리 좋은 공연장이라도 제공할 수 없는 상품이며 그 안에서 머나먼 예전으로 떠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한옥스테이의 특별한 점이라 할 수 있겠다.

계절을 엮어내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최근 남산골한옥마을이 선보인 여름 프로그램을 두고 담당자는 한옥 공간에서 제철 미식과 전통 공예, 절기 문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한 계절 콘텐츠라고 설명했는데, 전통을 보여주는 대신 문화 그 자체를 엮어내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2026년 궁중문화축전 개막제 ⓒ국가유산진흥원

오래된 유산 위에 빛을 얹다

여기에 최근 몇 해 사이 빠르게 자리 잡은 것이 야간 문화유산 콘텐츠다.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국가유산이 품고 있는 고유의 장소성과 역사성, 독창적인 이야기를 프로젝션 맵핑과 이머시브 사운드, 미디어 월 같은 디지털 기술로 풀어내는 사업으로, 올해는 8월 14일부터 10월 18일까지 전국 12개 지역에서 열린다. 경주 대릉원과 양산 통도사, 부여 정림사지,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처럼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지닌 곳들이 무대가 되니 같은 사업이라도 지역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눈여겨볼 것은 지자체들이 이 사업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강화 고려궁지에서 행사를 준비하는 강화군은 관광 시간대를 낮에서 밤까지 확대해 체류형 관광을 활성화하고 숙박과 음식업 등 지역 상권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지난 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피란수도 부산 국가유산 야행은 야경(夜景), 야로(夜路), 야설(夜說), 야사(夜史), 야화(夜畵), 야시(夜市), 야식(夜食), 야숙(夜宿)이라는 여덟 개의 밤 테마로 구성됐는데, 보고 걷고 이야기 듣고 사 먹고 잠드는 일까지 밤 시간 안에 촘촘히 배치해둔 구조였다. 관람객을 붙잡아두는 것이 아니라 머물 이유를 하나씩 늘려가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수원 국가유산 야행이 지역에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예술인들에게 공연 기회를 열어주며 시민과 함께 만드는 참여형 축제를 지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 문화가 관광과 만나면 행사 하나가 늘어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체류 시간이 길어지고 지역의 소비가 늘어나며, 무엇보다 그 지역만의 브랜드가 만들어진다. 문화콘텐츠가 관광 경쟁력이라 불리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2025년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경주 대륭원 ⓒ국가유산진흥원

종달리의 이야기는 어떻게 싱가포르까지 갔나

지금까지의 사례가 국가유산청이나 지자체가 궁궐과 고분처럼 장소로 남은 유산을 무대 삼아 벌인 일이었다면 사뭇 다른 자리에서 출발한 이야기도 있다. 제주 종달리의 '해녀의 부엌'이다. 해녀 역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이름이 높지만, 이곳이 무대에 올린 것은 지정된 유산이라기보다 지금도 바다에 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생업에 가깝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한 김하원 대표는 제주 해녀의 손녀로, 해녀의 삶이 늘 과거형으로만 소비되고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이 정당한 가격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고 말한다. 고향의 어촌 창고를 개조해 소극장을 만든 것이 그 시작이었다. 우영팟과 바당, 불턱, 노을이라는 네 코스 사이사이에 2인극과 미디어아트가 펼쳐지고 무대에는 실제 어촌계의 해녀가 배우로 함께 서는데, 연평균 예약률이 96.8%에 이른다고 하니 제주를 찾는 이들에게 이곳은 곁들이는 일정이 아니라 먼저 잡아두고 나머지를 맞추는 일정에 가까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해녀의 부엌은 지난해 봄 프랑스에 진출한 데 이어 싱가포르 법인을 세웠고 12월에는 싱가포르점의 문을 열었다. 제주가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라 여겼는데 그 이야기가 적도 부근의 도시국가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옮겨간 것은 종달리의 창고가 아니라 해녀의 삶이라는 서사다. 제주에서만 나올 수 있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오히려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셈이다. 지역성은 세계로 나가는 데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여권에 가깝다. 어디에서 왔는지 말할 수 없는 콘텐츠는 어디로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경상도의 종가와 전라도의 밥상, 강원도의 산자락과 제주의 바다가 저마다 다른 생활문화를 길러왔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전국화하기 어려운 조건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어디서나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면 굳이 그곳까지 찾아갈 이유가 없는 시대에, 지역마다 다른 장소성과 생활문화를 지녔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그러나 아직 충분히 쓰지 못한 자원이다.

되는 기획과 남지 않는 기획

여기까지만 보면 순항 중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선을 조금 옮기면 풍경이 사뭇 달라진다. 최근 한 보도는 지자체들이 앞다퉈 축제 규모를 키우고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본래의 목적은 실종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방문객 유치에는 성공하고도 실질적인 소비 유발에는 실패한 사례를 질적 하락의 대표로 꼽았다. 지역주민에게는 외면받고 외부 방문객에게는 소비를 유인할 만큼의 매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진단도 함께 나온다.

우리 문화가 이런 구조 안에 놓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축제 무대 한켠에 삼십 분짜리 전통공연 순서가 배치되고, 그 구성은 어느 지역에 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지역의 이야기와 이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지나가다 잠깐 눈길을 주고는 메인 무대의 초청 가수를 기다린다. 예산은 집행되었고 행사는 열렸으니 서류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정작 남는 것은 많지 않다. 잘 되는 기획과 그렇지 못한 기획을 가르는 것은 결국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맥락의 유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세 가지를 짚어보고 싶다. 먼저 전통을 알리겠다는 목적보다 경험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계몽적인 태도는 금세 들키기 마련이고, 궁중문화축전이 사랑받는 것도 그것이 국악 축제가 아니라 궁궐에서 노는 축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 자리에서만 가능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은 굳이 그곳까지 찾아갈 이유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평가의 기준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방문객 수만으로 성패를 재면 초청 가수를 부르는 것이 언제나 정답이 되겠지만,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다시 올 마음이 생겼는지를 함께 묻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 문화 콘텐츠에 투자할 이유도 생겨난다.

여행은 끝나도, 추억은 남는다

우리 문화는 유리장 안에 보관된 유물이 아니라 그 땅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전시장이나 공연장에서의 만남보다 오히려 더 결정적일 수 있다. 마음먹고 찾아가는 사람은 이미 관심이 있는 사람이지만,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은 아직 우리를 모르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올해 가을 궁중문화축전은 10월 7일부터 11일까지 창덕궁과 덕수궁, 창경궁, 종묘 일원에서 열린다고 하니 조금 이르게 달력에 표시해두어도 좋겠고, 이번 여름 휴가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밤의 궁궐 한 바퀴나 한옥에서의 하룻밤, 혹은 제주의 어느 저녁을 후보에 올려보아도 좋겠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여행지가 서울의 궁궐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남원의 이야기와 진도의 바다, 안동의 오래된 골목, 그리고 우리 동네의 추억을 입은 자리까지 저마다 제 땅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름이었으면 좋겠다.

여행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사진 속 풍경은 조금씩 흐릿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마주친 누군 가의 얼굴과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어쩌면 올여름 가장 특별한 여행지는 멀리 있는 바다가 아니라, 누군 가의 삶이 아직 이어지고 있는 어느 자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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