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AI와 반도체, 미래 모빌리티를 중심으로 한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수천조 원 규모의 민관 투자를 통해 대한민국을 '초격차 산업국가'로 도약시키겠다는 구상이다.
그 현실성 여부를 떠나, 전 세계가 AI와 로봇을 축으로 산업질서를 재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많지는 않다. 앞으로의 성장과 수출, 일자리는 물론, 국가 안보의 향방까지 거대한 전환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와 혁신은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전략이다.
AI가 만드는 새로운 불평등
장밋빛 전망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초격차 산업의 시대는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 성장의 이면에 불평등은 늘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업화 시대에는 생산성이 높아지면 고용이 확대되고, 임금이 상승해 중산층이 두터워지는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성장의 혜택이 모두에게 공평하진 않았어도, 성장과 분배가 일정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다.
디지털 경제 체제가 등장하면서부터 여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가혹한 현상을 낳았고, 기술을 쥔 소수에게 부가 쏠리는 양극화를 촉발했다.
AI 시대에는 그 불완전한 연결고리마저 끊어질 가능성이 크다. 디지털화가 인간의 육체노동과 단순 반복 업무를 대체했다면, AI 기술은 인간의 지적 노동 영역까지 파고들며 극소수의 인력과 인프라만으로도 압도적인 생산성을 뽑아내기 때문이다. 대규모 고용이나 보편적 임금 상승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노동시장의 극단적인 분화와 지금껏 목격하지 못한 내부 격차가 나타날 수 있다.
최근 삼성 전자 반도체 부문과 SK하이닉스에서 벌어진 수억원대 성과급 행진, 이른바 'AI 돈잔치'는 그 전조다. AI 성장의 결실이 첨단 기술 생태계의 핵심 기업과 인력에게 집중되면서, 노동시장 내부에서조차 '초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기술 성장의 결과가 노동시장을 통해 사회 전체로 흐르는 힘은 갈수록 약해질 것이다. 성장하면 모두의 삶이 함께 나아진다는 산업화 시대의 공식이 이전만큼 작동하지 않는다. 기업의 초과이익은 주가와 배당, 스톡옵션 등을 통해 자산을 보유한 계층에 먼저 귀속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기술과 자산을 보유한 계층은 성장의 혜택을 반복적으로 축적하는 반면, 노동소득에 의존하는 계층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워진다. AI 시대의 불평등은 소득 격차를 넘어, 구조적 자산 격차로 진화한다.
지난해 기준 30세 미만 청년의 자산 상위 20% 평균 자산(14억 원)과 하위 20%(4천만 원)의 격차는 34배에 달한다고 한다. 부동산 등 실물자산으로 좁히면 그 차이가 200배를 넘어선다.
같은 시대, 같은 나이로 출발하지만, 다른 출발선에 서있다. 그렇게 발 디딘 운동장은 이미 서로 다른 세상이다. 부모의 자산이 교육의 기회를 결정하고, 그 교육이 직업의 격차를 만들며, 그 직업이 다시 자산의 격차를 공고히 하는 불평등의 대물림이 구조화 되고 있다. 출발선에서 뒤처진 청년들에게 혁신의 기회는 남의 일일 뿐이다.
AI 시대의 초격차는 이 악순환의 가속페달이 될 것이다. 불평등은 기회의 차이를 넘어 피케티가 경고한 '세습자본주의'의 형태로 고착화될 것이다.
재분배의 한계를 넘어
대한민국이 국가 전략으로 '초격차 산업'을 선택한다면, 그로 인해 도래할 '초격차 사회'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 역시 국가의 핵심 전략이 되어야 한다.
기존의 복지나 사후적 재분배 공식만으로는 이 거대한 파도를 넘을 수 없다. 조세와 복지 제도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시장이 일자리와 임금이라는 일차적 분배 기능을 상실해간다면, 사후에 세금을 걷어 격차를 메우는 방식은 재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복지국가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도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케인즈 이후 현대 복지국가의 경제학은 성장과 분배를 대립시키지 않았다. 분배는 소비와 수요를 뒷받침해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성장은 다시 분배의 재원을 만드는 선순환을 지향했다. 이 원리는 지금도 유효하다. 문제는 AI 시대가 그 선순환의 전제, 즉 성장이 고용과 임금을 통해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메커니즘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 연결고리를 시장 밖의 사회임금이나 사후적인 재정 투입만으로 복원하기는 어렵다. 이제는 시장 안에서 성장의 과실이 배분되는 규칙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불평등의 결과를 교정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불평등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재분배를 넘어 선분배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시장 규칙을 바꾸는 선분배
선분배의 핵심은 시장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다.
플랫폼 대기업과 독과점 빅테크가 기술 권력을 독점해 하도급 업체와 노동자의 몫까지 과도하게 가져가지 못하도록 법적·제도적 방화벽을 세워야 한다.
플랫폼 노동자에게 노동법상 정당한 권리와 지위를 부여하고, 기술 혁신의 초과이득이 생태계 하부까지 흘러가도록 '초과이익 공유 규칙'을 정립하는 등 시장 내부의 보상체계를 바꾸고 분배 룰을 재설계해야 한다.
AI의 핵심 자원인 빅데이터는 시민 모두의 흔적과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데이터로 만들어진 초과이득도 특정 기업만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데이터 주권의 논리 위에서, 첨단산업의 성과 일부를 국민에게 되돌리는 새로운 분배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 그 정책이 '기초자산'이 될수도 있고 '기술배당'이 될 수도 있다. 정책의 구체적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에게서 나온 것을 시민에게 되돌려주는 원칙이다.
이런 제안은 시장의 재분배를 재원으로 하는 사후적 복지 정책이 아니다. 초격차 산업의 성과가 초격차 사회라는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정부가 법과 제도를 수단으로 시장의 설계도를 다시 짜자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계약
지난 세기의 복지국가는 '성장의 결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고민했다. AI 시대의 국가는 '누구를 성장의 규칙 안에 참여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 메커니즘을 혁신하지 못한다면 초격차 산업은 성공할지 몰라도 사회는 더 깊은 불평등의 늪에 빠질 것이다.
성장과 분배 중 하나를 고르는 이분법의 정치는 과거의 패러다임이다. 이제 성장의 엔진을 키우면서도, 그 성장의 기회와 규칙을 공정하게 설계해 부를 넓게 공유해야 한다. 그것이 초격차 시대를 건너기 위해 우리가 더 깊이 검토해야 할 '선분배의 경제학'이며,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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