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에선 아직도 尹이 대통령인가? 평화를 말한 李대통령, '대결'을 쓴 공동성명

[김동엽의 '이게 안보여'] 한-EU 공동성명, 문제는 조선의 반발이 아니라 외교안보라인의 조정 실패다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10국 대변인 담화는 거칠었다. 한국 집권자가 "평화의 가면"을 벗었다고 했다. 한-EU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주권침해", "엄중한 적대행위", "대결선언"으로 규정했다. 한국을 "적대와 대결을 체질화한 불변의 적국"이라 몰아붙였다.

조선의 표현은 과격했지만 반응은 예상 밖이 아니었다. 공동성명에 예상 가능한 반응을 부를 문구를 넣었지만 예상 가능한 반응을 관리할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 사안을 조선의 예상된 반발 정도로 좁히면 핵심을 놓친다. 조선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 북러 군사협력에 대한 우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국제법적 판단은 대한민국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외교 원칙이다. 문제는 원칙 자체가 아니다. 그 원칙을 어떤 언어로, 어떤 순서로, 어떤 전략적 목표 아래 배치했느냐다.

원칙은 선명해야 하지만 언어는 위기안정적이어야 한다. 평화공존을 이야기하고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려는 정부라면 둘을 동시에 해야 한다. 이번 공동성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실패했다.

한-EU 공동성명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을 규탄하고, 러시아와 조선의 불법적 군사협력을 강력히 규탄하며, 조선이 NPT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남북교류 확대, 관계 정상화, 비핵화, 평화적 공존, 공동 성장, 남북대화 재개 노력을 지지한다고 썼다.

문장 하나하나만 보면 익숙한 외교 문구이지만 전체 구조로 보면 다르다. 앞에서는 상대를 국제법 위반 행위자, 불인정 대상, 제재 이행 대상으로 규정하고, 뒤에서는 그 상대와 평화공존과 대화 재개를 하겠다고 말한다. 조선이 읽을 문서는 뒤의 희망이 아니라 앞의 규정이다.

문제는 문구가 지닌 절대 강도가 아니라 문맥이다. 이번 공동성명의 대북 문구는 평화공존을 내건 이재명 정부의 전략적 문맥과 충돌한다. 러시아와 조선의 군사협력을 "강력히 규탄"하고, 조선은 NPT상 핵보유국으로 "결코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조선 인권상황의 "실질적 개선이 필수적"이라고 명시했다. 평화공존을 말한 정부가 정상외교 첫 고강도 대북 공동문서에서 조선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핵보유국 지위, 북러 군사협력, 인권 문제를 한꺼번에 병렬했다. 대화의 입구를 넓혀야 할 시점에 대화의 문턱을 높이는 신호가 나간 셈이다.

EU의 입장은 강할 수밖에 없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먼 지역의 분쟁으로 보지 않는다. 북러 군사협력도 유럽 안보를 직접 흔드는 문제로 본다. 인권, 국제법, 비확산 문제에서 EU가 원칙적 언어를 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EU가 아니라 한국이다. 한국 외교는 유럽의 위기 인식과 한반도 위기관리의 필요를 같은 문장 안에서 조율했어야 했다. 한국이 EU의 강경한 언어를 공동성명 형식으로 그대로 떠안는 순간, 평화공존의 언어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외교는 원칙을 포기하는 기술이 아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위기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북러 군사협력을 비판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NPT 원칙을 버리자는 말도 아니다. 인권 문제를 침묵하자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정상외교 공동문서라면 문구의 배열과 완충 장치까지 계산했어야 한다.

조선은 이미 핵보유국 지위를 협상 불가의 영역으로 못 박아 왔다. 그 주장을 인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런 상대를 움직이려면 상대가 가장 강하게 반응할 지점을 어떻게 다룰지 더 세심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 사안을 한 문서에 강한 어조로 묶는 방식은 조선의 호응 여지를 넓히기보다 좁히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시점도, 묶음도, 어조도 전략적이지도, 위기관리적이지도 못했다.

외교 문서는 상대가 어떻게 읽을지까지 계산해 작성하는 전략 문서다. "우리가 원래 이렇게 말해 왔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문장도 어느 정부가, 어느 시점에, 어느 상대와, 어느 문맥에서 넣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신호가 된다.

이전 정부의 대결적 프레임 속 문장과 평화공존을 내건 이번 정부의 정상회담 공동성명 속 문장은 같은 효과를 낼 수 없다. 더구나 조선은 이미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재정립했다. 그런 상대에게 평화적 공존을 말하려면 단어 하나 문장 한 줄까지 더 치밀해야 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공동성명에 담긴 내용이 이미 한국이 밝혀 온 입장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설명이고, 그런 설명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는 외교안보라인의 전략적 무감각이다. 새로운 문구가 아니어서 문제가 없다는 인식은 외교안보 감각의 부족을 넘어 능력의 부재를 드러낸다.

조선의 입장에서 이재명 정부가 유럽연합과 함께 내놓은 첫 고강도 대북 문구는 새 신호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신호다. 국내적으로도 과거와는 다른 신호다.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평화공존과 긴장 완화의 방향을 말한 직후라면 더 그렇다. 정책은 문장의 반복이 아니라 문맥의 설계다. 외교는 과거 입장문 보관함에서 익숙한 문구를 꺼내 붙이는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화, 소통, 협력, 공동번영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적 통일의 지향도 당장은 평화공존, 소통, 대화, 존중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핵화 역시 현실과 이상 어느 한쪽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 핵물질 추가 생산 중단과 해외 반출 금지부터 단기 목표로 협상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불과 며칠 뒤 공동성명은 조선이 가장 민감해할 문구들을 다시 강한 어조로 병렬했고, 비핵화를 다시 출발점에 놓는 듯한 신호를 냈다. 대통령의 전략적 언어와 정부의 외교문서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순은 평양과 모스크바를 향한 방향에만 있지 않다. 같은 문서는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을 거론하며 중국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메시지까지 담았다.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이 결국 협력 공간을 열어야 할 중국을 향해서도 부담을 만든 셈이다.

원칙을 말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한국의 국익을 위해 원칙의 언어를 더 정교하게 배열해야 한다는 뜻이다. 외교에서 옳은 말은 충분조건이 아니다. 필요한 말인지, 지금 할 말인지, 어떤 문서에 넣을 말인지, 어떤 후속 조치를 준비한 말인지가 더 중요하다.

이번 사안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 안에서 평화공존 전략이 실제 정책 조정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평화를 말하고 있는데 외교 문서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국민은 한 정부 안에 여러 개의 대북정책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메시지 혼선이 아니라 정책적 모순이고 전략 조정의 실패다.

관료정치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넘길 수도 없다. 부처마다 언어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외교부는 국제규범의 언어를 쓰고, 통일부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보며, 안보실은 군사안보의 위험을 계산한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전략 방향을 정책 문서로 통합해야 한다. 문제는 차이 자체가 아니라 차이가 조정된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정이 작동했다면 공동성명에는 원칙의 문장만이 아니라 완충의 문장도 있어야 했다.

평화공존은 대통령의 연설에만 있고, 정상외교 문서에는 대결의 언어가 선명하다면 그것은 이중 경로가 아니라 전략의 분절이다. 과연 관료정치의 결과라고 할 만큼 부처 간의 뜨거운 논쟁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EU이사회 본부에서 열린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즐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의 공동언론발표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안보라인은 지금 무엇을 조정하고 있는가. 정상회담 공동성명 문구가 한반도 정세에 미칠 파장을 사전에 검토했는가. 조선의 반응을 예상했다면 후속 메시지와 완충 장치를 준비했는가. 문안 작성에 한반도 정책 주무 부처의 판단은 반영되었는가. 안보실은 대통령 발언과 공동성명 사이의 정합성을 점검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문구 선택이 아니다. 이번 정부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의 기능 부전이다.

공동성명이 러시아나 조선과의 관계에 새롭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도 안이하다. 부담은 이미 발생했다. 조선은 곧바로 반응했다. 청와대는 이후 긴 안목으로 평화공존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겠다는 취지의 설명을 내놨다. 그 설명 자체가 관리해야 할 모순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외교안보는 선의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는다. "우리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말은 외교에서 가장 무력한 변명이다. 상대가 그렇게 읽을 것을 알 수 있었다면, 그렇게 읽히지 않도록 썼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공존은 좋은 말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공존은 적대적 현실을 부정하는 낭만이 아니다. 적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더 필요한 현실주의 전략이다. 상대의 언어, 인식, 반응, 체면, 명분을 냉정하게 계산해야 한다. 한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언어를 더 정교하게 관리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말은 곧 군사적 신호이고, 문구는 곧 위기관리 수단이다.

대안은 있었다. 북러 군사협력은 "심각한 우려"와 "관련 유엔 안보리 결의 준수 촉구"로 표현할 수 있었다. 핵문제는 NPT 원칙을 재확인하되 외교적 해결과 단계적 신뢰 구축의 필요성을 함께 넣을 수 있었다. 한반도 평화 문단은 의례적 지지 문구가 아니라 앞선 강경 문구를 완충하는 실질 문장으로 설계할 수 있었다. 모든 당사자가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를 자제하고 대화 재개의 여건 조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문장 하나만 있었어도 신호는 달라졌을 것이다.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위기를 키우지 않는 언어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평화공존을 더 크게 외치는 일이 아니다. 평화공존이 실제 외교안보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정상외교 문안에는 외교부의 관성만이 아니라 한반도 위기관리의 전략이 들어가야 한다. 안보실은 사후 해명이나 단순히 부처 간 문구 조율자가 아니라 대통령의 전략을 정책 문서로 번역하는 컨트롤타워여야 한다. 통일부는 한반도 문제가 걸린 외교 문안에서만큼은 배제되어서는 안 될 사전 조정의 핵심 부처여야 한다. 대통령의 말과 정부 문서가 따로 움직이면 평화공존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신뢰를 잃는다.

조선은 이번 공동성명을 두고 자신들의 판단이 맞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한국은 결국 적대와 대결을 체질화한 국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석될 문서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평화공존을 말하는 정부라면 상대가 악용할 문장을 줄이고, 위기를 완충할 문장을 늘려야 한다. 원칙 없는 평화는 위험하다. 언어 없는 원칙도 위험하다. 지금 한국 외교안보라인에 필요한 것은 강한 말이 아니라 정확한 말이다. 평화를 말하려면 평화의 문법부터 갖춰야 한다.

김동엽

김동엽 교수는 해군과 국방부에서 근무하다 지난 2011년 중령으로 예편했습니다. 국방부에서 북핵과 군사회담을 담당했고, 예편 이후에는 북한대학원대학교 민족공동체지도자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지금은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저술 및 연구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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