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문화재 협상, '반환' 아닌 '인도'에 수량도 적었는데…"최선 다했다"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번외편 ⑧ 한일회담에서 돌려받지 못한 문화재는 무엇이 있었을까?

돌려받지 못한 문화재 ①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

첫째,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이다. 경상남도 양산시 양산면 북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6세기경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고분으로 추정된다. 직경 23m, 높이 3m로 '양산 북정리 고분군' 18기 중 가장 큰 고분이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가 1920년 11월에 발굴했으며, 금동관, 금동신발 등 489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1927년 3월에 <양산부부총과 그 유물>(梁山夫婦塚と其遺物)을 발행했는데, 이를 통해 발굴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양산부부총 발굴 후 유물들을 보관하다가 1938년 3월에 도쿄제실박물관에 기증했으며, 현재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 ⓒ 도쿄국립박물관 홈페이지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이 여러 차례 언급하며 강하게 반환을 요구한 문화재 중 하나가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이다. 제4차 회담 직후 일본 측이 106점의 문화재를 인도할 때 489점의 문화재 목록을 전달했는데, 이 목록이 바로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 목록이었다. 한국 측은 489점의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에 대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유물'로 생각했다. 외무성은 이 유물을 한국 측에 건넬 유물로 고려하고 있었지만, 문화재보호위원회가 반대했다.

일본 측은 도쿄국립박물관의 동양관 개관을 위해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며 제7차 회담에서 일본 측이 제시한 인도 품목에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을 제외했다. 한국 측이 이를 포함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최종적으로 인도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489점의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 중 한 점도 돌려받지 못했다.

한편 양산시에서는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 반환을 위해 2007년에 '양산 유물 환수 운동 추진위원회'가, 2021년 4월에는 '양산 성황산 부부총 문화유산회복 추진위원회', 2022년 12월에는 '성황산 출토 유물 환수위원회'가 설립되었다. 2024년 11월에는 양산역사문화진흥원가 양산부부총 유물 장기 임대 및 반환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돌려받지 못한 문화재 ② 이천 오층 석탑, 평양 율리사지 오층 석탑

둘째, '이천 오층 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오층 석탑'이다. 두 석탑은 높이 6.48m, 3.86m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 오층 석탑은 경기도 이천 읍내면의 이천 향교에, 평양 율리사지 오층 석탑은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의 율리사지에 있었다. 현재 두 석탑 모두 도쿄의 오쿠라 호텔(ホテル·オークラ)이 소장하고 있다.

이 탑들을 반출한 자는 오쿠라 가하치로(大倉喜八郞)이다. 그는 오쿠라 재벌(大倉財閥)로 불릴 만큼 유명한 사업가였다. 그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부산에 들어와 무역업을 했고, 이후 덕수궁 석조전, 조선총독부 청사 등 대규모 건설 공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조선에서 많은 유물들을 수집하기도 했는데, 경복궁에 있던 자선당(資善堂)을 통째로 가져가기도 했다. 1909년에 일본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오쿠라 슈고칸(大倉集古館)을 세웠고, 1918년경에 이천 오층 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오층 석탑을 일본으로 가져가 오쿠라 슈고칸 정원에 놓았다.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의 반환 청구 목록에 이천 오층 석탑은 '유물명: 오층공양탑, 출토지: 경기 이천군 향교 앞 폐사지 오층탑, 소장자: 오쿠라 슈고칸, 비고: 다이쇼 8년 1월 27일 조선총독부 기증'으로 되어 있다. 평양 율리사지 오층석탑은 '유물명: 폐 율리지 팔층 석탑, 소장자: 오쿠라 슈고칸'으로 되어 있었다.

한편 '이천 오층 석탑 환수추진위원회'가 2008년에 설립되어 이천 오층 석탑 반환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평양 율리사지 오층 석탑은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가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과 협력하여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반환 활동을 펼친 적이 있다.

돌려받지 못한 문화재 ③ 오구라 컬렉션

셋째, 오구라 컬렉션이다. 오구라 컬렉션은 '조선의 전기왕'으로 불렸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수집한 유물들을 말하며,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오구라 컬렉션에는 고고자료 580점, 조각 49점, 금속공예 130점, 도자기 152점, 칠공예 44점, 서적 36점, 회화 94점, 염직 25점 총 1,110점이 있으며, 이 중 1,030점이 조선에서 반출한 유물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대구를 거점으로 전기 사업을 하면서 큰 부를 일구는 한편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수많은 유물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일본 패전 후 수집한 문화재 중 일부는 대구에 기증하거나 대구 저택 지하실에 숨기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지인에게 맡기거나 밀항선에 싣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8년에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하여 유물들을 관리하는 한편 생계를 위해 일부 유물을 팔기도 했다. 1964년에 그가 사망한 후 아들이 오구라 컬렉션을 관리하다가 1981년에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칼럼 제2부 ⑤, ⑫ 참조). 오구라 컬렉션에는 국보와 보물급에 해당하는 문화재가 다수 있다.

▲ 오구라 컬렉션. ⓒ 도쿄국립박물관 홈페이지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이 제출한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 중 일본정부가 지정한 문화재가 대상인 '제4항 오구라 다케노스케 소장품 및 그 외'와 개인 소유 문화재와 석조 미술품이 대상인 '제5항 그 외'에 모두 오구라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측은 개인 소유 문화재 반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는데, 그중 오구라 컬렉션을 가장 많이 언급했으며, 일본 측도 내부적으로 "한국 측이 특히 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오구라 컬렉션 중 약간의 것을 정부 매입 또는 오구라씨의 자발적 의사를 통한 기증"을 검토하기도 했다(칼럼 제2부 ⑭ 참조).

이를 보면 한국 측이 당시 오구라 컬렉션을 얼마나 돌려받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측은 개인 소유 문화재는 인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계속 반환을 거부했고, 결국 오구라 컬렉션은 한 점도 돌려받지 못했다.

이후 2014년 11월에 문화재제자리찾기의 오구라 컬렉션 반환 소송 제기, 2019년 2월에 한국 국회에서 오구라 컬렉션 반환 촉구 결의안 발의와 같은 활동이 있었고, 2025년 8월에는 '오구라 컬렉션 환수위원회'가 출범하여 오구라 컬렉션을 반환받기 위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한일회담의 문화재 협정을 통해 한국이 인도받은 주요 문화재와 인도받지 못한 주요 문화재에 대해 살펴봤다. 한국이 인도받은 문화재의 수량은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요구한 수량에 비하면 적고 '반환'이 아니라 '인도'가 되었다는 점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문화재 반환 교섭에 전문위원으로 직접 참가했던 황수영이 "나 나름으로 우리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은 분명하게 할 수가 있다", 이홍직이 "반환 문화재는 일본 측에서 준 것을 그저 받아 온 것이 아니고 한 점 한 점 전취(戰取)해온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봤을 때 당시 한일회담 상황에 비춰보면 최선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현실적인 결과를 얻어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한일회담 관련 한국정부 외교문서 및 일본정부 외교문서

문화재청, <한·일협정 반환문화재 자료집>, 2005.

도쿄국립박물관 홈페이지

불교방송 및 불교뉴스 홈페이지

<미디어 붓다>

엄태봉 강원대학교 교수

엄태봉 교수는 문화재 반환 문제, 강제동원문제,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인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문가다. 역사인식문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 <교과서 문제는 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일본 '영토·주권 전시관'의 영토 문제 관련 홍보·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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