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1990년 6월,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남편이 없고 아기는 아빠가 없으니, 아기를 포기하는 것이 너도 아기도 사는 길이다." 하지만 그때 내게 필요했던 것은 아이를 빨리 데려갈 사람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살아낼 수 있도록 곁에 남아줄 어른들 이었다. 그리고 2026년 현재도 '입양 대상 아동'이라고 사회가 분리해 버린 아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빠른 부모가 아니라, 가장 안정적으로 곁에 머물 수 있는 어른이다.
최근 '애착의 골든타임' 담론이 지나치게 단순화되면서, 결연 이후 임시 양육과 법원 허가 절차를 더 신속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결연만 이루어지면 그 이후의 시간은 불필요한 행정 지연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연 이후의 시간은 단순한 대기 기간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와 예비 입양 가정이 실제로 서로 결속할 수 있는 관계인지 확인하는 과정인 동시에, 친생부모에게는 자신의 결정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가 자기 가족 곁에 머물 가능성이 정말로 모두 검토되었는지를 사회가 다시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입양 담론은 그 시간마저 '효율화'의 이름으로 압축하려 하고 있다.
물론 안정적인 양육 환경을 빠르게 제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중요하다. 실제로 보호 가 필요한 아동은 존재하며, 입양은 어떤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보호 체계가 될 수 있다. 많은 입양부모들 역시 아이를 사랑으로 기다려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 에, 이제는 조금 더 깊은 질문 앞에 함께 설 필요가 있다. 행복한 입양 사례가 존재한다는 사 실과, 분리 이전의 지원 부족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다만 입양 이후 아이가 안정적으로 성장했다는 결과만으로, 그 이전의 분리 과정 전체가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결과'가 '정당한 절차'를 사후적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동권리협약과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이 한결같이 강조해 온 원칙은 분명하다. 아동에게는 자신이 태어난 가정에서 자랄 권리가 우선하며, 입양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 비로소 고려되는 보호 조치라는 것이다. 즉, '아동 최선의 이익'은 입양 절차의 속도가 아니라, 분리에 앞서 원가정이 충분히 지원받았는가에서부터 시작되는 질문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입양 대상 아동'이라고 분류한 아이를 가능한 한 빨리 새로운 가정에 보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입양 대상 아동인 것이 아니다. 사회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과정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왔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 앞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합리화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정말 아동 중심이라면, 먼저 왜 그 아이가 자기 가족 곁에 머물 수 없었는지를 끝까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입양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만난 아이'를 더 쉽게 상상해 왔다. 그러나 그 이전에 존재했던 '지원받지 못한 가족'에 대해서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그 순간 단 한 마디도 보탤 수 없었던, 가장 연약한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 있는가.
아이는 엄마의 심장 소리와 체온, 감정의 리듬을 들으며 세상에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 장 원초적인 관계의 분리를 너무 쉽게 이야기해 온 것은 아닐까. 임신 중단을 하지 않고 힘겹게 아이를 지켜온 여성이, 결국 자신의 아이와 분리되어야 하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대체로 출산한 아기를 떠나보내는 엄마들 뒤에는, 임신한 여성과 자신의 아 이를 먼저 떠난 남성들의 부재가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 구조를 묻기보다, 마지막에 홀 로 남겨진 여성에게만 책임을 집중시켜 왔다.
그렇게 남겨진 출산 직후 여성의 몸과 마음은 가장 취약하다. 신체 회복도 끝나지 않은 상태 에서 극심한 수면 부족과 호르몬 변화, 경제적 불안, 관계 단절, 사회적 낙인을 동시에 견뎌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태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너무 쉽게 "동의"라고 불러왔다. 정말 그것은 충분히 자유롭고 안정된 상태에서의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낸 절박함 속에서 가까스로 밀려난 결정이었는가. 자발적 동의란 단지 서명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지를 실제로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친생모들은 아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지킬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먼저 외면당하고 포기당했다.
입양 동의 서류에 서명하는 순간 행정 절차는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친생모의 시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어머니들은 수십 년 동안 아이의 생일을 홀로 기억하며 살아간다. 사회 는 입양을 '가슴으로 낳은 행복'으로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입양은 친생모에게 '가슴을 도려낸 상실'이다. 그리고 그 상실은 언젠가 아이에게도 같은 무게로 되돌아온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자신을 낳았는지를 알 권리는 모든 아이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사회의 낙인 속에서 양육보다 분리가 더 현실적인 선택이 되도록 만든 것은 과연 누구였는가.
그 아이는 왜 자기 가족과 분리되어야 했는가. 그 어머니는 정말 아이를 포기하고 싶었던 것인가. 국가는 그 가족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해 보았는가. 우리는 분리를 결정하기 전에, 분리하지 않을 가능성을 끝까지 모색해 보았는가.
신중함은 비효율이 아니다. 그것은 한 아이의 삶과 한 가족의 미래 앞에서 사회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고, 기꺼이 가슴을 열어 보 금자리가 되기로 결정한 입양부모들 역시 그 온 마을에 속한 어른들이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 한 것은 속도를 둘러싼 단순한 찬반이 아니라, 왜 한 아이와 가족이 서로를 잃어야 했는지를 함께 질문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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