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후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건 처음이에요"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로봇이 도착하기 전에 물어야 할 것들

기술이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는 현장

돌봄 현장에서는 기술이 사람보다 먼저 와 있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된다. 일본의 여러 요양원에서 수백억 엔을 들여 들여온 돌봄 로봇 상당수가 창고에 보관된 채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와 언론을 통해 몇 년 전부터 반복적으로 보고되어 온 일이다. 결함이 있는 제품이어서가 아니었다. 실험실에서는 문제없이 작동하던 로봇이, 실제 요양원의 좁은 복도와 어수선하게 놓인 침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는 노인의 일상 앞에서는 끝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로봇의 상태를 점검하고 오류에 대응하는 새로운 업무가 현장 종사자들의 몫으로 추가되면서, 기술이 노동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또 다른 노동을 만들어내는 역설이 벌어졌다.

이 어긋남은 왜 반복되는 것일까. 답은 사실 그리 복잡하지 않다. 기술을 먼저 완성해 현장에 들여놓고, 사람에게는 그저 "이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할 것인가"만 묻는 순서로 일이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순서가 바뀌지 않는 한, 창고에 쌓이는 로봇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왜 순서는 늘 뒤집혀 있는가

이 구조가 반복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기술을 개발하는 주체와 기술을 실제로 사용하는 주체가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업과 연구자는 기능을 먼저 설계하고, 노인과 현장 종사자는 완성된 제품 앞에서 수용 여부를 판단하는 후순위 존재로 배치된다. 성과 측정 역시 '몇 대를 도입했는가'에 맞춰져 있어서, 정작 '그 기술이 한 사람의 일상에 얼마나 지속적으로 자리 잡았는가'는 좀처럼 따지지 않는다. 도입이 끝나는 순간 프로젝트도 끝나는 구조 안에서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술이라 해도 현장에서 표류하기 쉽다. 문제는 기술의 완성도가 아니라, 기술이 놓이는 순서인 것이다.

순서를 바꿔봤더니…

2025년 우리는 그 순서를 뒤집어보는 실험을 했다. '에이징 세이지(Aging Sage)'라 이름 붙인 시뮬레이션으로, 고가의 장비는 전혀 없다. A3 한 장의 캔버스와 색색의 스티커, 몇 장의 카드가 전부다.

참가자는 먼저 자기 나이부터 100세까지 이어지는 시간축 위에, 신체·정신·사회 활동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를 스스로 그려본다. 70세의 꿈, 80세의 버킷리스트, 90세에도 놓지 않고 싶은 무언가를 직접 손으로 적어가면서, 동시에 그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꺼내어 놓는다. 기술은 이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야 맨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AI 비서, 스마트홈, 돌봄 로봇, 보조기기 같은 것들이 카드 형태로 책상 위에 올라오면, 참가자는 자기가 방금 적은 문제 위에 필요한 기술 카드를 직접 골라 붙인다.

같은 해 3월부터 10월까지 101명의 응답을 분석한 결과, 기술 시연도 제품 홍보도 전혀 없었는데도 "내 노후에 이 기술을 써보고 싶다"는 사용 의도가 5점 만점에 4.23점으로 높게 나타났다. 사용 의도를 결정한 것은 기술의 스펙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이 얼마나 쉽고 긍정적인 경험이었는가 였다. 자기가 직접 그린 삶의 지도 위에 기술이 얹히는 순간, 그 기술은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것을 숫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참여를 마친 한 60대 여성이 캔버스를 들고 남긴 말이 이를 가장 잘 압축한다.

"내 노후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건 처음이에요."

국제학계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이 문제는 우리만의 고민이 아니다. 지난 3월 밴쿠버에서 열린 국제제론테크놀로지학회 세계대회는 'Empowering Aging with Gerontechnology'를 주제로 내걸었지만, 개회 첫날부터 학회는 이 표현이 수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역대 회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원탁회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는 '증거'와 '일상'이었는데, 그 안에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자기반성이 담겨 있었다. 수십 년간 이 분야가 발표해 온 수많은 시제품과 파일럿 연구가, 실제 노인의 하루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비율은 안타까울 정도로 낮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기술 개발의 속도를 높이자는 쪽이 아니라, 기술이 실제 삶 속에 안착하는 과정 자체를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순서를 바꾼다는 것의 의미

기술 도입의 순서를 바꾸는 것은 단순한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의 필요가 기술 설계의 출발점이 되는가, 라는 선택의 문제이고, 그 선택이 쌓이면 돌봄의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 기술을 먼저 완성하고 사람을 나중에 부르는 구조 안에서는, 정작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흐려지기 쉽다. 반대로 한 사람의 삶을 먼저 펼쳐놓고 기술을 그 위에 얹는 순서를 택할 때, 기술은 비로소 그 사람의 필요에 복무하는 수단이 된다.

돌봄 로봇을 창고에서 꺼내고 싶다면, 먼저 그 기술이 놓일 사람의 삶을 펼쳐야 한다. 캔버스는 아직 비어 있고, 그 위에 맨 먼저 올라앉아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 '에이징 세이지(Aging Sage)'라 이름 붙인 시뮬레이션. ⓒ최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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