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이름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를 철저히 억압받고 패배한 자들을 통해서만 구성 가능한 것으로 바라봤다. 역사의 기록으로부터 지워진 존재들, 진보라는 이름 아래 가리워지고 배제된 존재들의 기억과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는 절대 승자의 역사와 같을 수 없다. 일관되게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서사가 아닌, 의심하고, 단절되어 있으며, 불완전한 파편들로 이뤄진 기억이 하나의 성좌(constellation)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벤야민이 주장한 역사가 될 수 있다. 주류의 언어를 가질 수 없는 자들의 언어는 때로 역사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논리와 이치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법과 도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역사는 거부당하고 외면당한다. 벤야민의 주장대로라면 역사가는 이러한 외면당한 조각들을 현재로 불러내 모으는 자다. 승리자의 서사에 지워진 과거의 기억들을 현재로 불러와 구원하려는 비판적 인식이야 말로 역사의 핵심 요소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만약 역사를 빼앗긴 자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역사가가 그들의 기억을 성좌로 구성할 수 없게 된다면, 억압당한 자들의 시간들은 어떻게 역사가 될 수 있을까? 기억의 주체를 피해자가 아닌 역사가로 상정한 벤야민의 역사관 속에는 기억의 당사자들에 대한 의지가 대상화되어 있다. 아픈 기억일수록 트라우마로 각인된다. 사태를 직접 겪어낸 당사자들에게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때로 그 자체로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기억을 소유한 자의 2차 고통을 외면할 순 없다. 제주 4.3 사건을 현재의 서사로 재구성한 <내 이름은>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1948년, 제주 땅에 벌어진 역사적 비극을 역사가의 시점이 아닌 피해 당사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려는 노력, 입밖으로 꺼낼 수 조차 없는 집단적 비상사태 속에서 고통에 신음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으려는 의지가 <내 이름은>에 담겨 있다.
영화는 4.3 사건이 발생한 1948년과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1980년, 그 둘의 시간을 엮어내는 영화적 현재로서의 1998년과 영화가 상영되고 관람이 이뤄지는 2026년으로 시간대를 구분 짓는다. 트라우마가 발생한 1948년과 1980년을 대면하기 위해서 1998년과 2026년은 반드시 필요한 완충지대다. 1948년의 폭력을 트라우마로 간직한 정순(염혜란)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만 봐도 의식이 혼미해진다. 그녀의 공황 상태를 외면하고 관객을 직접 1948년의 시간 속으로 잡아 끄는 것은 정순에게도, 관객에게도 또 다른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 트라우마는 준비없이 대면하면 또 다른 트라우마를 남기는 법이다. 감독은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세 개의 시간 속에서 정순이란 인물의 기억을 중층적으로 재구성해낸다. 4.3 사건이 발생한 1948년은 모든 사건의 종착지이자 비극의 시작점이다. 그 시간 속엔 이름을 잃어버린 정순의 기억과 친구에 대한 죄책감이 묻혀있다. 손 쉽게 파묘할 수 없는 기억의 무덤을 딛고 일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1980년은 두 번째 트라우마를 안긴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의해 희생당한 딸의 남자친구이자 손자의 아빠, 손자인 영옥을 낳다 세상을 떠난 딸, 그런 딸을 지키지 못해 고통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남편, 1948년과 같이 그녀만 남기고 모두가 떠난 시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손자를 아들로 맞아들인다. 이 모든 사실이 1998년의 시간 속에서 밝혀질 때 그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두려움은 과거로부터 밀려오는 진실의 기억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감정이다. 그 감정을 50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해준 정신과 의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서 <내 이름은>은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며 서사의 방향성을 선회한다. 정순을 치료한 정신과 의사가 영옥을 통해 폭력을 지휘했던 경태(박지빈)의 어머니란 연쇄 고리. 이로서 이 작품이 지시하는 방향은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사회적 작용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서로의 아버지가 죽고 죽였던 관계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 자녀들은 부부가 되어서 제주 땅을 살아간다. 영옥의 친구인 소영의 부모들이기도 한 그들은 서로에게 아버지의 죽음과 책임을 묻지 않고 현재를 살아간다. 부모를 사살하고 자신에게 이름을 준 친구마저 총살한 자가 자신의 아버지가 되었단 사실을 정순이 받아들어야 한다고 그 누가 강요할 수 있을까? 고통 속에 있는 자와 그 곁을 지키는 자, 책임이 있는 자와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 사이의 관계는 긴 역사 속에서 뒤엉키고 회절(diffraction)된다. 폭력의 역사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선명하게 가르지 않는다. 과거의 유대인과 현재의 이스라엘의 관계처럼, 폭력의 주체는 이양되고 전이된단 사실을 우린 이미 경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 이름은>은 폭력이 국가와 자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국가 폭력에 의한 1948년의 4.3 사건과 1980년의 민주화운동은 한 개인의 힘으로 손쉽게 벗어나거나 피할 수 없었던 비극이었다. 역사가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오롯이 이들의 몫이다. 반면 1998년은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국민의 정부로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폭력의 흔적들은 교사의 모습 속에서, 학생들의 관계 속에서 관찰된다. 그림을 그리는 영옥과 달리 그림을 반에 걸지 못하게 만드는 담임 황철광(허동원), 강자 힘에 굴복하며 권력의 파벌을 구성하는 정환(정승훈), 그들의 폭력 앞에 그저 복종하며 몰려다니는 반 학생들의 모습 속에 민주화의 일상은 엿보이지 않는다. 부대장이 정순의 부모를 그녀를 거둬들였다 해서 그의 죄값이 사라지진 않는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가 남편의 아버지를 살해했단 사실을 딸은 평생의 죄책감으로 품고 살아가는 것처럼, 영옥을 꼭두각시 삼아 반의 권력을 장악한 경태의 죄값이 정순의 고통을 치유하는 어머니를 통해서 용서받을 순 없다.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손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는 난처함, 그럼에도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의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입장 사이에서 트라우마의 역사는 성좌로서 구성된다. 억압받는 자들의 기억을 역사화 한다는 것은 이러한 모순을 그 자체로 품어 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정순은 학살이 벌어진 보리밭에서 마지막으로 춤을 춘다. 그녀의 손에 잡힌 한 줌의 흙이 바람에 흩어지는 순간 바람은 더 이상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고통의 촉매제가 아니다. 그 모래에 섞여 있을 희생자들의 육신이 공기에 뒤섞이며 호흡이 됨으로서 그녀는 과거의 고통을 몸 속으로 품어내는 역사의 천사가 된다. 벤야민에게 역사의 천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그 앞에 끊임없이 쌓여가는 폐허를 바라보는 자다. 국가 폭력 앞에 희생되었던 자들의 한이 서린 잔해들을 복원하려는 자, 하지만 진보라는 이름의 폭풍에 떠밀려 끊임없이 미래로 멀어져가는 자의 애통함이 정순의 마지막 몸짓에 서려있다. 어쩌면 고통받는 자들의 역사란 그런 것 아닐까?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역사가의 위치가 될 수도 없고, 기억을 극복하거나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행동을 할 수도 없지만, 그저 고통의 땅 위에서 눈물 흘리며 애도하는 것. <내 이름은>이 그려내는 억압받는 자들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풍경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