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한 말의 세계에서, 말의 속도가 능력처럼 오해되는 세계에서, 어떤 목소리는 너무 쉽게 배경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나 의사소통은 선택 가능한 편의가 아니라 존엄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느리거나 낯설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덜 중요해지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책 서문에서)
'소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는 장면을 연상한다. 생각과 감정을 목소리에 실어 전하는 일은 많은 이들에게 자연스럽고 익숙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소통의 방식이 어떤 이들에게는 오히려 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벽이 되기도 한다.
2023년 기준 한국의 등록 장애인은 약 263만 명이며, 이 가운데 지적장애, 자폐성장애, 뇌병변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를 지닌 인구를 합치면 100만 명을 넘는다(보건복지부, 2023 등록장애인 현황 통계). 장애 등록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노인성 신경계 질환 인구까지 고려하면 구어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인구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의사소통의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소통의 영역에서 배제된 채, 사회에 참여하는 데 크고 작은 제약을 안고 살아간다.
이처럼 구어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말을 대신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나 방식을 보완대체의사소통(Augmentative Alternative Communication, 약칭 AAC)이라고 한다. NC문화재단은 보완대체의사소통 어플리케이션 '나의AAC'를 개발하여 무료 배포하고 AAC 교육, 현장 지원, 학회 및 공모전 후원 등 다양한 AAC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작년엔 언어치료 프로그램 지원 사업을 통해 인연을 맺은 장애 당사자, 언어재활사, 보호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말하지 않아도>(2025, 신이명 연출)을 제작하고 동명의 연계 전시에서 상영회를 열었다. 그리고 올해 3월 그간의 여정을 총망라하는 AAC 도서 <말하지 않아도>를 출간했다.
<말하지 않아도>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소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기반 아카이브 북이다. 이 책은 AAC(보완대체의사소통)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기 시작한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로 다른 신체적•인지적 조건을 가진 주인공들은 언어치료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전달하는 방법을 배워 간다. 말 대신 그림 상징을 고르고, 기기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며, 타인의 반응과 상호작용 하는 경험은 단순한 치료를 넘어 '관계 맺기'의 과정으로 확장된다.
<말하지 않아도>가 특별한 이유는 AAC 이론 설명 위주의 딱딱한 형식에서 벗어나, 실생활에서 보완대체의사소통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점에 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도서는 1장에서 AAC의 개념과 종류를 설명한 뒤 2장과 3장에서 언어재활사, AAC 기술 개발자, AAC 사업 담당자, 장애 당사자의 가족 등을 인터뷰하며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보완대체의사소통에 대한 고민과 도전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AAC가 일반화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의 사용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보호자들의 개입도 반드시 필요하고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보호자가 AAC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기본 생활만 유지하려 해도 손 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태블릿까지 가지고 다닌다는 게 사실 어렵거든요. 그래서 보호자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대상자가 상호작용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합니다. (책 본문에서)
이 책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한다. 느리고 반복적인 시도, 때로는 멈추고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소통은 조금씩 형태를 갖춰 간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기술의 습득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기다림이다. 또한 이 책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말이 없어도 마음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말하지 않아도>는 특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소통'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록이다. 말이 아닌 방식으로도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책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