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필수의료 강화 지원 및 지역 간 의료격차 해소를 위한 특별법'(이하 지역필수의료법)이 제정됐다. 한국 사회에서 각자도생에 맡겨진 채 붕괴의 길을 걷던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에 정부가 관심을 갖고, 법을 통해 이를 지원할 정책을 추진해 나간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특히 이번 특별법에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물적토대인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가 포함돼 연간 약 1조 1000억 원 규모의 재원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었다.
지역필수의료법은 법 제정 후 1년 뒤인 2027년 3월 11일 시행 예정이지만, 특별회계는 이보다 앞선 내년 1월부터 집행될 예정이다. 8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지만 결코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문제는 현재 시점에서 특별회계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가 사실상 부재하다는 점이다.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와 관련된 사업 구상과 관련해서 정부는 시·도와 권역책임의료기관이 공동으로 사업을 기획·집행하는 상향식 구조를 표방하고 있으나, 급박한 일정과 기술지원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는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방정부에 전가하는 방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시·도가 5월까지 사업안을 제출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지방정부는 실패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기존 사업을 단순 반복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책의 혁신성을 제약하고, 특별회계가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지 못할 위험을 내포한다.
중앙정부가 놓인 상황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현 정부는 지금까지 경제성을 빌미로 외면해왔던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에 예산을 투입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만약 예산 배분 기준이 여전히 경제적 효율성과 단기적 성과에 기반한다면, 기존과 다른 정책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는 지역필수의료법 제9조에서 규정하는 '성과평가'와도 연결된다. 성과평가를 바로 자체충족률이나 사망률 감소 등과 같은 결과지표 중심으로 운영하고 그 결과를 다시 예산 분배에 반영한다면, 이는 취약지역이 많은 지역, 구조적으로 불리한 지역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어 지역 간·지역 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무분별한 경로의존성을 벗어나 실제로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의 위기를 타개하는 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위기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지켜야 할 원칙을 먼저 수립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고착화된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의 위기는 수도권 집중과 의료의 영리화로부터 기인한다. 한국은 수도권에 모든 사회경제적 인프라와 인구가 집중되었고 이는 의료자원과 의료인력의 집중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시장을 중심으로 공급되는 의료서비스는 이윤 추구의 수단이 되었고, 이는 의료분야 내부의 불평등을 야기함으로써 필수의료분야의 공백을 발생시켰다.
현재의 위기는 체제 차원의 구조적 원인으로부터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는 현 체제의 지배적 가치인 경제성 논리를 뛰어넘는 예산 분배가 필요하다. 경제성이 부족하여 소멸한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에 경제성의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일이다. 의료공백이 발생한 지역의 공공병원 설립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번번이 무산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이는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에 있어 예비타당성조사 면제가 반드시 수반돼야 하는 이유이다.
지역의료와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준의 분배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사회의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가도록 사회의 기본 구조를 짜야 한다는 존 롤스의 '최소극대화의 원칙(maximin principle)'을 고려한다면, 지역주민의 건강상태가 가장 열악한 지역, 의료 인프라가 부족하거나 부재한 지역을 우선하여 예산을 배분하게 될 것이다.
또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는 '공공성 강화'의 메세지를 포함해야 한다.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의 붕괴는 보건의료체계가 '이윤'이 아닌 '공공성'을 핵심가치로 삼을 때 그 흐름이 바뀔 수 있다. 이에 공공의료 확충에 예산을 우선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물론 공공의료기관 비중이 5%에 불과한 현실에서 민간의료기관의 참여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단순한 재정 지원이 아니라, 필수의료 제공에 대한 공적 책무를 부과하는 협약 구조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특별회계는 민간 중심 의료체계에 재원만 보충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에는 주민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의 붕괴는 실제 주민의 구체적인 고통 문제다. 주민들이 의료공백 속에서 어떠한 고통에 놓여있는지 귀기울이고, 주민의 관점에서 나아가야할 방향을 수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업 기획과 우선순위 설정 과정에 주민들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하며, 동시에 기초지자체의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 실질적인 문제는 시군구 수준의 생활권에서 발생하며, 기초지자체는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책무를 갖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역의료와 필수의료를 회생시키기 위한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모두 제자리 걸음을 반복했다. 가까스로 얻어낸 물적 토대인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 또한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보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주목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가 취약한 지역과 필수의료를 보호하고, 사회 구성원 누구나 거주 지역과 관계없이 필요한 의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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