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에 모인 세계 성평등 전문가들의 고민 "어떻게 남성성을 재구성할 것인가"

[기고] 제70회 유엔 여성지위위원회 참관기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 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는 전 세계 성평등 증진과 여성 권익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산하의 기능위원회다. 매년 3월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리며, 전 세계 정부 대표와 시민사회(NGO)가 모여 성평등의 글로벌 표준을 만들고 이행을 점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성평등 국제회의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설립된 이래 70회를 맞이한 이번 CSW70은 '모든 여성과 소녀를 위한 사법 접근성 보장 및 강화'를 주제로 3월 9일부터 20일까지 총 12일간 진행되었다. 남성과 남성성을 의제로 활동하는 페미니즘 활동 단체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의 참관기로 현장의 목소리를 전한다.

지난 3월 제70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70)가 열린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일대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성평등 활동가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각국 정부 대표들이 모여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가 가장 큰 주목을 받지만, 동시에 전 세계 시민사회 단체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는 NGO 포럼도 동시에 진행됐다. 수천 명의 활동가가 유엔 본부 인근의 행사장들에 모여 각국의 성평등 현안을 공유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연대의 장이었다.

동시에 글로벌 백래시(Backlash)의 모습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유엔 본부 일대에서 열린 행사 'CSWF'(Commision on the Status of Women and Family)는 마치 성평등을 논의하는 회의 같지만, 실상은 '가부장제는 존재하지 않고 남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들은 CSW의 이름 뒤에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추가해, '정상적'인 가족의 회복을 위해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부정하는 세션도 거리낌 없이 주최하고 있었다.

성평등에 대한 반발은 더 이상 특정 국가만의 상황이 아니다. 이를 증명하듯 CSW70 NGO 포럼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진 키워드는 '글로벌 백래시'와 '남성성의 재구성'이었다. 전 세계 여성인권 단체들이 주최하는 세션들을 통해 성평등에 대한 강한 반발은 전 지구적 현상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의 변화를 어떻게 모색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3월 9일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70) 개회식이 열린 가운데 전 세계 여성인권 단체 활동가들이 별도로 마련된 회의장에서 참관하고 있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남성성, 가족, 그리고 폭력 예방

이번 포럼 세션 중 하나는 남성과 소년을 성평등의 주체로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세계적인 연구·활동 기구 '에퀴문도'(Equimundo)가 주최했다. 이 세션에서는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제도화돼 불평등을 만드는지,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전환이 필요한지를 다뤘다. 남성이 가사노동과 돌봄에 참여하는 것이 단순히 여성을 돕는 차원을 넘어, 젠더 폭력을 예방하고 성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주요한 행위라는 점이 특히 강조됐다.

튀르키예 가족사회복지부 장관은 여성인권단체 카뎀(KADEM)의 실증 연구를 인용해 아버지의 능동적인 가정생활 참여가 증가할수록 가족 내 신뢰의 분위기가 강화되고 자녀의 발달이 긍정적으로 지원된다고 언급했다. 튀르키예는 이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026-2035 가족 및 인구 비전'을 수립하여 가족 내에서의 책임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을 국가적 목표로 삼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군인과 법조인 등 다양한 직군의 종사자를 대상으로 인식 개선 교육을 실시하고 폭력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담은 법안을 통해 남성성 재구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전체 세션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점으로 언급된 것은 청소년기 소년들이 마주하는 '구조의 공백'이었다. 한 발표자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스포츠나 예술처럼 함께 연결될 수 있는 건강한 구조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들은 혐오 세력에서 도움을 받는다"고 경고했다.

발표자의 경고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여성 혐오 문화를 먼저 접하는 한국의 남성 청소년들에게 우리 사회가 어떤 대안적 공동체를 제시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남성성과 사회규범을 주제로 열린 세션 현장의 모습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남성성의 재구성

다른 세션에서는 '남성을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가'를 넘어 가부장적 권력 구조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를 다뤘다. 남성을 단순히 폭력의 가해자나 교육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성평등한 세상을 함께 설계하는 '긍정적 변화의 주체'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주를 이뤘다.

특히 남성 스스로가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성찰하고 권력을 정의로운 방식으로 재배치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 많은 참여자들이 공감을 표현했다.

인도에서 온 어느 활동가는 남성 패널들에게 그들이 활동가가 된 개인적인 계기를 물으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남성 활동가들이 페미니즘을 수용하며 겪은 변화의 이야기는 다른 남성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한 남성 패널은 "남성성은 남성들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남성을 고립시키고 침묵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에퀴문도가 영국의 남성 청소년이 처해있는 상황을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를 인용했다.

패널이 인용한 보고서는 전통적인 남성성 규범을 강하게 내면화한 남성이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삶의 목적 의식은 2배 높게 나타나지만 동시에 지난 2주간 자해나 자살을 생각했을 확률은 3배나 더 높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청년 세대 전략 워크숍: 백래시 돌파하기

글로벌 백래시에 대항하는 실질적인 전략을 상상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전 세계적으로 거세지는 '반-권리(Anti-rights) 운동'에 맞서 청년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떻게 대항 전략을 만들 것인지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현재의 백래시 세력은 '가족 가치(Family Values)'라는 키워드를 무기화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도 공유했다. '가족 가치'는 가부장적인 정상가족 규범만을 유일한 정답으로 내세워 비혼 공동체나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삶의 형태를 배제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가족 가치'를 해치는 성소수자를 불법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관련 법안을 끊임없이 제정하려 시도하는 정치인들을 꼽을 수 있다.

참가자들은 혐오 세력이 선점한 '보호'와 '가족'이라는 프레임에 대응하기 위해, 페미니즘이 어떻게 우리 모두의 삶을 더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드는지에 대한 새로운 서사가 필요하다는 논의도 이어 나갔다.

참여자들은 변화의 핵심 대상으로 13~15세 사이의 소년들을 꼽았다. 해당 나이대는 남성 청소년들이 혐오 담론에 노출되기 가장 쉬운 시기인 동시에 평등의 감각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이기 때문이다. '알파 메일'을 자처하며 여성혐오적인 가치관을 전파하는 남성 인플루언서들의 콘텐츠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쉬운 연령대이지만, 반대로 성 고정관념이 완전히 고착되기 전이라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날 세션에서 한 활동가는 "반대 세력은 그들끼리의 전략을 공유하고 서로 협력하고 있다. 우리 역시 단순히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 반박하는 수준을 넘어, 돌봄과 평등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앞서 언급한 CSWF에서는 가족 권리 단체와 남성 권리 단체가 공동주최하는 세션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직접 세션에 참석하여 그들의 주장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성평등 활동가들 또한 일주일 내내 분주히 움직였다.

▲하인리히 뵐 재단의 ‘성평등과 민주주의 글로벌 유닛’이 주최한 세션에 인도, 튀니지, 튀르키예의 활동가들이 패널로 나섰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글로벌 백래시 속에서 성평등 활동가의 건강과 저항 유지하기

독일의 하인리히 뵐 재단의 주최로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고립되지 않고 지속가능하게 운동을 이어나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세션도 열렸다. 하인리히 뵐 재단은 독일 녹색당 유관 재단이자 전 세계 시민사회와 연대하며 성평등, 민주주의, 생태적 가치를 확산하는 국제 재단이다.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멜리나(Melina)는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세력이 주도하는 안티 젠더 운동이 국가간의 경계를 넘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며 "퀴어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단순한 혐오를 넘어 권위주의 정권이나 민족주의와 결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활동가 개인의 희생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키는 집단적 돌봄(Collective Care)이 정치적 저항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평등 운동에 대한 뼈아픈 조언도 나왔다. 한 패널은 로레타 로스(Loretta J. Ross)의 말을 인용하며 "반대 세력은 100% 일치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전략적으로 뭉친다. 우리 역시 작은 차이로 서로를 비난(Call-out)하기보다, 공통점을 찾아 서로를 불러들이는(Call-in) 지혜가 필요하다"고 발언하며 연대의 가치를 강조했다.

연대로 써 내려갈 새로운 대본

뉴욕에서 확인한 성평등의 현주소는 엄중하면서도 희망적이었다. 백래시는 국경을 넘어 조직적으로 밀려오고 있더라도 그에 맞서는 연대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따뜻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몸담은 단체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의 활동을 다시금 되짚어본다. 가부장제가 우리에게 쥐어준 낡은 대본을 과감히 버리고 서로를 돌보고 살피는 새로운 남성성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일.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정리하여 전세계의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 공유하고 더 많은 남성들을 만나 함께 변화를 만드는 일. 그것이 이번 CSW70이 남긴 가장 큰 숙제이자 지치지 않고 나아갈 새로운 동력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일주일 남짓한 여정에 함께 한 동료와 다짐을 나눴다. 더 많은 성평등 활동가들, 특히 동아시아 국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발굴하고 연결 짓자는 다짐을 말이다. 뉴욕의 찬 바람 속에서도 확인했던 연대의 온기가 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길 바란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