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지주를 의미하는 '만석꾼'은 호남에 많았다. 농본국가였기에 쌀 생산량이 곧 국력이었고 곡창지대였던 호남은 조선 경제의 젖줄이었다. 군량미도 호남에 의지했기에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고 한 것이다.
호남이 내리막길에 들어선 것은 산업화에서 낙오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부산, 포항, 울산, 구미, 창원에 산업단지들이 들어서면서 영남이 '수출 한국'을 이끌던 시기, 호남은 농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자리가 없었다. 결국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갔다. 깡패들마저 고향을 등졌다. 당시 지나가던 개도 돈다발을 물고 다녔다던 부산엔 영화 '친구'의 소재가 된 칠성파와 신20세기파 같은 큰 폭력조직들이 있었지만 호남 깡패들은 뜯어먹을 게 없었다. 그래서 1970~80년대 서울의 3대 조직폭력인 서방파, 양은이파, OB파 모두 호남출신이었다.
'대지주의 고장'이던 호남이 쇠락한 것은 산업화에 올라타지 못해 일자리를 뿜어낼 기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쇠락의 바람이 영남으로 넘어왔다. 대한민국 제2 도시라던 부산마저 '노인과 바다'의 도시가 됐다. 이들 지역에 미래가 없다는 현실을 상징하는 것은 지역 대학의 폐교·폐과다. 호남 지역 대학들이 폐교하더니 곧 영남의 대학들이 폐교했고 이게 경부선 타고 올라간다. 대학의 소멸은 지역에 청년도 없고 미래도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호남에 이어 영남도 무너져…청년도 없고 미래도 없다
'지방소멸'의 핵심은 청년 이탈이다. 대학 진학 때 수도권으로 가고, 대학 졸업하니 취업하러 떠나고, 전문직 여성들은 비슷한 소득의 신랑감이 없어 결혼하러 서울로 가고, 3040세대는 수도권에서 자영업에 도전하려 떠나는데 이제는 노부부마저 수도권 사는 자식들 성화에 고향 집 팔고 떠난다. 이렇듯 '지방 탈출'과 '수도권 집중'은 전 지역, 전 세대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1960년 244만이던 서울 인구는 1970년 552만을 거쳐 1992년 1097만 명으로 폭증했는데 이는 서울사람들이 밤낮으로 열심히 사랑해서 아이를 많이 낳았기 때문이 아니다. 지방의, 그중에서도 양질의 인구를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서울에 가야만 좋은 교육과 좋은 일자리가 있다. 여유 있는 집에서는 그래서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야 했다. 좋은 교육과 일자리를 독식한 서울의 '인재 수탈'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인재를 구할 남방한계선이 판교라느니 기흥이라느니 떠들어대는 '서울주의자'들의 한심함에 기가 찬다.
그들이 케이블카에 '올인'하는 이유
지방의 많은 지자체들이 케이블카, 스카이워크, 레일바이크를 만들려 한다. 판박이 같은 축제도 즐비하다. 어디서 성공했다 소문이 돌면 베끼기 바쁘다. 예산 낭비, 환경파괴라는 비난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괴산군은 기네스북 올리겠다고 5억원 들여 43톤짜리 거대한 가마솥을 만들었다가 무용지물이 돼 '세금낭비의 표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심하다. 이런 기사들의 댓글엔 조롱과 비아냥 풍년이다. 그럼에도 이들 지자체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욕할 거 없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기업, 좋은 일자리가 없으니 사람이라도 와서 지갑을 열어야 한다. 관광이다. 외지인들이 와서 밥이라도 먹고 잠이라도 자고 가야 동네 식당이 살고 그 돈이 지역에서 돌고 돈다. 그런데 쉽지 않다. 뭐라도 해보려고 없는 돈 쥐어짜서 전망대 하나 만들겠다는데 환경단체가 나타나 환경파괴다, 예산낭비다 하며 집회에 나선다. 시골 자치단체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욕하지 마라. 시골에 가면 서울대 나온 사람도 없고 제일기획 같은 마케팅 회사도 없다. 평생을 그 지역에서 살았던 공무원들이 다른 지역 성공 사례를 찾아 시도하는 것이다. 그걸 또 '베낀다'고 뭐라 한다. 그럼 성공한 걸 베껴야지 실패한 걸 베낄까. '먹고 죽을 쥐약도 없다'는 동네의 마지막 절규와도 같다. 이마저 비판하는 서울의 이른바 전문가들에게 영화 '친구'의 대사를 빌려 한 말씀 드린다. "니가 해라. 지방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지방을 향한 멸시와 조롱은 하나의 문화가 됐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조차 수도권에 거주하면 자기 고향을 편들기보다 몇억, 몇십억 원 짜리 사업 가지고도 '시골에 그게 무슨 소용'이냐며 멸시한다. 그렇다면 그 잘난 수도권의 예산 낭비를 살펴볼까? 용인경전철 1조 원, 우이신설선 9천억 원, 의정부 경전철 8천억 원, 인천공항 자기부상철도 4천억 원, 세빛섬 1천4백억 원, 월미은하레일 1천억 원. 멈춰 선 한강버스에 들어간 돈은 이미 1천5백억 원이 넘었고 앞으로 얼마가 더 들어갈지 모른다. 환경단체는 시골 산자락 전망대, 케이블카 반대에 그리도 열심이지만 환경파괴의 극치라 할 수도권 신도시 건설과 GTX 건설에는 참으로 관대하다. 자기들이 살고 이용할 거라서 그런 건가.
영호남 모두 '지방소멸'의 길에 들어섰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업이 없고 일자리가 없어 청년이 떠나기 때문이다. 최근 경북 영덕 주민들은 원전이 들어서는 것에 찬성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왜? 보상금 받고 떠나려고.
해법은 기업, 교통, 학교…'서울 독식,' '지방 수탈' 면허증 예비타당성 조사 없애야
해법을 논할 때다. 문제는 정부의 정책 방향부터 잘못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부는 저출생 및 인구 감소 극복을 위해 과거 17년간 280조 원을 투입했고 2025년 88조 원 투입 계획을 밝혔다. 결과는? 세계 최악의 합계출산율 0.72명(2023년 기준), 그리고 국토의 절반인 영호남의 소멸이다. 그래서 외신도 "한국 정부의 접근은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 같은 해법"이라 평했다.
대통령은 '대전환' 첫째 과제로 지방 주도 성장을 꼽았다. "수도권에서 거리가 멀수록 더 두텁게, 더 과감하게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고맙긴 한데 수정이 필요하다. 수도권 지원은 억제하고 수도권에서 먼 곳부터 지원해야 한다. 영호남이다. 수도권에서 멀수록 기업이 자리 잡도록 지원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 없이는 하나님, 부처님도 지방소멸을 막을 수 없다. 이는 부동산공화국, 불로소득공화국 혁파의 열쇠이기도 하다. 분산시켜야만 서울이 투기꾼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제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 중심의 3대 권역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8대 경제권역으로 돌아간다. 미국의 수도는 행정만 한다.
다음은 교통이다. 대한민국 산업화는 경부고속도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GRDP에서 부산을 추월한 인천시의 성장은 인천국제공항 건설 이전과 이후로 딱 부러지게 나뉜다. 주말에 인파로 미어터지는 속초와 강릉의 중앙시장 풍경은 평창동계올림픽 덕에 건설된 KTX와 서울·양양고속도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문제는 KTX 노선에서 알 수 있듯 국가 기간 교통망이 서울을 중심에 둔 방사형이라는 점이다.
제2순환고속도로까지 확보한 서울이 주요 고속도로와 KTX, GTX 의 출발점이 되다 보니 국가 기간 교통망이 욱일기 모양이 되어버렸다. 광주에서 부산 가는 KTX는 왜 없는가. 부산에서 강릉 가는 고속도로는 왜 지금도 완공되지 않았을까. 왜 부산에서 강릉을 가기 위해 서울행 KTX를 타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방사형 국가에서 격자형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최근 국정회의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너무 서울에 집중되니 지역 관광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했는데 공항 등 교통망 자체가 그렇게 갈 수 없다. '수도권에서 멀수록 더 지원'이 아니라 '수도권 빼고 지원'하면 된다. 그래야 지역관광이 살고 그래야 지방이 산다. 이를 위해 '서울 독식,' '지방 수탈'의 면허증인 예비타당성 조사부터 없애야 한다.
기업, 교통 다음으로 지방소멸을 막을 핵심은 좋은 학교다. 단적으로 말해 지방의 대학은 국립 빼면 모두 인공호흡 수준이다. 작은 대학부터 문 닫을 것이고 사립은 물론 국립도 '좋은 교육'은 언강생심, 생존 자체가 목표다. 대학도 기업이 함께 하지 않으면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기업과 같이 연구도 하고 인턴도 하고 취업이 돼야 대학이 죽지 않고 성장할 수 있다.
대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좋은 고등학교다. 내가 2000년 부산의 한 대학에 임용될 당시 교수의 절반 이상이 서울에서 공부한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퇴직 후 부산에 살았다.
지금은 아니다. 서울이나 외국에서 박사를 따고 부산에서 교수가 된 이들이 나이 오십에 가까워지면 가족을 서울로 보내고 기러기 생활에 들어간다. 자녀가 고등학교 갈 때가 되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는 전국 각지의 공기업 직원들이 그 지역에서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최근 특목고 존치 논란이 있는데 수도권은 억제하고 지방은 '더 두텁고 과감하게 지원'하는 게 지방에서도 가족과 함께 맘 편하게 살게 해주는 길이다.
지방 소멸, 열심히 하는 것으로 못 막아
"대졸자를 뽑을 이유가 없어요"라는 부산의 한 중견 기업 임원의 말은 충격적이지만 현실이다. 서울에서 멀수록 희망이 없다. 방사형 국가를 추구한 결과다. 기업, 교통, 학교 등 국가의 근간이 되는 분야는 격자형으로 배치되어야 하는데 그 중 제일은 기업이다. 그리고 지방과 지방이 교류해야 한다. 지방 상권마저 수도권 인구에 의존해서야 '지속 가능한 지방'이 되겠는가.
종속이론가이자 '저발전의 발전' 저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저발전이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 했다. 중심부가 주변부를 수탈하면서 주변부는 더욱 구조적 빈곤과 종속에 빠진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방 무시의 수준을 넘어 지방 멸시의 문화가 굳어지고 있다. 기존의 틀에서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지방 소멸 절대 해결 안 된다. 혁신이 필요하다. 기존의 틀을 파괴해야 한다. 그래야 지방을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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