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디스플레이 공장에도 청소노동자는 있다. 화학물질 냄새 가득한 공장을 돌아다니며, 바닥과 벽면에 묻은 알 수 없는 성분의 가루와 약품을 닦고, 다른 노동자들이 입은 방진복·마스크 등 보호장구를 치우고, 화학물질 배관 상태를 점검하는 등 여러 일을 이들이 한다.
그렇게 7년 여를 일하다 유방암에 걸린 청소노동자가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은 그의 병을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 서울행정법원이 이를 뒤집었다. 이에 노동계가 공단에 항소 포기를 촉구했다. 생활고와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재해 당사자도 "기쁘다"는 심경과 함께 마찬가지 바람을 전했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11일 성명에서 유방암 재해자 손모 씨에 대한 공단의 산재 불승인은 잘못됐다고 한 지난달 26일 서울행정법원 판결에 대해 "많이 늦었지만 의미 있는 판결을 환영한다"며 "공단은 항소하지 말고, 조속히 판결을 확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손 씨가 산재 인정을 받기까지 "공단에서만 2년 7개월, 소송에서만 4년" 도합 "6년 7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강조한 뒤 "재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라도 근로복지공단은 항소 없이 판결을 조속히 확정함으로써, 재해자의 고통을 덜어야 한다"고 재차 호소했다.
반올림에 보낸 글에서 손 씨는 "암이 발병하고 나서 일을 하지 못하므로 배우자 혼자 벌어서 아이들 고등학교, 대학교 보내야 하고 이러다 보니 힘들었고, 항암약 부작용으로 관절통, 갱년기 증상, 불면증 탈모증 등으로 힘들었다. 특히 관절통이 심했다. 지금도 후유증이 있고 재발방지를 위한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하고 "산재가 인정돼 기쁘다"는 심경을 밝혔다.
이어 2012~2019년 삼성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일할 당시 "찐득거리는 것 아세톤으로 닦고, 리트머스 테스트 종이로 화학물질 배관 노출 점검도 하고, 쓰레기통 수거도 하고, 위험한 공정에서 엔지니어들은 방독면을 쓰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었다"며 "약품 노출 영향을 공단은 무시했다"고 공단의 지난 산재 불승인 결정을 비판했다.
손 씨는 "회사에도 바람이 있다"며 "우리 청소노동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다. 임원이 온다고 하면 미리 청소해놓고 눈에 띄지 말게 숨으라고 한다. 있는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투명인간"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아무리 그래도 건물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사람이 있으니까 기계도 돌아가고 돈도 버는 것"이라며 "청소 노동에 대해 존중해주고, 이번 산재 인정을 계기로 안전한 환경이 제공되길 바란다. 사람 중심으로 일하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성명에는 이번 판결의 의미를 짚고 산재 승인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담겼다. 판결의 의미에 대해 반올림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가 각종 유해 위험 요소가 상존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클린룸 지상과 지하를 오가며 열악하게 청소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유해화학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되었음을 인정하고 이것과 유방암의 발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특히 이번 판결은 야간노동을 하는 교대 근무자가 아닌 주간 근무만 한 경우라도, 여러 유해화학물질과 방사선 등에의 복합적, 누적적 노출 영향으로 유방암이 발병했다고 본 의미있는 판결"이라고 강조했다.
제도 개선 관련 반올림은 "산재보험법 목적과 취지에 어긋나는 판단을 공단이 더 이상 남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국회는 산재보험법을 조속히 개정해 노동자 측에 부과된 과도한 입증책임을 대폭 완화하고, 반복된 판례대로 의학적·자연과학적 관점이 아니라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업무와 질병간의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하도록 분명하게 법에 명문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아무런 제한 조치가 없는 산재 처리 기간에 대해 산재법 안에 적정한 조사기간을 명문화하고 그 기간을 넘어서는 경우 국가가 지연 책임을 지고 보험급여를 우선 지급하는 선보장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며 "노동자 입증책임 완화 및 산재 국가 책임 선보장제 도입은 이미 집권 여당이 대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약속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삼성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일한 청소노동자의 질병 산재 신청은 이번만이 아니다. 앞서도 췌장암과 유방암에 걸린 청소 노동자 두 명이 공단에 산재를 신청해 인정받았다. 그 중 췌장암 산재 인정은 신청한 지 약 3년 3개월, 재해자 사망 뒤 약 11개월이 지난 뒤에야 나온 결정이었다. 지난 9월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나온 폐분진, 폐수를 처리하던 노동자가 폐암 산재를 신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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