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 중서부의 백인과 흑인이 대다수인 교외 지역에서 자랐다. 혈연과의 단절로 인해 내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제한적이었고, 한국적 뿌리와의 연결은 더욱더 희박했다. 뉴욕으로 이사한 뒤, 나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른 한국계 미국인들과 연결될 수 있었고, 그제야 내 정체성의 복잡성을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33세이며, 퀴어이자 혼혈 여성, 그리고 청각장애가 있는 한국 입양인과 백인 미국인 아버지를 둔 딸로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기억하는 한 늘 청각장애인이었지만, 태어날 때부터였는 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는 세 살 때 뇌수막염을 앓으면서 청력을 잃었다.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부실한 서류에 적힌 첫 기록은 어머니가 대구대학교 부설 기독교 청각·시각장애인 고아원에 있었다는 것 뿐이다. 이후 어머니는 몇몇 고아원을 전전하다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되었다. 어디에 있었는지를 자세히 추적할 서류 기록은 없다.
내가 DoKAD(Descendants of Korean Adoptees, 한국 입양인 2세)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나는 늘 어머니가 입양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 자신이 DoKAD라는 사실도 의식했지만, 그것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를 깊이 이해하려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14세 때 대구의 한 고아원에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산골의 작은 마을로 입양되었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어머니 쪽 가족을 찾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그 시도는 어설펐고 흩어져 버렸다. 젊은이들은 흔히 진짜 이유를 모르면서 감정으로만 행동할 때가 많다. 나는 최소 세 번의 DNA 검사를 했지만, 나와 연결된 혈연을 찾아줄 지도 모를 이들과 정보를 나누는 일에는 무심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두 번 한국을 방문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서류는 엉망이었고, 미국 수화(ASL)와 한국 수화, 그리고 영어 번역이라는 이중 언어 장벽은 탐색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청각장애인에 대한 포용성은 미국이 가장 높은 편이다. 청각장애인(Deaf) 공동체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규범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시각장애인 같은 다른 장애인 공동체와도 구별된다. 한국어를 배우는 것만도 충분히 힘든데, 한국 수화까지 배워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다. 우리는 한국의 청각장애인 공동체를 찾지 못했고, 어머니는 결국 한국의 친부모를 다시 만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는 늘 어머니의 친모와의 재회를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쓰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모성적 연결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강력한지.
나는 어머니가 대구 지역 고아원에 있었던 시절부터 한국의 구조와 철학을 이해하려 애써왔다. 표면적으로는 나는 한국 문화와 단절되어 있지만, 돌봄 가정이나 고아원 운영진을 통해 어떤 믿음 체계가 흘러들었음을 느낀다. 어머니가 나를 양육하면서 강조했던 어떤 것들은 한국 역사와 문화의 간접적 흔적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집단주의(튀지 않기), 종교를 통한 죄책감과 수치심, 가부장적 사고 방식, 여성으로서 늘 억압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 등이다. 또 모계적 계보를 통해 전쟁 이후의 트라우마와 결핍의식도 느낀다. 필요한 것은 언제든 갖추고 있다는 안정감 대신, 언제든 나쁜 일이 닥칠 수 있고 늘 부족하다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대학으로 떠난 뒤 어머니는 물건을 쌓아두며 집 안에 더 깊이 파묻혀 갔다. 나 역시 오랫동안 노숙에 대한 두려움을 품었고, 극단적 독립심을 키워왔다.
부모님의 공통점은 '전통적 가정환경'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분 모두 청각장애로 인해 시설에서 자랐다. 이 제도적 환경은 양육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때로는 방임처럼, 때로는 과도한 간섭처럼. 곱씹어보면, 이는 학교와 비슷하다. 책임 아래 있을 땐 감정, 사고, 행동, 반응까지 통제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그들의 관심은 사라진다.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순간,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이건 단지 나의 관찰과 추론이지만, 분명 패턴이었다.
전 세계의 다른 DoKAD들을 만나면서, 우리 모두가 비슷한 경험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입양인들(KADs)의 유아화, 정체성과 관련된 빈약한 토대, 세대 간 트라우마, 가족 및 의료 기록 접근 장벽.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관련 콘텐츠를 만들면서 비로소 그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뉴욕으로 이주한 뒤 한국 공동체와 한국 문화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고, 언제든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으려 했다. 나는 서툴게 한국어를 배우고, 맥락과 역사를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솔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임했다.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시지만, 나는 다른 미국 가정처럼 가까운 모녀 관계를 누리진 못한다. 내가 만난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그들의 입양 기록 접근은 더 어려워졌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트라우마와 건강 문제는 우리를 낙담하게 하거나 충격을 안기기도 한다. 나이가 들며 내게도 자가면역 질환이 나타났는데, 만약 어머니 쪽 가족력에 대해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이를 피하거나 대비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하지만, 제한된 서류와 기록 접근은 결국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바로 그 나라로부터 우리가 또다시 거부당하게 한다.
반복된 거부는 고통스럽고, 때때로 학대적 관계처럼 느껴진다. 상황은 빵 부스러기 같은 작은 희망과 친절을 흘리다가도, 때에 따라 다시 우리를 외면하거나 혐오한다. 이 역사를 직면한 적 없는 기존 체제와 맞서는 것은 쉽지 않다. 책임 회피는 우리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막는다. 그것이 기록 접근을 위한 법 개정이든, 입양 과정에서의 학대에 대한 보상금이든, 미혼모·청소년 산모를 위한 돌봄 체계 구축이든. 한국이 더 이상 외부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닌, 내부적 문제를 직시하는 힘든 과제를 떠안지 않는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변화해야만 치유를 향한 첫걸음을 뗄 수 있다. 그때까지 내가 경험하는 깊은 그리움과 슬픔, 즉 한(恨)은, 온라인에서 시작해 진짜 관계로 발전한 정(情)의 공동체 속에서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기획: 한국 입양인 2세(DoKADs) 마이테 마음 & 마릿 킴
번역:김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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