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계관시인
로버트 서우디(Robert Southey, 1774-1843)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으로, 무려 30년간(1813-1843) 계관시인 자리를 지킨 인물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료 시인이었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와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에 비하면 확실히 인지도가 떨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변절'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청년 서우디, 혁명을 꿈꾸다
1774년 8월 12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서우디는 리넨(아마포)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책벌레였던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다니다가 급진적인 글을 썼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요즘으로 치면 학교 신문에 '체벌 반대' 칼럼을 기고했다가 잘린 셈인데, 이미 이때부터 반골 기질이 드러났다.
1794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콜리지를 만난 서우디는 프랑스 혁명에 열광하며 함께 로베스 피에르의 몰락이라는 희곡을 썼다. 두 젊은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공상적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아예 미국 서스케하나 강변에 이상향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이름하여 '평등주의 농장 공동체(pantisocracy).'
당연히 실패했다. 돈도 없었고 실현 가능성도 제로였다. 하지만 서우디는 진지했다. 1796년에는 잔 다르크를 주제로 한 장시를 발표하며 반전 메시지를 담았고, 청년시절 내내 급진적 사상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현실의 벽, 생계형 글쓰기의 시작
1803년 서우디 가족은 콜리지 가족과 함께 영국 북부 호수지역의 그레타 홀에 정착했다. 그런데 콜리지가 가족을 버리고 몰타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서우디는 두 가족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돈이 절박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1799년부터 서우디는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시작했고, 번역, 편집, 역사서, 전기, 시, 비평... 팔리는 것은 무엇이든 썼다. 말 그대로 '글 쓰는 기계'가 된 것이다. 생계를 위해 펜을 잡다 보니 어느새 급진적인 목소리는 사라지고, 정치적으로 안전한 글만 쓰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813년, 월터 스콧(Sir Walter Scott, 1771-1832)의 추천으로 계관시인에 임명되었다. 연봉 100파운드와 정부 연금이 딸린, 체제가 공인한 '국가 시인'이 된 것이다.
변절의 완성, 체제옹호자로 거듭나다
계관시인이 된 서우디는 로버트 뱅크스 젠킨슨 리버풀 백작(Robert Banks Jenkinson, 2nd Earl of Liverpool, 1770-1828)의 보수당 정부를 열렬히 지지했다. 의회 개혁은 "악마가 운전하는 파멸로 가는 철도"라고 비난했고, 1819년 피터루 학살 사건(정부군이 평화집회 참가자들을 공격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친 사건)에서는 희생자들을 "혁명적 오합지졸"이라고 부르며 정부를 옹호했다.
심지어 1817년에는 개인적으로 "명예훼손"이나 "선동" 혐의로 비판적 작가들을 유형에 처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토머스 울러(Thomas Jonathan Wooler)와 윌리엄 혼(William Hone) 같은 급진 언론인들을 탄압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817년 그의 청년시절 작품인 '와트 타일러'(Wat Tyler)가 무단으로 출판되어 버린 것이다. 이 작품은 서우디의 급진적 과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정적들은 환호했다. "자, 봐라! 이 위선자를!"
바이런의 신랄한 조롱
특히 조지 고든 바이런 경(Lord Byron, 1788-1824)은 서우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809년부터 '영국 시인과 스코틀랜드 평론가들'에서 서우디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821년 서우디가 조지 3세(George III, 1738-1820, 재위 1760-1820)를 찬양하는 '심판의 환상'(A Vision of Judgement)을 쓰자, 바이런은 같은 제목의 패러디 시로 반격했다.
서우디는 서문에서 바이런을 "악마주의 시파"에 속한다고 비난했는데, 바이런의 패러디는 문학사에 남을 명작이 되었고 서우디의 원작은... 글쎄, 누가 기억하는가?
당시 정치가였던 홀랜드 경(Lord Holland)은 서우디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유쾌하고 다정하긴 하지만... 믿기 쉽고 거의 어리석은 역사가이자, 약한 논리를 펼치고 지루한 시를 쓰는 시인이며, 산문이든 운문이든 독자를 사로잡거나 열광시키지 못했다. 가끔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남긴 것은 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서우디가 완전히 무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산문, 특히 '넬슨 제독 전기'(Life of Nelson, 1813)는 지금도 고전으로 인정받으며 1926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웨슬리 전기'(Life of Wesley, 1820) 같은 작품도 나름 가치가 있다.
시 중에서도 "블렌하임 전투"(After Blenheim), "인치케이프 바위"(The Inchcape Rock) 같은 짧은 작품들은 20세기 후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은 동화다. 1837년 산문집 '닥터'(The Doctor)에 발표한 '세 마리 곰 이야기'(The Story of the Three Bears). 맞다. 우리가 아는 '금발 소녀와 곰 세 마리' 이야기의 원작이 바로 서우디 작품이다.
쓸쓸한 말년
서우디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 아내 이디스(Edith Fricker)가 정신병에 걸렸고 1837년 사망했다. 1839년 6월 4일 시인 캐롤라인 앤 볼스(Caroline Anne Bowles, 1786-1854)와 재혼했지만, 이미 그 자신도 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1843년 3월 21일, 그는 40년간 다녔던 케즈윅의 크로스 스웨이트 교회묘지에 묻혔다. 워즈워스가 장례식에 참석했고 묘비명을 써주었다.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서우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청년 시절의 이상주의는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을까? 단지 젊음의 특권이었을까? 생계를 위해 신념을 타협하는 것과 완전히 배신하는 것의 경계는 어디인가?
정치 전문가 제임스 매킨토시 경(Sir James Mackintosh, 1765-1832)은 1820년 옥스퍼드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서우디를 보고 "상당히 늙어 보였고... 약간의 꾸밈이 있긴 했지만... 매우 유쾌했다"고 평했다. 아마도 그것이 서우디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유쾌하지만 약간은 인위적인, 한때는 혁명을 꿈꿨지만 결국은 체제에 안착한 한 중년 문인의 모습.
오늘날 진보를 표방하는 우리는 서우디를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그의 변절을 단순히 도덕적 타락으로만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속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서우디의 가장 큰 불운은 바이런이라는 천재 옆에서 살았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이런은 끝까지 체제와 싸우다가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낭만적으로 죽었지만, 서우디는 생존해야 했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역사는 순교자를 기억하지, 생존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것이 로버트 서우디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서우디의 이름 발음은 '소우디'(south의 'ou' 발음)가 맞다고 한다. 그 자신도 북부 사람들이 '미스터 서디'라고 부르는 것을 불평했다. 바이런은 돈 후안에서 서우디를 'mouthy'(입 많은)와 운을 맞춰 조롱했다. 이름 발음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계관시인. 이보다 더 완벽한 몰락이 있을까?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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