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박유하가 연 것은 퇴행의 문이었다"

[기고] 윤석민 교수의 <조선일보> 칼럼에 대한 비판

역사는 침묵을 강요받은 사람들이 남긴 미세한 흔적을 통해 완성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언어였다. 그 침묵을 복원하기 위해 여성사·국제인권법·동아시아 전쟁범죄 연구는 지난 30년간 축적과 검증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윤석민 서울대 교수의 최근 <조선일보> 칼럼은 이 고된 축적을 단숨에 무력화하려 한다. 그는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닫힌 문을 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문은 진실로 통하는 출입구가 아니라, 피해자의 기억을 다시 봉인하고 식민지 권력의 음영을 세탁하는 통로에 가깝다.

이 글은 윤 교수 칼럼의 문제를 문장별로 되짚되, 단순 반박을 넘어 그 서술이 가진 구조적 오류를 밝히고자 한다.

1. '성역'이라는 프레임: 누가 무엇을 성역화했는가?

윤 교수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시민사회와 연구를 "성역화된 도그마"로 규정한다. 그러나 성역을 만든 것은 운동이 아니라 폭력 그 자체다.

전시 성폭력은 동의가 성립할 수 없는 조건, 군과 국가의 조직적 개입, 반복적 착취 구조 이 세 가지가 결합할 때 그 자체로 강제성을 가진다. 국제인권법은 이미 1990년대 이후 이 점을 명확히 규정했다.

즉 "성역화"는 시민사회가 만든 금단의 금기가 아니라, 국가폭력이 만들어낸 후유증이다. 피해 여성들이 40~50년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조건 자체가 성역이었다.

그런데 윤 교수는 이 구조를 지워버리고, 오히려 "문제제기가 금지된 영역"이라는 식으로 피해자 운동을 재단한다. 이는 권력의 축소가 아니라 권력의 역전이다. 피해자들이 어렵사리 열어젖힌 기억의 문을, 지식인의 언어로 다시 닫아버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2. 학문의 자유를 내세우지만, 책임의 토대를 말하지 않는다.

윤 교수는 박유하의 책이 "불편한 진실에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학문은 자유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자유는 책임의 기반 위에서만 자유가 된다.

박유하의 책은 이미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심각한 결함이 지적되었다.

- 일본군의 구조적 강제를 축소하거나 삭제

-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선택적으로 인용

- 식민지 권력관계의 맥락을 의도적으로 탈색

- 자료 선택의 일관된 편향과 왜곡

윤 교수는 이 방대한 비판 연구를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도그마"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그가 제대로 읽지 않은 수십 년의 연구 축적에 가깝다.

학문의 자유는 역사를 축소할 자유가 아니고, 피해자의 경험을 재단할 자유도 아니다. 학문이 타인의 고통을 해석하는 순간, 자유는 책임이라는 경계에 닿는다. 윤 교수의 칼럼은 바로 그 경계를 무너뜨린다.

3. 시민운동을 '권력'으로 뒤집어놓는 왜곡된 지도

윤 교수는 시민운동을 "권력화된 진영"으로 말한다. 그러나 시민운동은 권력이 아니라 권력의 잔여로 남은 약자의 기억을 지켜온 공동체이다.

가해국—피해국

남성국가—여성

제국—식민지

이 비대칭의 구조 속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은 스스로 제도화를 요구할 힘이 없었다. 그 공백을 메워온 것이 시민운동이었다.

그런데 윤 교수는 이 약자의 운동을 "성역"이나 "강압적 집단"으로 묘사하면서, 오히려 대형 신문과 강단 지식인, 보수 네트워크가 결합한 진짜 권력의 위치를 은폐한다.

그의 논리는 "도전"을 말하지만, 실상은 강자가 약자의 기억을 해석하는 권리를 되찾는 구조에 가깝다.

4. "닫힌 문을 연다"는 은유: 누가 그 문을 처음 열었는가?

윤 교수는 박유하가 "닫힌 문을 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문을 가장 먼저 연 사람은 학자도 언론도 아니었다.

1991년 김학순 여사의 기자회견. 그 이후 30년간 이어진 수백 명의 증언.

피해자들은 자기 몸의 상처와 삶의 파괴를 사회 앞에 드러내며, 스스로 그 문을 연 첫 주체였다. 학자가 할 일은 그 문을 다시 닫는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이 다시 닫히지 않도록 지식의 언어로 지지하는 것이다.

박유하의 책이 연 문은 새로운 진실의 문이 아니라 이미 구조적으로 설명된 폭력의 역사를 감정과 개인 서사로 다시 축소하는 퇴행의 문이었다.

5. 결국 문제는 '자유'가 아니라 '진실을 대하는 태도'다.

윤 교수는 불편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느낀 불편함은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확신을 흔드는 증언들의 존재였을 것이다.

지식인은 때로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타인의 침묵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의 자유는 약자의 고통을 상대화할 자유, 해석의 틀로 포괄해버릴 자유, 식민주의 폭력을 개인적 사연으로 희석할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윤석민 교수의 칼럼은 지식인의 자유가 어떻게 약자의 기억 위에서 오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6. 우리가 열어야 할 문은 무엇인가?

닫힌 문을 여는 일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열어야 할 문은 피해자의 경험을 열린 기억으로 이끌어내는 문이지, 그 기억을 다시 이념과 해석의 언어 속에 밀어 넣는 문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 하나다.

어떤 문이 역사로 통하고, 어떤 문이 망각으로 가는가.

그 질문 앞에서, 윤석민 교수의 칼럼은 역사의 문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다시 닫으려 했다. 그 점이야말로 지식인의 언어가 경계해야 할 가장 위험한 지점이다.

▲11월 14일 <조선일보>에 실린 윤석민 교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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