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이 택배노동자의 '새벽배송 제한'을 제안한 이후 새벽배송이 택배노동자의 자발적 선택인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택배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과로는 그들의 욕망이나 과당경쟁 때문이 아니다. 택배사가 이들의 직고용을 회피하면서 노동착취가 극대화됐기 때문이다.
택배기사를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 등으로 위탁계약을 맺을 경우, 자본가는 근로기준법상 대부분의 의무에서 벗어난다. 4대보험 부담을 피하고 노동시간 규제에서도 벗어난다. 반면 노동자는 법적 보호 사각지대에서 과로, 산재, 소득 불안, 생명 위협에 노출된다. 2017~2019년 연평균 약 2~3건의 사망재해(주로 과로사)가 발생했으며, 팬데믹 이후인 2020~2022년에는 총 33건으로 급증했다.
민주노총의 문제의식도 여기서 출발했다. 그런데 왜 민주노총은 노동자성의 법적 인정이라는 근본 처방 대신 '새벽배송 제한'이라는 응급조치를 택했을까.
민주노총 역사상 첫 비정규직 출신 위원장이 선출됐지만, 여전히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중심의 조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고노동자의 법적 지위 확보를 총연맹 차원의 우선 의제로 격상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로'라는 증상에만 집중하고 '비정규·특고'라는 원인을 외면한 처방은 자본에 더 유리한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자본의 이윤 구조를 유지하는 위탁·특고 체계를 그대로 둔 채 새벽 시간만 제한할 경우, 기업은 물량을 조정하거나 수수료를 인하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비용을 보전할 수 있다. 반면 노동자는 줄어든 물량만큼 소득이 줄거나, 규제를 어기고 일할 경우 '욕심을 부린 개인'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사실 새벽배송은 모든 택배사가 아니라 주로 쿠팡에 집중된 문제다. 민주노총의 11월 5일 성명 제목도 '쿠팡의 야간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지금 멈춰야 한다'였다. 쿠팡만이 0~7시 전국 단위 새벽배송을 운영하고, 컬리·SSG·롯데는 오전 5시 이후 배송을 시작한다. 이는 쿠팡이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생활물류법)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쿠팡은 '택배사'가 아닌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분류되어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과 시민단체는 이전부터 쿠팡의 생활물류법 적용을 요구해왔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이 법 개정보다 새벽배송 제한을 선택한 이유는 특정 기업을 직접 겨냥하기 어렵고, 입법보다 사회적 압박이 더 즉각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단기적으로는 건강권 보호의 성과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특고노동자의 법외 상태를 고착시킬 위험이 있다. 새벽배송을 멈춘 자리에 더 많은 하청과 비공식 노동이 들어서고, 기업은 '법적 노동자'가 아닌 이들을 더 폭넓게 활용하게 될 것이다. 새벽배송을 멈추는 조치가 오히려 낮의 불안정 노동을 확산시킬 수 있다.
보호의 언어가 주체의 언어를 대신
흥미로운 것은 민주노총만이 아니라, 평소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타협 노선'을 비판해온 사람들도 이번 제안을 지지하는 분위기라는 데 있다. 이는 "계속 죽어 나가는데 뭔가 해야 한다"는 절박함, "지금 당장 멈추게 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주의는 보호 프레임이 주체성 프레임을 덮는다는 데서 문제가 있다. "노동자가 너무 힘드니 쉬게 해줘야 한다"는 도덕주의가 오히려 노동자를 '주체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호를 받아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위치시킨 것이다.
민주노총의 제안 이후 언론 인터뷰와 토론의 중심은 노조 간부, 정치인, 연대단체 활동가였다. 정작 새벽배송의 당사자인 쿠팡 노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11월 5일 국회 을지로위원회가 주최한 '택배분야 사회적 대화기구 전체회의'에도 쿠팡 노동자는 빠져 있었다.
쿠팡에는 세 종류의 노동자 조직이 존재한다.
첫째, 쿠팡노동조합(쿠팡 대표노조)이다. 쿠팡의 물류망인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의 직고용 배송직 중심으로 지금은 대부분 특고로 전환됐다. 2023년 말 민주노총에서 탈퇴해 단일 기업노조로 있다.
둘째,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쿠팡물류센터지회(민주노총 쿠팡지회)다. CLS물류센터 노동자로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를 계기로 2021년 6월 설립됐다.
셋째, 비노조택배기사연합(비노조연합)이다. 여러 회사의 택배기사가 섞여 있지만 쿠팡플렉스 앱을 통해 배송을 맡은 개인사업자(위탁계약자)가 다수다.
앞의 두 노조가 각각 200명 안쪽인 데 반해 비노조연합은 6천명이 넘는다. 그밖에 비노조연합에도 가입하지 않은 기사도 상당수다. 민주노총의 '새벽배송 제한'에 반대하는 쪽은 주로 비노조연합과 무소속 택배기사다. 이 중 쿠팡플렉스 기사는 사실상 특고에 가깝지만 특고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법은 그들을 제도 밖으로 밀어냈고, 운동의 도덕주의는 그들을 보호의 객체로만 대한다. 이들이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관심이 아니라 구조 때문이다.
존재에서 당위로: 한국 사회운동의 언어 변화
노동자의 생계 의지를 욕심으로 간주하고, 노동자를 주체가 아닌 보호 대상의 피해자로 전락시키며, 노동자 편에서 말하는 것과 노동자 대신 말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게 된 현 상황은 한국 사회운동의 오래된 구조적 결과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빈민·학생·농민운동 등 '현장' 기반 운동은 존재론적 성격이 강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배고픔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구체적 생존의 진술이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1980년 광주 학살 이후 국민을 죽인 정치권력의 타도와 그를 위한 민주화운동에 다른 부문 운동들이 동원돼갔다.
부문운동들은 대체로 더 큰 목표이자 절대적인 목표인 민주화운동을 위해 복무해야 했다. 빈민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에서 빈민의 가난, 여성의 억압, 노동자의 고통은 민주화와 민중해방이라는 당위가 갖는 정당성의 근거로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운동은 구체적 삶에서 점점 멀어졌고, 대중적 감각보다 도덕적·당위적 정당성을 중심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군사정권 붕괴 이후 시민운동은 '권력 비판'에서 '도덕적 감시'로 전환하며, 국가를 견제하는 윤리적 주체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계급·노동·생계의 현실보다 '올바름'과 '공정' 같은 추상적 가치를 앞세우는 도덕주의로 이어졌다. 구조적 비판 대신 도덕적 판단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도덕주의는 노동운동에도 이식되었다. 그 결과 노동의 현실은 생존의 문제보다 '옳게 사는 법'의 문제로 치환되었고, 노동자는 정치적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도덕적 객체로 고정되었다.
당위가 운동을 지배하게 되면, 존재의 현실은 그 당위를 정당화하는 증거로만 기능하게 된다. 존재가 당위에 포섭된 뒤 운동의 정당성은 "무엇이 옳은가" 또는 "누가 옳은가"의 문제로 이동했다. 운동은 '구조를 분석하는 지적 행위'가 아니라, '올바름을 증명하는 도덕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당위가 상층에서, 존재가 하층에서 작동하는 구조는 결국 '지도자/대중', '전문가/현장', '지식/삶'의 위계를 고착시켰다. 운동 내부에서도 '말할 수 있는 사람(지도부)'과 '살고 있는 사람(현장)'의 분열이 뚜렷하다. 지도자는 도덕의 언어로 말하고, 현장은 생존의 언어로 침묵한다. '보호의 명분'은 커지고 '발화의 권리'는 작아졌다. '당사자보다 타인이 더 크게 말하는 현상'이 마침내 완성된 것이다.
다시, 말할 권리를 위하여
쿠팡노동자의 침묵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 법이 제도 밖으로 밀어내고, 운동이 도덕주의로 덮은 결과다. 따라서 진정한 변화는 "쉬게 하자"가 아니라 "말하게 하자"에서 출발해야 한다.
새벽배송을 멈추는 조치보다 더 시급한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현실을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새벽에 쉴 수 있어도, 낮에도 말하지 못한다면 노동자의 현실은 여전히 어두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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