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로 한국 법원에 소송을 진행했던 김한수 님이 향년 10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현재 사건은 원고 승소 판결 이후 대법원에 계류된 상태다.
23일 (사)민족문제연구소는 "10월 22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님께서 향년 108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라고 전했다.
연구소 측은 "고인은 1918년 12월 22일 황해도 연백군 연안 출신으로, 1944년 8월부터 1년 동안 일본 나가사키 미쓰비시조선소에 강제 동원되어 노동하다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피해를 본 뒤 귀국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고인은 2019년 4월 4일 미쓰비시중공업의 책임을 묻는 강제동원 소송(서울중앙지법 2019가단14354)을 제기하는 등 전범 기업의 책임을 묻고 인권과 존엄의 회복을 위해 싸워오셨다"라며 "현재 사건은 2025년 5월 9일 항소심(서울중앙지법 2022나16825)에서 원고 승소 판결 후 대법원에 계류되어 있다"라고 전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김한수 할아버지는 당시 직장에 다니면 일제의 징용에 안 뽑힌다는 소문을 듣고 연백 전매지국에 취직했다. 1944년 8월 목재를 나른다는 설명을 듣고 전매청 트럭을 타고 연안읍에 갔다가 먼저 와 있는 청년 200여 명과 함께 그대로 징용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집에 연락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김 할아버지는 부산,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가사키 미쓰비시조선소에 도착했는데, 기숙사에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는 열악한 식사와 생활환경, 강압적인 규율 아래에서 생활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 할아버지는 옆 건물에 있던 미군 포로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 할아버지는 작업장에서 선박에 사용하는 강철파이프를 구부리다가 체인이 끊어지면서 엄지발가락이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발이 부은 상태로 계속 작업을 해야 했다.
이후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 당시 폭심지에서 3.2㎞ 떨어진 공장에서 작업하다가 피폭을 당했다. 공장 철문 밑에 깔려 목을 다쳤으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이후 말린 오징어를 구해 팔아 뱃삯을 마련하여 밀항선을 타고 귀국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이처럼 법원의 판결에도 일본 전범 기업의 제대로 된 판결 이행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지만, 일본은 반성이나 배상보다는 강제동원 사실을 지우는 데 혈안이 된 상태다.
실제 조선인 강제 노역이 이뤄졌던 사도(佐渡)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 윤석열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성과라고 밝혔던 노동자 추도식에 한국 정부가 지난에 이어 올해도 불참 결정을 내렸는데, 일본 측이 노동자의 '강제동원'을 언급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지난 21일 일본의 새로운 총리로 자유민주당 총재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가 선출되면서 강제동원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사안에 대해 일본의 전향적인 태도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워진 실정이다.
다카이치 신임 총리는 여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라고 불릴 정도로 극우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다. 그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시 신사를 꾸준히 참배해 왔다.
일본이 2차세계대전에서 패했던 8월 15일 종전의 날에 올해도 신사를 참배한 다카이치 의원은 이같은 행위가 한국과 중국을 자극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각각의 나라를 위해 순직하신 분의 영령은 그 나라 국민의 마음에 따라 하는 것"이라며 "외교관계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일축했다.
그는 또 지난 2022년 극우 단체 주관으로 열린 한 강연에서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간에 그만두는 등 어정쩡하게 하니까 상대가 기어오르는(つけ上がる) 것"이라며 한국과 중국 등을 "일본에 기어오르는 국가"로 표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총리가 되더라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다카이치 신임 총리가 집권 이후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상황이지만, 과거사에 대한 이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어 한일 양국이 이후 과거사나 독도 영유권 문제 등 다양한 사안에서 부딪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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