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3년 방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AAA 상업 게임들 중 대다수가 평가 및 판매량에서 고배를 마시는 가운데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라는 놀라운 게임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신생 개발사가 처음 제작한 이 게임은 2025년 상반기에 메타스코어 93점을 기록하며 가장 유력한 GOTY 후보작으로 부상하는 등 흥행몰이와 이용자·평론가 평가를 모두 휘어잡았다. 이 게임은 AAA게임들처럼 엄청난 볼륨이나 포토리얼리즘을 위한 최신 기술이 들어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재미에 충실하고, 매력적인 미장센으로 화면을 수놓으며 고전적인 일본풍 RPG 요소를 현대적인 시스템과 결합해 플레이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코로나19 이후 게임계는 산업적인 지속 가능성의 문제와 마주했다. 수백 명의 개발자들과 노동집약적인 제작 시스템, 대형 퍼블리셔와 천문학적인 펀딩이 잘 팔리는 AAA 게임을 낳는 구조가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맥락이 있다. 첫 번째로는 게임이 고도의 컴퓨터 공학과 문화산업이 결합한 기술환경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산업 요인이다. AI의 등장으로 인한 무어의 법칙 붕괴, 빅테크 기업들이 펼쳐놓은 웹 3.0 코인 생태계, 채굴주의와 독점이 게임 산업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암호화폐를 향한 욕망과 거대 언어모델을 운용하는 데 드는 어마어마한 연산자원의 수요로 인해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인 GPU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게임을 즐기는 데 필요한 기기 환경 뿐 아니라 개발 환경 또한 원가가 폭등해, 개발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게임이 재미있기 위해 이렇게까지 고도의 하이엔드 기술이 필요한가이다. 이미 인디게임과 크라우드펀딩으로 엮인 대안적인 게임 생태계는 게임의 재미 요소가 투입되는 자원과 정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꼭 인디게임이 아니더라도 <P의 거짓>, <스플릿 픽션>등은 모두 AA급 자원으로 설계된 게임이지만 만듦새와 완성도는 AAA 게임 못지않다. 블리자드의 야심작 <디아블로 4>가 10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으로 이용자들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둘째, AAA급 대형 게임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개발의 테일러리즘이 필수적이다. 모든 개발 프로세스가 공장의 기계식 분업처럼 돌아가야 할 뿐 아니라 그 결과물도 균질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UBI, EA 게임들이 대표적이다. 테일러리즘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생산성이다. 모두가 언리얼5 엔진과 엔비디아의 독점적인 상업 환경에서 개발하고 플레이한다면, 당연히 생산성이 좋을 리가 없다. 생산성의 한계에 도달하면, 한 산업 부문은 큰 기업들부터 생산 자체를 외부화하기 시작한다. 즉 개발자들의 임금이 싼 지역, 동유럽과 남미 등에 개발 하청을 주는 현상이 뒤따른다. <워크래프트 3: 리포지드>를 통해 불거진 개발 하청은 이제 AAA게임에서 그리 유별난 현상이 아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개발자와 이용자 간에 암묵적으로 이뤄지던 '내적인 게임'이 사라진다는 데 있다. 게임은 대량 생산할 수 있어도 재미를 대량 생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는 형식과 내용의 층위가 아니다.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의 복수극이 <고스트 오브 요테이>의 복수극과 비슷한 것과는 다른, 게임만이 가진 독특한 위기다. 게임의 시스템, 리소스, 매커닉이 반복된다는 건 플레이하는 당사자에게는 매우 크게 다가온다. 게이머들은 장르의 가족적 유사성에는 관대하지만 카피-페이스트 한 재미의 유사성에는 거부감을 가진다. 뒤늦게 페이투윈·모바일 일변도에서 콘솔 게임 개발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한국의 게임개발사들도 이를 반드시 짚어봐야 한다. 그 엄청난 자원을 들여서 이미 시도된 시스템과 절차적 수사학들만 반복하는 건 적어도 게임산업에선 큰 리스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다시 콘솔 게임이 대세라고? 그럼 우리도 요즘 유행하는 소울라이크로 하나 만들어 볼까?" 같은 안일한 마인드로 접근하면, 개발에만 4-5년이 걸리는 AAA게임이 출시 때쯤 게이머들은 이미 익숙하고 또 같은 맛의 게임 요소들에 따분함을 느끼는 국면으로 이어진다.
요컨대 현재의 게이밍 생태계는 '지속 불가능한 게임 산업'이 주요한 고비인데, 미·중 패권 경쟁과 빅테크의 전지구적 독점으로 문제는 더욱 가속하는 중이다. 500만 원대 PC와 11만 원대 게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모두가 사용하는 언리얼5 엔진과 유니티로 비슷한 시스템의, 비슷한 플레이 구조를 가진 게임을 ‘생산’하는 데 만족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는 매우 영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정된 자원 내에서 연산적인 복잡성과 새로운 미학적 디자인들을 기존의 문법에 잘 조합하는 경우,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프렌치 누벨바그: 연출, 미장센, 디자인
<33 원정대>는 누가 봐도 스타일리쉬하고 미려한 디자인을 가진 게임이다. 누가 봐도 '프랑스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90년대 유행했던 일본식 RPG 게임의 일방향 구조와 캐릭터 육성 시스템이 근간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스템의 익숙한 맛을 완전히 새로운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이 게임의 미장센 전략이다.
'클레르 옵스퀴르'라는 용어의 원전인 '키아로스쿠로'는 원래 미술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 명암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오브제를 극적으로 부각하는 바로크 기법에서 유래했다. 카라바조, 렘브란트, 벨라스케스로 대표되는 바로크 화가들은 콘트라스트만으로도 빛을 스펙트럼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33 원정대>는 한정된 자원과 개발 환경 내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하고 효과적인 미학적 콘셉트를 추구했고, 이를 성공적인 연출과 버무려 완전무결한 미술적 완성도를 자아냈다. 게임에서 미학적 완성도란 무엇을 의미할까? 많은 개발비와 작업을 들여 화려한 파티클 이펙트와 셰이더, 광원 효과를 최대한 집어넣는 것일까?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안목이 없는 개발자들(게임 개발에 왜 문화적인 소양이 중요한가를 보여준다)이 주로 이렇게 한다. 명확한 콘셉트를 가지고,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갖춘다면 연산자원에 구애받지 않는 미장센을 창조할 수 있음을 이 게임이 보여주는 바이다.

클레르 옵스퀴르라는 미술의 역사적인 순간을 모니터로 옮겨온 것은 아주 좋은 발상이었다. AA급 개발비와 자원으로도 명확한 미학 전략이 있다면, 독창적인 게임 디자인이 가능하다는 걸 이 게임은 보여준다. 주연급 배우의 유무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영화와 달리, 게임에서는 미학적인 콘셉트가 완성도를 생각보다 크게 좌지우지한다. <33 원정대>는 콘트라스트와 심도, 블러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과하지 않은 자원으로, 프렌치 누벨바그라는 표현에 걸맞은 변화무쌍한 화면을 만들어 낸다. 화사한 해변, 수중 도시, 어둡고 의미심장한 미로, 화려하고 텅 빈 벨 에포크 양식 저택으로 표현되는 내면세계, 선박들의 무덤에 걸맞은 황량한 광원, 절망적인 동시에 감미로운 밤의 캠프파이어 등. 연출, 미장센, 디자인, 그 무엇 하나 튀지 않고 게임에 조화롭게 입혀져 있다. 디테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프랑스인들의 작품답게, 게임 속에 등장하는 의상, 캐릭터 디자인도 매우 섬세하다. 화면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 일본과 미국 게임을 하면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이 게임, 옷 진짜 잘 입는다'라고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연산적 복잡성의 '적정함'
이 게임이 그저 화면만 아름다웠다면, 가성비 좋게 뽑아낸 AA 타이틀 이상의 평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3 원정대>의 묘미가 미장센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자세히, 반복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있어서 <33 원정대>는 일본 RPG를 많이 연구했다. 북미식 RPG 룰인 '던전 앤 드래곤'이나 '겁스' 등의 세계관은 사실 설정 놀음을 위한 정형화된 시스템을 제공해 줄 뿐, 플레이어로 하여금 경계 바깥을 상상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라이선스 비용이 발생하는 건 덤이다. 반면 일본 RPG 게임은 서사적인 일방향성이 있긴 해도 시스템 자체를 가지고 노는 데 특화되어 있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6편부터 추구했던 ATB(Active Time Battle)와 턴제를 조합하고, 플레이어들의 아이템 수집 및 육성 방향에 따라 전투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등 이 게임의 플레이 스타일은 무궁무진할 정도로 복잡하다. 다시 말해 시스템의 암묵지 자체는 매우 익숙하고 단순하지만 '연산적 복잡성'은 다채로운, 가장 이상적인 결과물이 빚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사위는 6면으로 되어 있지만, 주사위의 면들을 활용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스템이 플레이에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를 연산적 복잡성(computational complexity)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복잡성을 추구하고, 수학은 복잡성 속에서 길을 만들어 낸다. 이 조합은 게임 플레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인데, 특히 여러 변수와 조건이 결과를 자아내는 RPG·전략 게임에서 주로 나타난다. 물리엔진이 정교하게 구현된 FPS 게임 등에서도 연산적 복잡성은 가시화된다. <디스아너드>, <하프라이프: 알릭스> 등이 그렇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문명> 등은 연산적 복잡성 자체를 소재로 삼는 게임이고,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는 그 안의 무궁무진한 수학의 묘미를 음미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게임이다.
<33 원정대>의 연산적 복잡성은 전투 시스템에서 아주 적정한 수준으로 변주되고 있다. 아름다운 화면과 감미로운 동화풍 스토리를 침범하거나, 혹은 보조만 하는 수준도 아니다. 월드에서 조작하는 시점이 되면, 이미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기 위해 최단 경로를 뛰는 플레이어가 아닌 '이렇게 싸워볼까? 저렇게 싸워볼까?' 고민하면서 전투시스템 자체를 계속 연구하는 학자 같은 면모를 플레이어 스스로 만나게 된다. 전통적인 서구식 RPG와 달리 무기, 크로마, 픽토스, 틴트 등의 요소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전투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익숙하면서도 적정한 연산적 복잡성을 발생시키게 된다. 이 점이 이 게임이 프렌치 누벨바그라는 수식어에 앞서 '재미있는 게임'으로서의 본질에 충실함을 잘 알려주는 바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시스템 놀이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눈이 즐거운 화면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누벨바그 게임이 정말 시작될 수 있을까
'카예 뒤 시네마'와 작가주의가 부상하는 1960년대, 영화이론가 앙드레 바쟁은 실재란 곧 구축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공간의 연속성과 시간의 영속성이 보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할리우드의 정형화된 세트 촬영과 소비에트 영화의 화려한 몽타주는 아름답지만 리얼리즘에는 무엇보다 '덜어내는' 기술(딥 포커스, 시퀀스 쇼트 등)이 필요하다. 정적이고 화려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실재의 본질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소거하는 이미지 전략. <33 원정대>의 개발자들은 이런 설명에 매우 잘 어울리는 작업을 해냈다. 덜어내고, 소거하고, 실재의 잠재태들을 극대화하는 정신이 시스템에 잘 녹아든 것이다.
AI 시대 반도체와 컴퓨터 연산 능력이 수직 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게임의 본질인 플레이와 재미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거대 언어모델의 시대에 게임의 누벨바그가 조용히 열리고 있음을 본다. 시네마의 누벨바그와 달리 누벨바그 게임은 거창한 선언이나 작가주의 감독과 함께 열리지 않는다. 개발자와 플레이어로 연결된 집단 지성 모두가 공유하는 요소들이 하나씩 변하면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꽤 빠른 속도로 새 물결이 온다. AAA 게임 이후, 그 징후는 크게 네 가지 대안적인 개발 모델로 나타나는 중이다.
1) AA 모델.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 <스플릿 픽션>처럼 AA급 규모의 개발비와 중급 스튜디오 단위로 제작하는 모델. 아이러니하게도 이 게임의 부재 33원정대는 33명의 개발팀 인원에서 따온 것이다. <사이버펑크>나 <위처> 같은 프로젝트는 이제 동유럽에서 노하우를 획득한 대형 퍼블리셔-개발사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개발비와 반도체, 컴퓨터 부품 가격이 너무나 상승했기 때문이다.
2) 장인-크라우드펀딩 모델. <발더스 게이트3>가 대표적으로, 영혼과 열정을 다해 게임 개발에 자신을 쏟아붓는 장인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게이머들로부터 크라우드펀딩을 조성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방식. 그러나 이런 사례는 극히 드물 것이며, 인디게임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되는 모델이다.
3) 작가주의 모델. <데스 스트랜딩> 시리즈의 코지마 히데오,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의 닐 드럭만처럼 개발자들이 이름을 걸고 작품의 향방을 총괄 디렉팅하는 모델. 게임의 재미 요소보다 작가정신이 더 중시되는 모델.
많은 게이머들과 개발자들이 현재의 게임 산업 상황을 비관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AAA 게임들에 한해서이다. 새로운 물결은 항상 결핍에서 시작됐음을 우린 알고 있다. <33 원정대> 이후의 작품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보도록 하자. '클레르 옵스퀴르(Claire Obscure)'가 빛의 대조를 통한 성취를 이루었으니, 그 다음은 명암을 지우고 외광만을 강조하는 '플랭에르(plein-air)'가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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