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벽화에 담긴 혁명 영웅의 생애

[손호철의 벽화 기행] 2. 멕시코혁명 지도자 사파타의 흔적을 찾아서

"민중에게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정부에게 평화란 없다."(에밀리오 사파타. 1879~1919)

'땅과 자유'. 멕시코시티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을 달려가면 '멕시코의 곡창'인 모렐로스주가 나타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골길로 들어서자 흰 벽에 붉은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이 멕시코혁명의 영웅 에밀리오 사파타(E. Zapata)의 혁명구호였다. 이 지역에서 사파타 같은 혁명지도자가 나타나고 '땅과 자유'라는 구호 아래 농민들이 모여 멕시코혁명의 주력군으로 움직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 사파타의 고향 길가 벽에 쓰여 있는 사파타 혁명 구호 '땅과 자유' ⓒ손호철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의 침략자 에르난 코르테스(1485~1547)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물이 풍부하고 농사짓기에 좋은 이 지역에 거대한 농장(아시엔다)을 짓고 원주민들을 강제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했다. 그 이후 모렐로스는 '멕시코의 곡창'으로 거대농장의 중심지가 됐고, 스페인의 대농장주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한 반면, 원주민 농민들은 수탈과 가난에 신음해야 했다.

1811년, 이 같은 현실에 분노한 마구엘 이달고 신부(M. Hidalgo, 1753~1811)는 멕시코의 독립과 농지개혁, 노예제 폐지, 인종차별 철폐 등 혁명적 노선을 내걸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원주민들은 이에 적극 호응했고 초기에는 성공했지만, 크리욜로(식민지출신 백인)의 적대적 분위기 속에서 정부군에게 패배해 처형당하고 만다.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신부(J. Morales, 1765~1815)가 그를 이어 받았지만, 그 역시 처형되고 만다.

이들의 순교에 힘입어 1821년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했고, 이 지역은 모렐로스 신부의 이름을 따 모렐로스주가 됐다(이달고 초상화는 멕시코 1000페소 지폐에, 이달고와 모렐로스 초상화는 200페소 지폐에 그려져 있다).

독립은 됐지만, 이들이 내건 혁명의 절반인 농지개혁 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기독재를 한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P. Diaz, 1830~1915)는 오히려 모렐로스의 작은 마을들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공동경작지들을 빼앗아 대농장으로 만들었다. 메스티조(백인과 원주민의 혼혈) 말 조련사의 아들인 사파타는 결국 총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대농장을 공격해 땅을 압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멕시코 벽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멕시코의 역사, 특히 멕시코혁명을 이해해야 하기에, 나는 사파타의 고향을 찾았다. 사파타의 본거지였던 아얄라시에 들어서자, 사방이 사파타였다. 시 입구에는 도로 위에 세워진 대형 아치에 '아얄라시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와 함께 머리 위에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있는 사파타의 반신상이 나타났다.

▲ 사타파 고향 마을 입구에 세워진 아치에 그려진 사파타 그림 ⓒ손호철

시로 들어가자, 우리를 맞은 것은 좌우에 두 명의 여성과 함께 서 있는 사파타의 부조였다. 특이한 점은 왼쪽 여성이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의 남성중심적인 마초 문화 때문에 별 주목을 받고 있지 않지만, 멕시코혁명에서 여성들은 보급지원 등만이 아니라 전투에 직접 참여해 투쟁했다. 여성혁명군은 솔다데라(Soldaderas) 또는 아델라따(Adelitas)라 불렸고 이들의 활약을 노래한 '라 아델라타스'라는 노래는 유명하다.

▲ 사파타 부조. 무장한 모습의 왼쪽 여인이 인상적이다 ⓒ손호철

시장에는 장총을 든 사파타 동상이 세워져 있고, 사파타가 살던 생가가 있는 아네네쿠일코의 마을회관 벽에도 사파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는 글씨가 바래서 잘 읽을 수 없지만 "민중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정부에게 평화는 없다"라는 사파타의 구호가 쓰여 있었다.

한참을 들어가자, '사파타생가박물관'이 나타났다. 인적이 없어 문이 닫힌 줄 알았는데 다행히 열려 있었다. 문으로 들어가자, 벽에는 사파타의 사진을 프린트한 거대한 휘장이 나를 맞았다. 사파타의 혁명과정을 그린 여러 그림들을 지나가자, 사파타가 타던 말안장 두 개가 전시되어 있었다.

▲ 사파타 생가에 세워진 사파타기념관 ⓒ손호철

정원으로 향하자, 나를 압도한 것은 벽화였다. 비참한 농민들의 삶으로부터 이들을 혁명군으로 모집하는 사파타, 백마를 타고 전투를 지휘하는 사파타, 함정에 빠져 쓰러진 사파타 등 사파타의 일생을 그린 높이 4m, 길이 50m의 거대한 벽화였다. 가운데에는 사슬을 끊고 뛰어나오는 사파타가 자리잡고 있었다.

▲ 사파타 생애를 그린 엄청난 길이의 벽화 ⓒ손호철
▲ 벽화 앞에서 동행한 임영일 박사(오른쪽), 조효래 창원대 교수(오른쪽)와 기념촬영을 했다. ⓒ손호철

이 벽화를 보고 있자, 여러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것은 말론 브란도와 칼 맑스, 애니깽, 그리고 멕시코시티에 있는 혁명기념비였다. 개인적으로 사파타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0년이다. 그해 5월 광주민중항쟁을 '불순세력의 폭동'이라고 보도하라는 전두환의 보도지침에 저항해 싸우다가 언론사를 관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광주의 비극을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에 비디오대여점에 갔다가 <Viva, Zapata>라는 비디오를 발견했다. 195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스타인벡이 각색을 하고 엘리아 카잔(명감독이지만 매카시즘 시절 청문회에 나가 영화계의 좌파 명단을 확인해줘 그들의 일자리를 잃게 만든 '배신자')이 감독한 이 영화에는 말론 브란도가 사파타 역으로 나와 열연을 했다.

이 영화는 국내에는 2000년대 들어 <혁명아 자파타>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는데, 사파타가 매복한 정부군에 사살당할 때 그의 백마가 울부짖으며 뛰어올라 도망가는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멕시코에는 사파타가 죽지 않고 그의 상징인 백마를 타고 달려가는 것을 봤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농민들은 한 자루의 감자와 같다." 칼 맑스는 농민들이 자기 농지에 매달려 일하는 노동 과정의 고립 때문에 한 공장에 모여 일하는 노동자들과 달리 감자처럼 한 자루에 모아놓아도 단결하지 못하고 각각 분리되어 있을 뿐이라고 비판적으로 봤다. 그러나 러시아혁명보다도 먼저 일어난 20세기 최초의 혁명인 멕시코혁명, 그리고 이후 중국혁명, 베트남혁명 등 제3세계 혁명을 주도한 것은 바로 농민이었다.

제임스 스캇이란 학자는 '헤게모니와 농민'(1977)이란 글에서 맑스에 반박했다. 노동자는 맑스가 주목한 '집중성' 때문에 역으로 자본주의의 지배와 헤게모니에 쉽게 포섭되지만, 농민들은 고립성 때문에 헤게모니에 포섭되지 않고 공동경유지 등 오랫동안 지켜온 '도덕경제(최소한의 '생존'을 침해하지 않는)'가 비인간적인 시장경제에 위협받으면서 저항하게 된다는 것이다.

멕시코혁명은 세 단계를 거쳤다. 첫 단계(1910~1913년)는 온건한 '민주혁명 단계'로 독재자 디아즈에 대항해 북부의 대지주 프란시스코 마데로(F. Madrero, 1873~1922)가 반란을 일으켜 승리했다.

마데로는 반(反)디아즈 투쟁을 위해 농지개혁을 모호하게 약속해 사파타, 북쪽 지역의 농민군 사령관 판초 비야(P. Villa, 1878~1912) 등의 지지를 받았지만, 집권 후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사파타는 대농장주의 농지를 다시 빼앗아 나눠주는 아얄라 계획을 발표하고 마데로와 연대를 끊었다. 마데로가 고립되자 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 Huerta, 1854~1916)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마데라는 암살당했다.

2단계(1913~1914년)는 반우에르타 투쟁이다. 우에르타는 권력을 잡았지만, 미국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또 다른 대농장주인 베누스타아온 카란사(V. Carranza, 1859~1917)는 '헌법주의자'를 자칭하며 사파타, 판초 비야 등의 지지를 받아 반우에르타 투쟁에 나섰고 우레르타는 해외로 도주했다.

3단계(1914~1920년)는 (온건)헌정주의자와 (급진)혁명세력 간의 갈등이다. 집권한 카란사가 급진개혁에 소극적이자, 사파타, 비야 등은 카란사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멕시코시티를 점령했다. 하지만 비야군은 결정적 전투에서 패배했다. 사파타는 게릴라전을 벌이며 계속 싸워나갔지만, 1919년 카란사군의 위장 귀순 작전에 속아 접선지로 나갔다가 매복한 군에 암살당했다.

카란사 등 헌법주의자들이 사파타와 비야를 제거했지만, 이들이 대변한 민초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정치적 안정은 불가능했다. 이들은 결국 외국인기업 국유화, 정교분리, 교회 토지 소유 제한, 농지개혁, 노동자 보호 등 위로부터의 '급진개혁(이탈리아의 좌파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용어를 빌리자면, 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수동혁명')'을 단행했다. 사파타와 그를 따르던 사파티스타와 같은 혁명군 민초들이 표면적으로는 패배했지만, 멕시코의 급진적 개혁을 강제한 것이다. 멕시코 군부와 헌법주의자들은 '혁명을 제도화 한다'는 뜻의 '제도혁명당(PRI)'을 창설했고, 이 당은 처음으로 선거에서 패배한 2000년까지 70년 이상 '1당 독재'를 유지했다.

사파타와 '애니깽'.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광주학살에 저항하다가 떠나온 미국 유학 시절, 절망 속에서 거의 유일한 낙은 중고서점에서 보고 싶은 책을 싼 값에 사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중고서점에서 <야만의 멕시코(Barbarous Mexico)>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미국 기자가 멕시코를 여행하고 와 1911년 출판한 책인데, 유카탄 반도에 갔더니 동양인들이 사슬에 묶여있더라는 것이다. 놀라서 물어보니 "조선에서 왔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멕시코에 이민 온 한인들이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책으로 고발한 한 미국 기자의 1911년 저서 <야만의 멕시코> ⓒ손호철

이 책을 한국에 보내 취재해 보라고 했고, 그 이야기가 한인 멕시코 이민인 '애니깽'이란 이야기로 대중에게 소개됐다. 1905년 이민 브로커에 속아 멕시코로 온 이들 중 대부분은 양반들로, 사실상 노예였다. 이들을 구한 것이 바로 사파타와 멕시코혁명이었다. 혁명이 성공하자 멕시코 정부는 과거의 노예계약을 무효화시켰고 한인 이주자들은 자유인이 됐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혁명기념비다. 높이 67m로 세계에서 제일 큰 아치형 기념비인 이 기념물은 그 위에 올라가면 멕시코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기가 막힌 전망대다. 이곳에는 판초 비야로부터 마데로 전 대통령, 카란사 전 대통령 등 혁명에 기여한 인물들이 묻혀있다. 사파타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기이해 알아보니, 그는 고향에 묻혀있고 그의 후손들이 극렬 반대해 이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사파타도 자신을 암살하고 혁명정신을 희석시킨 카란사와 같이 묻혀있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 멕시코시티에 있는 혁명기념비. 혁명 공로자 중 사파타는 여기에 묻혀 있지 않다. ⓒ손호철

사파타의 고향을 돌아보며 느낀 것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와 같은 예술성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벽화들이 민초들의 일상에 같이 숨 쉬는 '일상의 예술'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 술집의 벽에도 '아네네실리오 90년의 전통축제'라는 이름 아래 스페인권의 유명 맥주인 '산 미구엘 동네'라는 깃발을 들고 마을사람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으로 그린 멋진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거기에도 커다란 사파타 초상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 사파타의 고향에는 술집 벽화에도 사파타가 그려질 정도로 사파타는 일상화되어 있다. ⓒ손호철

많은 사파타 벽화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길거리 담벼락에 이름 없는 누군가가 그렸을, 그의 얼굴이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멕시코시티로 돌아오는 내내, 아니 멕시코 여행 내내, 그 형형한 눈빛이 나를 따라오며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 거리 벽에 그려진 사파타의 형형한 눈빛이 멕시코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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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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