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예술 수단이다. 특히 대중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중요한 예술장르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가 '현대 민중벽화의 메카'인 멕시코와 오랜 내전 속에 '벽화 전쟁'으로 세계에서 단위면적 당 가장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는 북아일란드의 벨파스트를 다녀왔다. '벽화의 정치'에 대한 그의 글을 사진들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전쟁의 도구다."(파블로 피카소)
"유럽에는 사적 예술을 위한 사적 예술시장이 지배적이라면, 여기(멕시코)에서 우리의 예술은 수백만의 청중을 위한 것이다. 이젤 그림이 소수의 개인에게 속삭인다면 벽화는 대중에서 함성을 지른다."(다비드 시케이로스. 멕시코 화가)
"벽화는 최고의,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강력한 회화다 (…) 이는 민중, 아니 모두를 위한 것이다."(호세 오로스코. 멕시코 화가)
'세계 미술의 수도'는 어디일까? 당연히 파리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파리에 대적할 '또 다른' 세계 미술의 수도가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막강한 자금력으로 현대미술 작품들을 사 모은 '현대미술관(MOMA)' 등이 자리 잡고 있는 '현대미술의 수도' 뉴욕을 생각할 것이다. 나는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가 '또 다른 세계 미술의 수도'라고 생각한다,
멕시코시티는 파리나 뉴욕과는 전혀 다른 세계 미술의 수도다. 파리와 뉴욕이 이젤 위의 캔버스에 그려진, 돈 많은 부호 수집가들이나 미술관 벽에 걸린 전통적인 '애호가 미술'의 수도라면, 멕시코시티는 대중들 모두, 특히 힘없는 민초들이 보고 즐길 수 있도록 그린 '민중미술', '벽화 미술'의 수도다.

"1만5000년 동안 우리는 새로 발명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알타미라 이후에 모든 것은 퇴보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북스페인의 유명한 알타미라 벽화를 보고 이렇게 탄식했다. 바위라는 캔버스에 원시인들이 그린 벽화는 인류 최초의 예술이었으며, 인류 최초의 소통이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품은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로 약 5만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일종의 '고대 벽화'라고 할 수 있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3500~70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벽화 예술의 황금기는 르네상스 시기였다. 15세기 이탈리아는 인류역사상 벽화 예술의 절정으로, 우리들은 그 시기의 벽화들을 보러 이탈리아에 간다. 바티칸 성당의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명작 <최후의 심판>, 밀라노성당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등이 대표적인 예다.

벽화는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개인주의적인 '이젤 예술'에 밀려 그 빛을 잃었다가, 20세기 초 멕시코에서 두 번째 황금기를 맞게 된다. 20세기에 일어난 최초의 혁명인 멕시코 혁명 후 진보적 분위기에서 '멕시코 벽화의 3대 거장'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와 같은 진보적 화가들이 벽화 제작에 적극 나서고 정권이 재정 등 여러 면에서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멕시코 벽화운동은 멕시코의 역사, 식민주의, 자본주의 비판 등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벽화의 정치', '정치 투쟁으로서의 벽화'를 본격화시켰다. 당시 멕시코는 문맹이 많았기 때문에 역사교육, 정치교육으로 벽화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나는 보헤미안이 아니라 시민예술가다. 나는 각 예술가가 작은 신이고 각각이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고 각각 자신의 작은 부엌에서 자신의 추상적인 햄과 계란을 구워 먹는 그런 세상을 믿지 않는다. 세상에 유일하게 나쁜 그림이란 개인적 에고가 지배하는 그림이다. 유럽에는 사적 예술을 위한 사적 예술시장이 지배적이라면, 여기(멕시코)에서 우리의 예술은 수백만의 청중을 위한 것이다. 이젤 그림이 소수의 개인에게 속삭인다면 벽화는 대중에서 함성을 지른다."
시케이로스의 주장이다. 당시 미술가들은 노조까지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들이 만든 '멕시코 기술노동자, 화가, 조각가 혁명노조 창립선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공벽화예술'은 "개인적 만족의 표현이 아니라 공공자산"이며 "예술적 표현을 사회화" 하는 것이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이제 사그라졌지만, 그 맥은 북아일랜드의 (가톨릭민족주의자들과 친영국신교세력 간의) '벽화전쟁'으로, 그리고 1960년대 뉴욕의 갱단으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번진 그래피티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피티는 대부분 주인의 허가 없이 그리기 때문에 처벌 대상이며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일부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해 세계 주요 도시의 거리와 벽 등에 작품을 만들고 있는 뱅크시(Bankcy)는 세계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어두운 풍자와 탁월한 예술성으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몇 년 전 런던에서 엥겔스가 살았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앞에도 장소에 맞게 영국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뱅크시의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1988년 말 연세대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노동자'라는 대형 걸개그림이 등장했다. 이후 집회 현장에 자주 등장하는 걸개그림도 공공예술과 벽화운동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이동식 벽화'다. 중요한 차이점은 멕시코 벽화는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아 제작된 만큼 공공장소에 영구보존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20세기 멕시코 벽화에서 주목할 것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처럼 '사회성'을 강조하면서도 구 소련·동구처럼 교조적이고 기계적이지 않으며, 미학적으로도 뛰어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제1세계(서구)의 '이젤아트'뿐만 아니라 제2세계(구 소련·동구)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도 다른, 미술에, 아니 예술에 있어서 '제3세계의 제3의 길’을 추구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화가를 꿈꾸며 그림을 그리다가 부모님의 반대로 미대를 가지 못하고 정치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 바람에 투옥, 제적, 강제징집, 해직 등 '엉뚱한 길'을 가야했지만, 그림에 대한 관심은 계속 갖고 있었다. 특히 '실천적 미술'에 관심이 많아, 공산주의자였던 피카소의 행적을 답사한 뒤 피카소 기행을 <경향신문>에 연재한 바 있다.
멕시코 벽화도 여러 책을 해외에 주문해 공부해 왔고 멕시코를 여러 번 여행하면서 민중벽화도 어느 정도 감상했다. 하지만 체계적인 벽화 기행은 못 했기 때문에 오롯이 민중벽화를 보기 위한 여행을 꿈꿔오다가, 3명의 벽화 거장들과 벽화 작가는 아니지만 디에고의 부인으로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프리다 칼로, 이들의 뿌리인 멕시코 혁명, 그리고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운동을 찾아 지난 봄 열흘간 멕시코 답사를 갔다 왔다.
북아일랜드의 벽화 전쟁은 2023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를 중심으로 일주일간 답사를 다녀왔다. 그 역사적 배경과 가톨릭민족주의 지역의 벽화, 신교도 영국연합파 지역 벽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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