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리 의장국에 APEC 주최까지…중심에 선 한국, 전환시대의 논리 찾아야

[정욱식 칼럼] 한미동맹 이대로 좋은가? (끝) '핵 기반 동맹'에서 '핵군축' 동맹으로

한국 외교의 가장 큰 숙제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 비핵화 딜레마'를 푸는 데에 있다. 비핵화 원칙 고수와 이것이 불가능해진 현실 사이의 괴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9월 3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중국의 전승절 장면도 이러한 맥락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천안문 망루에 올라선 26개국 정상 가운데 핵보유국 지도자는 세 명이었다. 주최 측인 중국의 시진핑 주석,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트리오'가 무대 정중앙에 등장하자 국내외 언론은 '반미, 반서방 연대'가 떴다는 취지의 보도를 쏟아냈다. 하지만 앞선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중러를 한미일처럼 하나로 묶는 것은 '과민반응'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김 위원장의 방중 성사 배경과 그 의도에 있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중국은 이전에도 김 위원장의 방중을 타진했었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무산됐었다. 여기서 입장 차이란 핵보유국 지위 인정이라는 조선의 요구와 그럴 수 없다는 중국의 거절을 말한다.

이번엔 이 차이가 좁혀진 것일까? '상대방의 입장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수준의 타협이 있을 수 있다. 즉 중국은 핵보유국을 자처하는 조선의 입장을 문제 삼지 않고, 조선은 '조선을 공식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절충이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분석의 타당성을 떠나 북중러는 사실상 비핵화를 내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과 러시아는 "비핵화는 지나간 얘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중국은 비핵화에 대해 가급적 언급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미일의 공식적인 입장은 "북한의 비핵화" 혹은 "한반도 비핵화"이다. 외관상으론 비핵화를 두고 한미일 대 북중러의 갈등 구조가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런데 이 구도에 강력한 'X 맨'이 존재한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1기 때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트럼프는 2기 들어 화법을 크게 달리하고 있다. 한편으론 조선을 핵보유국으로 부르고, 다른 한편으론 '비핵화의 주소'로 다른 곳을 짚는다. 당연히 "북한의 비핵화"나 "한반도 비핵화"를 말할 법한데, 미중러 등 핵 강대국들이 먼저 핵군축에 나서고 조선 등 다른 핵보유국들도 동참해 세계를 비핵화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다. 이게 2기 때 목표 가운데 하나라고도 강조한다.

푸틴 대통령의 인정과 시진핑 주선의 묵인을 받아낸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진의가 궁금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취지가 조선을 핵보유국으로 대우하면서 세계의 핵군축과 비핵화를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하자는 것인지, 만나서 조선의 핵포기를 압박하기 위한 '립 서비스'인지를 타진하고 싶을 것이다.

이에 따라 관심의 초점은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를 전후해 두 정상의 만남이 이뤄질 것인가로 모아진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만남을 원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APEC 회의에 참석하거나 판문점 남측 지역을 방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떠올려볼 수 있는 시나리오는 트럼프 대통령이 만남을 제안하고 김 위원장이 판문점 북측 등으로 와달라고 역제안을 해 '탐색적 대화'를 갖는 방식이다.

두 정상의 '번개팅'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핵문제에 관해 한미동맹이 실효적인 대안을 만드는 게 매우 중요하다. 기존처럼 조선을 상대로는 비핵화를 고수하고 한미동맹 차원에선 윤석열-바이든 시기에 만들어진 '핵 기반 동맹'을 유지하면, 악순환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한미동맹을 '핵군축 동맹'으로 진화하는 데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의 핵군축과 비핵화를 주된 화두로 던지고 있기에 황당한 얘기만은 아닐 수 있다.

핵군축 동맹은 세계의 핵군축과 비핵화를 향해 한미가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것을 대전제로 한다. 조선을 향해서는 이러한 노력에 동참을 요구하면서 북핵 동결과 감축부터 추진하는 것이다. 한미동맹 차원에선 지난 3년 간 한층 강화되어온 미국 확장 억제의 가시성과 강도를 낮춰가는 것이다. 한국은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증폭시킬 수 있는 '핵 잠재력 확보' 시도를 내려놓는 것이다.

한미 정상 간 이러한 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이 열리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9월 23일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이 예정되어 있다. 사전 협의를 거쳐 두 정상이 세계의 핵군축 필요성을 공론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또 한국은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이다. 의장국은 안보리 전체 회의 토의 안건을 상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만큼, 이재명 정부는 핵군축 문제를 안보리에서 논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10월 말에는 APEC 회담이 열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중러가 먼저 핵군축 논의를 하자는 입장인데, 시진핑 주석의 참석은 거의 확실하고 러시아 고위 관료도 올 것으로 보인다. 유엔을 거쳐 APEC 회의에서도 핵군축을 주요 화두로 삼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이를 발판으로 삼아 '핵위협과 핵무기가 없는 세계'라는 큰 그릇에 한반도 핵문제도 담아낼 수 있는 전환시대의 지혜를 발휘하길 바란다.

▲ 이재명 대통령이 8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최근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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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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