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강제 노역이 이뤄졌던 사도(佐渡)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 윤석열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성과라고 밝혔던 노동자 추도식에 한국 정부가 지난에 이어 올해도 불참 결정을 내렸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원만해 보이던 한일 관계가 과거사 문제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삐걱거리게 됐다.
4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오는 13일로 예정된 사도 광산 추도식과 관련 "정부는 올해 추도식이 한국인 노동자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방향으로 온전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일측과 협의했다"며 "그러나 결과적으로 핵심 쟁점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결국 올해 추도식에 참석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핵심 쟁점은 추도사 내용 중 강제성에 관한 표현에 대한 것"이라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이 문제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한국은 해당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됐다고 보는 반면, 일본은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접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 정부는 고인이 된 사도 광산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합당한 애도가 있으려면 그 고난의 근원과 성격이 무엇이었는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즉 한국인 노동자들이 의사에 관하여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해야 했다는 것이 적절히 표현되어야 추도문의 격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양측의 추도사 내용 중 노동의 강제성에 관한 구체 표현에 대해 접점을 찾지 못했다"며 "사실 추도사 자체는 협상의 영역은 아니고 각자의 입장에 기반하여 추도식의 취지에 맞게 시행하면 되는 사항이지만, 추도사를 통해 강제 동원에 관한 양측의 인식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인식 위에서 추도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추도사에 대해서도 일측과 의견을 교환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측은 추도사의 여러 표현을 진지하게 검토했다면서 우리에게 설명해왔는데 우리가 추도식에 참석할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이 당국자는 추도식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유족을 모시고 참석하기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불참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7월 26일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등재와 관련한 한일 합의를 이뤘을 때, 매년 7~8월에 진행되는 추도식에 일본 정부 관계자가 참석하는 것을 성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해에도 과거사에 대한 일본 측의 부적절한 태도가 문제가 됐다. 당시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 우익의 전형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인 이쿠이나 아키코(生稲晃子) 정무관을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시키겠다고 결정하면서 결국 한국측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일본 측의 과거사에 대한 부적절한 태도로 또 다시 불참을 결정하면서 유네스코 등재 성과 자체가 무색해진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이와 관련 이 당국자는 "비록 올해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정부는 여전히 사도 광산 추도식이 그 취지와 성격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어 개최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는"추도식은 사도 광산 유네스코 등재 당시 한일 양측 합의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앞으로 우리 측이 추도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일측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며 정부는 그러한 방향으로 지속 협의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일본이 이처럼 유네스코 등재 당시 한국과 했던 약속을 어기고 있는 상황인데, 등재 자체에 문제를 제기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이 당국자는 "세계유산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등재 취소 등은 물리적인 손상이 있어야 가능하고 그 외에 다른 이유로는 어렵다"며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향후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사도 광산 추도식 문제로 한일 간 갈등을 빚으면서 17년 만에 한일 정상회담문을 채택하며 순조롭게 이어나갈 것으로 보였던 한일 관계에도 일정한 마찰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일본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향하는 공군 1호기에서 "저도 과거부터 과거사 문제나 영토 문제 등은 시정해야 한다고 수도 없이 말씀드려왔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경제·안보·기후·국민교류 등의 협력을 다 팽개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씀도 드렸다"며 '투 트랙'접근을 강조하고 있는데, 과거사 트랙에서의 이러한 일본의 완강한 태도에 어떻게 대응할지도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됐다.
특히 이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와 한일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에 대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유감스럽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사도 광산 추도식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과거사 문제를 두고 이 대통령의 부담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식민지역사박물관 등은 공동성명을 통해 "사도광산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의 특별 전시에서도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명백한 강제동원의 증거인 '반도노동자명부'또한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이는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일본 정부가 과연 어떠한 역사 인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일본 정부의 기만적인 태도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지난해 개최됐던 추도식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 행사가 아니라 '일본 사도광산 추도식 실행위원회'라는 민간단체가 주최하고, 희생자의 실태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졸속으로 치러진 윤석열 굴욕외교의 연장선"이었다며 "윤석열 정부가 피해자의 인권과 존엄을 무시하고 역사 정의를 외면한 ‘제3자 변제'를 추진하는 등 윤석열표 대일 굴욕외교가 낳은 또 하나의 외교 참사였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한국 정부가 기대하는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모습'은 반도노무자명부를 공개하고, 일본 정부가 주최하는 추도식에 희생자 유족을 초청하여 일본 정부 대표자가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것이어야 한다"라며 이재명 정부가 일본 측에 사도광산에 근무했던 노동자 명부를 공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가 밝힌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는 역사를 직시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며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부정하는 일본 정부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정부 예산으로 별도의 추도식을 개최한다는 입장이다. 아직 정확한 일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해에도 현지에서 일본이 주관하는 추도식이 아닌 별도의 추도식을 개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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