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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이 병실을 삼켰다. 복도 끝에서 군화 발소리가 울리고, 그들의 짧고 거친 지시가 공기를 갈랐다. 군인들이 병원 옆 군사 기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2014년 봄, 그는 그렇게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시 찾아온 아침은 어제와는 다른 아침이었다. 창밖에는 낯선 깃발과 군용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의 아침을 맞이했다.
듬첸코 아나스타샤. 태어난 곳은 우크라이나, 자란 곳은 크림반도. 그러나 그날 이후, 그의 국적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바뀌었다.
그는 여전히 말한다.
"저는, 우크라이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날, 어둠 속에서 배운 건 단 하나였다. 국적은 너무도 쉽게 바뀐다는 점이다.

바다를 품은 도시의 소녀
전쟁. 무거운 주제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붉은 머리, 흰 피부와 함께 환한 미소가 보였다. 마치 그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카메라는 어디를 바라보면 돼요?"
한국외대 학생인 듬첸코 아나스타샤(26, 이하 네스)가 첫 인사와 함께 건넨 말이었다.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며 농담처럼 주고받는 대화 속에 웃음이 번졌다.
네스의 여권에는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서부, 폴란드와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다. 우크라이나 중에서도 가장 '우크라이나답다'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부모님의 일로 크림반도로 이주한 이후, 그의 어린 시절은 크림반도에서 완전히 뿌리내렸다.
그는 어린 시절을 바다와 함께했다. 도시의 경계는 해안선이었고,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자연스러운 배경음이 됐다. 크림반도의 남동쪽, 페오도시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에서 바다를 보며 자랐다. 관광 시즌이면 도시는 외지인들로 북적였다. 사방이 민박집이었고, 기념품 가판대가 골목마다 빼곡했다. 부모님은 그 도시에서 지도를 만들었고, 관광 책자를 그리는 출판사를 운영했다. 어머니는 화가였고, 아버지는 기술자였다.
"여름이면 온 가족이 함께 출판 작업에 매달렸어요. 손으로 그린 거리, 손으로 그린 집들…"
그는 파도 냄새와 바닷바람을 설명하던 중, 잠시 말을 멈췄다. 울먹이는 듯했다. 앞서 보인 웃음은 무거운 감정을 숨기기 위한 무장이 아니었을까.
일곱 살 무렵부터 그는 종이를 접고, 카드를 정리하고, 지도를 묶는 법을 배웠다. 지금도 인터넷 검색을 하면 어머니가 그린 도시 지도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관광객이 모두 떠난 9월이었다. 바다는 다시 조용해졌고, 그제야 원래 주인이 돌아온 듯했다. 부모님, 언니, 할머니, 그리고 반려견들과 함께 작은 마을로 떠났던 날들. 관광객들이 찾지 않는 바닷가에서 하루 종일 가족과 물놀이하고, 저녁에는 젖은 머리로 차 안에서 웃었던 기억. 그때의 바다는 이제 사진 속에만 남아 있다.
"집에 간 지 벌써 6년 넘었어요."
그는 아직도 그 바다를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눈 떠보니 러시아
열다섯 살이 되던 그해 봄, 그는 병원에 있었다. 폐에 염증이 생겨 입원 중이었다. 정치도, 군사도, 전쟁도 아직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고 믿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날 밤, 병원 전체의 불이 꺼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전쟁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거리에 낯선 군복이 등장했고, 학교의 국기가 바뀌었다. 화폐와 언어는 바뀌었고, 진학 계획까지 흐릿해졌다. 그는 매일 '공포'라는 감정이 조금씩 뿌리내리는 것을 느꼈다. "전날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다음 날 눈을 뜨니 다른 나라가 돼 있었어요"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그 누구도 그 변화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러시아 합병 동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는 형식에 불과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러시아의 합병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러시아가 오지 않았다면, 2014년 동부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 벌어진 돈바스 전쟁이 크림반도에서도 일어났으리라는 이유다.
10년이 넘은 지금, 네스는 다들 "이제 와서 이걸 말해 뭐 해"라며 언급 자체를 꺼리게 됐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많은 크림반도인들은 여전히 생각한다.
"나는 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어느 날 눈떠 보니 다른 나라 사람이 돼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고 합병이 강행됐다"(2014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점령했다. 러시아 측 명분은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 과정에서 크림반도의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크림반도는 러시아 영토가 됐다. 편집자)

무너진 교실, 사라진 꿈
전기가 들어오고, 군인들이 물러간 뒤에도 그의 일상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칠판 위 국기는 하루아침에 바뀌었고, 교실엔 새 교과서가 배포됐다. 시험 과목은 뒤바뀌었고, 시험 문제도 더이상 우크라이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문학을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에 들어설 무렵엔 문학과 우크라이나어, 영어 과목으로 대학에 진학할 계획을 세워두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병합 이후, 그 계획은 모두 무효가 됐다.
"수능을 준비하던 한국 학생에게 갑자기 중국 대입 시험을 보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는 그때의 혼란을 이렇게 설명한다. 언어가 바뀌었고, 우크라이나 문학 시험 대신 러시아 문학으로 치러지는 낯선 시험이 등장했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과목을 다시 처음부터 익혀야 했다. 익숙한 교사들은 떠났고, 남은 교사들도 다른 언어로 지시했다.
학교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대학도, 행정도,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우크라이나 본토의 대학들은 크림반도 출신 학생들의 입학을 막았다. 러시아 대학은 "합격하면 오는 거고, 안 되면 말라"는 식의 태도였다. 그는 소속 없는 존재가 됐다.
그 와중에도 그는 시험을 치렀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병을 얻었고, 그는 교과서를 덮고 간병인을 자처했다. 십대 소녀가 감당하기엔 벅찬 세상이, 그의 책상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져 있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한국에 도착한 첫날, 그는 처음으로 "살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끌고 공항을 나섰을 때, 하늘은 맑았고, 거리는 평안했다. 군인도, 경찰도, 검색대도 보이지 않았다. 낯설고 복잡한 도시였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 일에만 몰두했고, 아무도 그의 정체성이나 국적, 출신을 묻지 않았다. 크림반도에서는 단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평범함이었다. 서울이 그에게 준 것은 안전이었다. 그러나 그 안전은 잠시 빌려 입은 평화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엔 창밖으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만 들어도 불안감이 몰려왔다. 제주도에서 고향 바다의 냄새를 맡았을 땐 눈물이 났다.
"처음으로 이곳도 집이 될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그 순간조차 미안했어요. 가족을 두고 저 혼자만 안전한 것 같았거든요. (…) 아마 구소련 국가에서 온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라고 물으면 다들 첫 번째로 '안전'이라고 할 거예요."
전쟁 초반, 그는 젤렌스키를 지지했다. "군복 입고 시내에서 직접 찍은 영상을 올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푸틴처럼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전쟁을 끝내거나 최소한 휴전을 이끌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고 생각한다. "군사적 대응뿐아니라 대화나 휴전도 시도했어야 해요. 하지만 그런 시도가 없었어요"
"언니랑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복무 중인 오빠 방탄복을 사줬어요. 정부가 안 주니까요. 이런 게 말이 되나요?"
무기 지원이 실제 전선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의혹, 전쟁이 젤렌스키 정부에 이익이 되는 구조, 그리고 계속되는 희생이 그를 실망케 했다. "지금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아요.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국민의 안녕을 지키는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국가는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가의 의무를 이렇게 정의한다.
"첫째, 국가는 다른 나라의 폭력과 침략에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
둘째, 국가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에서 보호하기 위해 사법제도를 엄정하게 세워야 한다.
셋째, 국가는 사회 전체에는 큰 이익을 주지만 거기서 나오는 이윤이 비용을 보상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없는 공공사업과 공공기구를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국부론> 제5편 제1장)
그의 경험은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닌, 일상 그 자체로 보여준다.

다시 시작된 공포
2022년 2월. 푸틴이 특별 메시지를 발표하자 곧바로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친구는 네스에게 영상을 보내며 "쟤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물었고, 네스는 "나도 모르겠어. 미친 거 아냐?"라고 답했다.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비나치화 이야기를 했지만, 그에게는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21세기에, 그것도 가까운 나라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이 전쟁이 2022년에 시작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미 2014년부터 돈바스 전쟁이 있었고, 8년 동안 이어져 왔던 것이다. 단지 이번에는 나라 전체가 전쟁터가 된 것이다.
그날 네스의 머릿속에는 오직 거기에 있는 사람들 생각뿐이었다. 가족에게 송금하기 위해 통장 잔액을 확인하며 언니에게 말했다. "차 가져가. 서류 챙겨서 국경으로 가. 폴란드까지 멀긴 해도 지금 나가야 해."
언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미 못 나가. 우리 도시랑 다른 도시를 잇는 길이 폭격당했어. 나가면 더 위험해. 총알이든 폭격이든 맞을 거야." 그 순간, 네스는 비록 한국에 있었지만 모든 공포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무서웠어요. 그냥 뉴스만 보고 있는데도, 그 모든 게 그대로 느껴졌어요."
전쟁이 시작되자 네스의 오빠는 곧바로 전선으로 향했다. 그는 과거 돈바스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다. "집에 있을 수 없다. 지킬 사람이 많다"는 말만 남겼다.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렸고, 스피커폰 너머로 폭격과 총성,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네스는 오빠와 자주 연락하진 않는다. 여느 현실 남매처럼, 대화도 잘 안 하는 서먹한 관계다. 어릴 적부터 나이 차이가 커 함께 한 시간이 거의 없기도 했다. "오빠가 16살일 때 저는 겨우 네 살이었어요" 하지만 인터뷰 내내 그를 울먹이게 한 건 오빠 이야기였다. 지금도 한두 주에 한 번 정도 "나 살아 있어. 괜찮아" 연락만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언니와는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영상통화 중 창밖을 스치는 비행음과 폭발음을 들었고, 전기가 끊겨 통화가 갑자기 종료된 적도 있었다. 서울의 아침 6시, 학교 갈 준비를 하던 네스는 언니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 집 근처에 폭격이 있었어. 고양이 데리고, 창문에서 먼 복도에 앉아 있어."
집 근처에 폭격이 떨어져 창문이 모두 깨진 적도 있었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다. "어차피 또 깨질 거니까, 그냥 다른 걸로 막아놨어" 그것이 전쟁의 현실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전선 가까이에서 각자의 일을 계속한다. 형부는 군에서 군용 차량을 정비하고, 언니는 피난민과 전상자를 돕는 자선재단 일을 한다. 전쟁 중 입양한 개와 고양이는 또 다른 가족이 됐다.
대화는 전쟁 이야기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죽으면 뭐 죽는 거고, 아니면 또 일하러 간다" 언니의 이 말속에는 지친 체념과 버티는 힘이 함께 있었다. 깨진 창문처럼 그들의 하루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지만, 그 틈새로 바람과 빛을 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뉴스에 없는 현실
네스가 본 현실과 뉴스 속 현실은 전혀 달랐다. "전부요. 사실상 모든 게 달라요" 러시아 뉴스, 우크라이나 뉴스, 그리고 국제 뉴스까지 모두 보지만, 어느 것도 모든 이야기를 담지 못했다. 각자 한쪽 시선만 보여줄 뿐이었다. 러시아 뉴스는 거의 선전에 가까웠다. "러시아가 이기고 있다"는 말이 반복됐지만, 실제로는 우크라이나가 밀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네스는 사람들이 X(옛 트위터)에 올리는 현장 글을 더 신뢰했다. "내 주변에서 폭격이 있었다"는 즉각적인 기록, 사진과 영상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보고였다. 언론 보도는 대부분 군사 작전과 성과에 집중했지만, 그가 알고 싶은 건 가족과 시민들의 이야기였다. "우리 군이 200미터를 밀어냈다"는 전투 소식보다는, 집을 잃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중요했다.
보도되지 않은 일도 많았다. 모든 폭격, 모든 사망, 모든 파괴를 언론이 일일이 전할 수는 없으니, 수많은 사건이 그냥 사라졌다. 언니가 전해준 도시의 이야기처럼, 헬스장과 수영장이 있는 시 운영 스포츠 단지가 네 번 폭격당하고도 문을 닫지 않은 채 깨진 창문을 나무판으로 막아 가며 운영을 이어가는 일은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네스는 이렇게 사라지는 일들이야말로 진짜 현실이라고 말한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작은 폭격, 부상, 일상의 파괴야말로 사람들이 견디는 고통의 실체다. 하지만 언론은 이런 목소리를 거의 담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말하기로 했다. 누군가 말하지 않으면, 이 현실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침묵의 공백'을, 모스크바 유학 시절 뼈저리게 경험했다.
크림반도 합병 이후 네스는 모스크바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그곳에서 마주한 건 철저한 고립이었다. 주변에선 아무도 그의 생각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러시아 국영 언론은 크림반도의 목소리를 지워버렸다.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어요. 아무한테도 제 생각을 말할 수 없었거든요."
러시아에서 그는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미디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프로파간다가 어떤 방식으로 퍼지는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러시아 국영 방송국에서 잠시 일했을 때, 뉴스가 다시 쓰이고 불편한 사실이 지워지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내가 러시아에서 기자 생활을 계속하면 죽겠구나". 그날 이후, 더는 그곳에 남을 수 없었다.
네스의 동료 기자 일부는 살해당했고, 일부는 러시아 감옥에서 복역 중이다. 전쟁을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 이유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이번 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어, 공개적으로 '전쟁'이라고 부르면 처벌한다. 대신 '특별 군사 작전'이라는 용어를 강제한다.

나는 크림반도인이자, 우크라이나인입니다
"어디에서 왔어요?" 낯선 땅에서 종종 듣는 이 질문에 네스는 늘 같은 방식으로 답한다.
"크림반도에서요." 그리고 짧은 침묵 끝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저는 우크라이나 사람이에요."
그에게 국적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언어, 기억, 유년기, 그리고 가족의 방식에 걸쳐 있는 정체성이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어로 대화했고, 학교 교육도 대부분 우크라이나어로 진행됐다. 러시아어는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수업 시간에나 등장하는 외국어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거리의 간판이 바뀌고, 교과서가 교체되고, 여권의 문구가 달라졌을 때, 그는 누군가의 '결정 하나'만으로도 한 사람의 정체성이 조각나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크림반도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크림반도인'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수많은 지배와 전쟁, 추방과 귀환이 뒤섞인 땅. 그곳은 한때 그리스가 지배했고, 또 로마의 식민지였고, 오스만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은 복잡한 장소다. 제국의 침략과 수탈의 땅 그 자체였다. 이는 정체성의 표류로 이어지기도 한다.
러시아의 입맛에 맞지 않는 목소리는 '외국 대리인'으로 낙인찍혔고, 우크라이나 본토에서는 크림 출신이라는 이유로 '회색 지대의 사람들' 취급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그 도시는 이제 러시아 땅이라고 알려졌지만, 저는 거기서 우크라이나인으로 자랐어요.“
그래서 그는 오늘도 같은 문장을 반복한다. 이 문장이 언젠가 설명 없이도 통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나는 크림반도인이자, 우크라이나인입니다."

대포 대신 축포를
전쟁이 끝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네스는 살짝 웃으며 말한다. "불꽃놀이요. 제일 먼저 폭죽을 터뜨릴 거예요." 순간의 기쁨을 터뜨리는 불꽃. 밤하늘을 수놓는 그 밝은 소리. 그건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작고도 커다란 의식일 것이다.
그는 아마 곧 울게 될 거라고도 했다. 그는 본래도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고,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무너질 것 같다고 했다. "정말 많이 울 것 같아요. 그리고 바로 언니에게 전화하겠죠. 영상통화로요."
그는 이 전쟁에 승자가 없다고 믿는다. 너무 많은 상실이 있었고, 너무 많은 이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고도 한다. 그의 꿈은 단순했다. 언젠가 가족들과 다시 크림반도에 가는 것. 그 땅이 어떤 국기 아래 있든 상관없다. 그는 단지 자신이 자란 바다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 작은 도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 맑은 물의 바다요. 제가 자랐던 그 해변에서, 다시 한번 걷고 싶어요.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그는 축하의 불꽃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날 밤, 비로소 걱정 없이 잘 수 있는 잠을 상상한다. 오빠에게서, 언니에게서 더는 "무사하다"는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밤. 폭격음이나 미사일 그림자가 없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푸른 하늘 아래의 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네스는 하루하루를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이곳에서 하루 세 끼를 먹고 잠을 잘 때, 오빠는 최전방에서 총을 들고 있고, 언니는 폭격으로 깨진 창문 아래서 지내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언니 괜찮아?" "오늘은 조용했어?" "전기 끊긴 거 복구됐어?" 질문은 평범하지만, 그날 하루를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는 생존 확인서다.
네스는 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그에게 진짜 평화는 하늘 아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다. 총성이 없는 날, 폭격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되는 날, 사람들이 숨소리를 낮추지 않아도 되는 날. 그냥 가족이 살아 있고, 잠을 잘 수 있고, 먹을 게 있고,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 있는 날. 푸른 하늘이 있고, 조용한 날
그는 알고 있다. 평화는 누군가가 대신 싸워서 얻어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걸. 그래서 자신도 계속 말하고, 기록하고, 연결하려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서,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권위주의에 맞서 목소리를 내다 사라진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려 한다.
그가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도 그것이었다. 사람들이 사상자 수와 같은 '숫자'로만 기억되지 않도록. 전쟁은 정부가 시작했지만, 싸우고 살아남고, 울고 웃고, 서로를 지키는 건 결국 '사람'이라고. 그는 끝까지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조용히 부탁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도요. 어떤 전쟁도, 그 시작과 끝엔 사람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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