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 달 새 미국 보건·통계·중앙은행 등 독립성을 보장 받아야 할 기관 지도부를 연이어 해임 통보하며 정치적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 정치적 압력으로 이들 기관 및 이들이 생산하는 정보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면 향후 정책 수행이 어려워질 뿐 아니라 대중이 더 쉽게 음모론으로 기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곳곳에 주방위군을 투입하고 기업에도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권한 극대화를 추구함에 따라 민주주의 훼손 비판도 커진다.
28일(이하 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 <AP> 통신을 포함한 복수의 외신은 소식통 등을 인용해 전날 전격 해임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수전 모나레즈 국장의 자리를 짐 오닐 보건복지부 부장관이 직무대행 자격으로 채울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투자업계 출신인 오닐은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부 장관의 측근으로 그의 백신 정책 변경을 지원할 것으로 전망된다.
외신은 모나레즈가 취임 한 달도 안 돼 해임된 것이 백신음모론자로 불리는 케네디 장관의 백신 정책 변경에 저항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28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모나레즈와 전날 통화한 전 CDC 국장대행 리처스 베서는 취재진에 "그(모나레즈)는 이 일을 하면서 절대 해선 안 될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불법으로 간주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일인데 그 둘 모두를 요구 받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전날 케네디 장관은 코로나19 백신 접종 승인 대상을 고위험군으로 제한해 접종 대상을 크게 축소했다. 이는 생후 6개월 이상 국민에 매년 백신 접종을 권고했던 이전 지침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케네디 장관은 지난 6월엔 백신 접종 용량과 연령에 대한 권고를 제시하는 백신 자문위원회를 해체하는 등 미국의 백신 정책 방향을 뒤집는 중이다.
27일 모나레즈의 변호인은 모나레즈가 "비과학적이고 무모한 지시를 잘 살피지도 않고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다"며 "정치적 의제에 복무하는 게 아니라 대중을 보호하는 걸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목표물이 됐다"고 비판했다.
모나레스 해임 뒤 다른 세 명의 CDC 고위 당국자들도 사임했는데 이들 또한 <로이터>에 케네디 장관과 그의 팀이 압박한 백신 반대 정책과 잘못된 정보 탓에 조직을 떠나게 됐다고 털어놨다.
CDC 국장 해임은 지난 25일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리사 쿡 이사 해임 통보, 지난 1일 에리카 맥엔타퍼 노동통계국(BLS) 국장 해임에 이어 발생했다. 미국인의 건강 보호 및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 유지를 위해 독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존재하는 기관에 대한 정치적 장악 시도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정권은 이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를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채우려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6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연준에서 곧 "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노골적 의도를 드러냈다. 앞서 새 노동통계국장엔 보수 싱크탱크 출신 경제학자 EJ 앤토니가 지명됐다.
<뉴욕타임스>(NYT)는 미 아메리칸대 교수 크리스 에델슨이 이러한 기관들은 "당파적이어선 안 된다"며 "가장 큰 위험은 기관이 신뢰를 잃고 대중이 이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고 전했다.
공공기관 및 공식 통계에 대한 신뢰 저하는 대중을 쉽게 음모론의 먹잇감이 되도록 한다. 때문에 지지층에 극우 음모론자들이 포함된 트럼프 정권에 기관 독립성을 해하는 것은 기관을 직접 장악해 뜻대로 휘두르는 것 이상의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윌리엄 갤스턴 선임연구원이 일련의 해임 사태를 "행정권을 대통령의 손에 집중시키고 독립성을 줄이거나 없애며 자신의 뜻에 반하지 않는 이들을 채우고 정부 내 경쟁 부처의 권한은 줄이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포괄적 조처"라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1기부터 원했던 "대통령직에 대한 극대주의적 상상을 현실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권한 한계 시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월 이민세관단속국(ICE) 이민자 단속에 대한 항의 시위가 일자 주 정부의 반대에도 주방위군과 해병대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투입했고 이달엔 치안 강화를 이유로 워싱턴DC에 주방위군을 배치했다.
트럼프 정부는 기업에도 직접적 영향력을 발휘해 최근 보조금을 빌미로 인텔 지분 10%를 확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엔 엔 코카콜라에 미국에 옥수수 시럽이 아닌 사탕수수 설탕을 사용한 제품을 내놓으라는 압박까지 가했다.
이렇듯 트럼프 정부가 미국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관련 발언 수위도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26일 국무회의에서 자신이 미국 어느 주에나 주방위군을 배치할 수 있다며 "나에게 내가 원하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일리노이주 시카고에도 범죄 척결을 명분으로 주방위군을 배치할 수 있다는 전망 속에서 나왔다. 민주당 소속 JB 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는 주방위군 배치에 반대하며 트럼프를 "독재자 지망생"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6일 국무회의에서 이에 대해 "일리노이 주지사가 '트럼프는 독재자'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신은 그를 독재자라고 불렀지만 그가 범죄를 멈추게 했다면 원하는 뭐든 될 수 있다'고 한다. 난 독재자가 아니지만 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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