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병원 확충을 '이념적'이라 말하는 이들에게

[시민건강논평] '제자리 맴돌기'를 하고 있는 것은 공공병원 확충 반대론자들이다

최근 의대생·전공의 복귀 선언으로 의정갈등이 풀려가는 모양새다. 잘된 일이나 어차피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 이후 예상된 수순이었다. 의사들과 새 정부 모두 경제적·정치적 차원에서 딱히 손해 보지 않는 방식으로 '출구'가 열렸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애꿎은 환자와 시민들만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사과 없이 '학사유연화'라는 복귀 특혜를 누리는 의대생을 보며 분노와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의사 집단과 정부는 시민들이 겪은 사회적 고통에 대한 '청구서'를 받아야 한다. 특히 정부에 보내는 청구서 목록에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방지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근본 대책 수립과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되었던 필수·지역의료 붕괴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러한 고통을 유발하고 과소평가했던 관료와 전문가 시각이 아닌, 사람 중심 관점에서 모색하고 추진하는 보건의료개혁이어야 한다.

한데 정권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관점의 전환은 멀게만 보인다. 지난주 발표된 의사인력 수급추계위 구성을 보더라도 시민과 지역의 관점을 대변해 줄 목소리는 크지 않은 듯 하다. 공급자·수요자·학계라는 형식적 균형 이면에는 늘 "하던 대로" 하겠다는 관료 편의적 발상만 읽힐 뿐이다. 아마도 추계위 안팎에서는 정부 국정과제인 '(가칭)공공의료사관학교' 설립에 필요한 정원을 얼마나,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증원 또는 기존 정원 재조정)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의대 정원도 중요하지만, 어떤 의사 양성 모델이 공공보건의료 '체계'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공공의료 분야 장기근무 의료인력 양성"이라는 전례 없는 목표를 제시한 만큼, 여기에 맞는 새로운 교육·훈련 과정을 개발하고 기존 의사 면허제를 비롯해 각종 얽혀 있는 법과 제도를 재정비하는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3차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과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 연구에는 향후 공공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을 수련하고 배치할 공공보건료기관들을 어떻게 마련하고 강화할 것인지에 대한 로드맵이 포함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추계위가 그렇듯 이 용역 연구들 역시, 공공병원 확충에 미온적이었던 오래된 정책 기조의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다.

그 까닭은 공공병원 확대 반대론이 정부와 학계 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보건의료 공공성 강화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도 공공병원 확대에 비판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그 반대 논리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들로, 주된 내용은 대략 이렇다(☞관련기사 바로가기).

"그 이유는 첫째, 이미 민간병원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민간병원이 공공의료를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것, 둘째, 공공병원을 짓는 데 드는 천문학적 예산은 세금낭비라는 것이다. 셋째, 많은 수의 공공병원을 짓고 난 후에 지속하는 엄청난 적자를 지자체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점, 넷째로는 이미 포화상태인 병상에 추가 설립하는 병원으로 인해 발생하는 기존 민간병원의 손실을 보상할 방안은 있느냐는 점…그동안 한 가지 핑계가 더 생겼다. 이미 있는 공공병원도 의사를 구하지 못하는 데 병원을 늘린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주장이다."

비효율적인 공공병원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기보다 민간 병원들이 공공의료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이른바 '기능적 공공성 강화론'인 것이다. 최근 세수 부족으로 정부의 재정 여력이 줄어든 것도 공공병원 확대 회의론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 되는 듯 하다. 그렇다보니 광주와 울산 등에서 공공병원 설립을 위해 지역 주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 역시 쉽지 상황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공공보건의료 강화에 대한 현정부의 입장이 전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이제 막 출범했는데 벌써부터 의료개혁의 방향성과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정부를 질타하는 게 맞느냐는 지적도 있던데, 바로 국정 기조가 구체화되는 정권 초기이기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게다가 이미 발표된 주요 계획과 비공식적으로 전해지는 내부 논의 상황을 보더라도, 공공병원 확대에 선을 긋는 방향으로 정책 방향이 굳어지는 분위기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오히려 공공병원 확충론을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낡고 경직된 주장을 무책임하게 관성적으로 되풀이하는, 일종의 교조주의적 접근으로 폄훼하는 인식도 적지 않은 듯 하다.

좋다. 어차피 정책 주도권을 쥔 쪽은 기능적 공공성론자들이니, 우리 사회가 당면한 보건의료위기를 타개하는 데 과연 그 길이 유일한 대안인지 설명할 책임 역시 그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던지는 다음 질문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만한 답을 제시하기 바란다.

첫째, 지난 코로나 팬데믹 시기, 시민들은 공공병원의 필요성을 체감했다. 동시에 민간 의료기관에 정책 당국이 '읍소'해 가며 협조를 구하고, 이들 병원에 대한 지원·보상에 수조 원 규모의 막대한 재정이 '비효율적'으로 쓰이는 모습을 보면서 민간 중심 체계의 한계를 깨달았다. 이제 주기적인 감염병 출현은 예측 가능한 상수가 되었다. 공공병원 확충과 기능 강화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민간 병원의 '자율적' 협조에 의존하는 방역·대응체계가 장기적 측면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더 비용효율적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라.

둘째, 지역의료불평등에 관한 질문이다. 공공병원과 민간 의료기관들의 효과적인 연계협력 체계 구축이 이 문제에 대한 핵심 대안으로 설정돼 있다. 그런데 지역쇠퇴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민간병원들 역시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경쟁은커녕 협력할 병원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병원과의 물리적 접근성이 중요하다는 건 의료의 기본 상식이다. 신속한 이송체계 구축만으로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서울 면적의 배 이상인데 인구는 3만, 5만에 불과한 지역에 건실한 병원을 유지할 방법은 공공 밖에 없다. 원격의료, AI 의료, 스마트홈헬스 등으로 응급 상황을 미리 파악해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런 디지털헬스 기술이 기존 아날로그 병원의 역할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라. 아울러 대체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한다면 이로 인한 건강피해는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자는 입장인지도 함께 밝혀라.

셋째, 기후위기 대응에 관한 질문이다. 아무리 생명과 건강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두는 보건의료라 할지라도 기후재난 시대를 맞아 환경 오염물질과 탄소 배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전면 재개편하는 것 역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민간 병원들이 탈탄소화 실천에 적극 나설까. 공적 통제가 용이하고 공적 가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공공병원을 확충하여 이들 병원을 중심으로 생태적 보건의료체계를 선도적으로 구현해 가는 방식보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 유인책을 통해 민간 의료기관들이 '알아서' 친환경 병원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라.

이밖에 집단 의사파업을 비롯해 민간의 과도한 영리추구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 등 더 많은 질문이 남았지만, "공공병원 확충론이 불합리하다"는 명제가 가진 불합리성을 보여주는 데는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의도적 오해라 보지만, 참고로 말하면 우리는 한번도 공공병원만 지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공공보건의료 체계 강화의 부분 전략으로서 공공병원 확충·강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이고, 앞서 인용한 칼럼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공병원이 보건의료 공공성을 이끄는 주력부대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능적 공공성 강화론은 실상 의료시장론자의 주장과 크게 다를 바 없고, 그냥 지금 이대로 하자는 말이기 때문에 대안으로서의 자격조차 없다. 실체가 이러니 그동안 이런저런 제도와 정책을 조금 보완했으면 좋았는데 못했다는 식으로 기술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들을, 마치 새로 알게 된 사실인마냥 되풀이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과거 관료와 전문가(현재와 동일인일 수도 있다)들은 지금 언급되는 문제와 개선책들을 몰랐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제자리 맴돌기'는 누가 하고 있는 건가.

결국 공공병원 문제는 권력의 문제다. 사실 진짜 제대로 된 질문은 공공병원 확충이 정말 불필요한지 여부가 아니라, 공공병원이 비효율적이라고 왜,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묻는 것이다. 푸코가 이야기한 지식/권력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공공병원 확충을 터무니 없는 소리로 치부하는 관료들이 철썩같이 믿고 있는 그 지식체계, 바로 신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한 신공공관리론을 적극 문제화하고 비판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보수적 경제 이념과 국가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으면서 마치 시민을 대변하는 듯 호도하는 '전문가주의' 역시 함께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정가형 대통령'의 특성을 보여주는 이재명 정부에서는 적어도 2000명 증원과 같이 비합리적이고 돌발적인 정책 결정이 일어날 위험성은 낮다. 하지만 동시에, 수선론자와 같은 행정가적 특성을 고려할 때, 낡은 판을 갈아 엎는 큰 폭의 개혁 조치 역시 실행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 틀을 고수하는 한 보건의료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시민들이 바라는 공공병원 확충·강화를 통해 오래되고 강고한 구조와 체제에 균열을 키워가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념적이라며 불온시하는 이들의 낡고 불의한 '이념' 공세에 주눅 들 필요 없다.

ⓒ시민건강연구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시민건강연구소

(사)시민건강연구소는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의 싱크탱크이자, 진보적 연구자와 활동가를 배출하는 비영리독립연구기관입니다. <프레시안>은 시민건강연구소가 발표하는 '시민건강논평'과 '서리풀 연구通'을 동시 게재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