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쪽방, 불 꺼진 텔레비전, 말없이 누워 있는 한 사람. 며칠 전까지 일하던 어르신이 조용히 세상과 단절된 채 발견되었다.
일자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어르신이었다. 얼마 전부터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집을 찾아가니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분은 작은 방 한구석에 조용히 누워 계셨다. 의식은 또렷했지만, 말씀은 없으셨다. TV도 꺼져 있었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그 순간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2025년 초고령사회 대한민국에서 노인이 맞이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침묵 속에서 사라지는 이름들
현장에서는 이런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어제까지 씩씩하게 일하던 어르신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 며칠 지나면 소식도 끊긴다. 그 안에는 조용한 방과 누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어르신이 아프기 시작해도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들은 마치 도서관 구석 먼지 쌓인 책처럼 잊힌 채 남겨진다. 그러나 그 손등에는 오랜 세월 햇살을 견뎌낸 주름이 있고, 굽은 어깨에는 가족을 먹이고 나라를 세우며 시대를 견뎌낸 무게가 얹혀 있다. 이름은 작아졌지만, 삶은 절대 작지 않다.
노인은 오늘도 세상의 가장자리, 쪽방 한편에서 자신의 이름을 조용히 지켜낸다. 나는 그 이름이 기록되고, 보호받고,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권리, 잊히지 않을 권리, 무시당하지 않을 권리를 우리 사회가 보장해 주기를 바란다.
생명의 무게가 다른 나라
한국 건강 증진 개발원 건강 수명 통계집에 따르면 지역별 건강 수명 격차는 과천 (74.22세), 부산 영도(64.88세)로 약 10년의 차이가 난다. 소득별 건강 수명 격차는 상위 20%(73.4세), 하위 20% (65.2세)로 8.2년의 차이가 난다. 기대수명과의 격차는 기대수명이 83.61세, 건강수명은 70.51세로 약 13년 차이가 난다.
2024년 국민 건강 보험 공단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 전체 남성 기대 수명의 겅우 소득 1분위 75.34세. 2분위 82.44세로 1단계 차이에 7.1년의 생명 격차가 생긴다. 반면 소득 2~5분위 간 수명 차이(82.44세 ~ 84.42세)는 2년 미만이다.
이는 현재 복지정책이 1분위 탈출을 전혀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 노인 자살률 세계 최고 수준.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의 불명예스러운 현주소다. 2022년 기준 여성 노인의 빈곤율은 43.4%로 남성 노인(31.2%)보다 12.2%나 높다.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평생 돌봄노동을 담당했던 여성들이 노년에 이르러 이중고를 겪고 있다.
죽음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현실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었지만, 환자의 자기 결정권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현행법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로만 적용 범위를 한정하고 있어, 말기 암 환자나 중증 치매 환자는 연명의료 중단을 원해도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
1인 가구와 비혼 인구가 증가하는 현실에서 무연고자나 가족이 없는 환자의 경우 더욱 어려워진다. '당신의 마지막 숨은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존엄한 죽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안락사나 조력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다. 고통스러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존엄한 죽음을 원하는 노인들의 목소리는 외면당하고 있다.
돌봄의 공공성 부재
현재 돌봄 기관의 99%가 민간기관에서 운영되고 있고, 의료기관의 90%가 민간 영역이다. 공공의료와 공공돌봄 기관의 부족으로 노인들은 제대로 된 돌봄 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농어촌 지역이나 인구감소 지역에는 의료기관과 돌봄 기관 자체가 부족하다.
거주지역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 돌봄 서비스의 질과 접근성에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생명이 다르게 취급받는 것이다.
또한 장기 요양기관에서는 방임과 학대가 빈발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감시와 처벌 체계는 미미하다. 노인들은 돌봄을 받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참여에서 배제되는 노인들
노인을 정책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자기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노인 정책 수립 과정에서 정작 당사자인 노인들의 참여나 의견 수렴은 미흡하거나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격차 문제도 심각하다. 키오스크, 모바일 뱅킹 등 필수적인 디지털 서비스 이용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회 참여 자체가 제약받고 있다. 이로 인해 노인들은 점점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정치적 참여에서도 노인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선거할 때만 잠깐 관심을 받을 뿐, 평소에는 정치적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파편화된 노인 정책의 한계
현재 우리나라의 노인 정책은 돌봄, 복지, 일자리로 나뉘어 제각각 운영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등 여러 부처에 흩어진 정책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노인복지법'은 주로 요보호 대상으로서의 노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 한계가 명확하다. 노인을 복지의 수혜자로만 보는 관점에 머물러 있으며 노인의 권리를 종합적으로 보장하는 기본법이 부재한 상황이다.
노인 인권 기본법,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인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기본법이 필요하다. '노인 인권 기본법안'은 노인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하는 법이다.
노인 인권 기본법안은 노인의 존엄성, 독립성과 자주성, 돌봄 받을 권리와 건강권, 참여권과 자아실현의 권리 등 4대 기본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연령차별 금지와 교차차별 해소, 환자의 자기 결정권 보장, 지역사회 내 돌봄 권리 등을 명문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노인 정책 수립 과정에서 당사자 참여를 보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노인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투자
노인 인권 기본법은 단지 현재의 노인들만을 위한 법이 아니다. 지금의 40대, 50대, 60대 모두가 결국 마주할 자신의 미래를 위한 법이다. 노인은 타자가 아니라, 준비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노인 인구 일천 만 명 시대. 숫자만 늘어났을 뿐, 우리 사회가 노인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부족하다. 노인의 삶을 위한 제도는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고, 그마저도 돌봄, 복지, 일자리로 나뉘어 제각각이다.
노인의 권리는 모든 노인 정책의 뿌리이자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출발점조차 갖고 있지 않다.
생명의 경중을 방치하는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하며, 존엄한 노년, 차별 없는 노년을 위한 법적 토대 마련이 절실한 때이다.
오늘의 노인 인권 보장은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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