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입주민들을 위한 박람회장을 갔었다. 전자제품 구입이나 각종 인테리어 설비를 저렴하게 안내하는 행사였다. 이사와 입주 청소는 수요가 많은지라 여러 업체들이 전단지를 돌리며 홍보하기 바빴다. 유독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한 사람이 내민 종이를 마지못해 받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전단지에 적힌 '내국인만 고용한 업체입니다'라는 문장을 가리키며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면서 추임새를 넣는다. "안심해도 돼요."
불안과 안심, 그 사이에 이주노동자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얼마나 많은 민원이 있었길래, 이리 못 박아 둔 것일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식의 글들은 넘쳐 난다. 인터넷 곳곳에는 그들의 태도가, 그들의 문화가 선천적으로 게으르고 무례하다는 증언이 무수하다. 인종차별 수준이 아니라, 그냥 인종차별이다. 이게 왜 차별이냐는 항변도 없다. 어떤 인종은 차별해도 된다는 당당함이 거침없다.
아파트에 하자가 발생해도 그들이 소환된다. 요즘 외국인들이 현장에 너무 많아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거다. 한국의 끝도 없는 하청과 재하청의 구조를 생각하면 현장에 외국인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그래서 발생한 아파트 하자가 그들이 외국인이라서 문제인 것인가? 돈을 깎고 또 깎아가며 다다른 게 어떤 노동자의 현장이라면, 문제는 후자가 아니고 전자일 거다.
비용 문제로 아파트 하자가 많이 발생한다면, 그 시스템을 만든 이에게 따지고 들어야 함이 마땅하다. 싸게 부리려는 자들을 쏙 빼고, 싸게 일하는 사람에게만 욕하는 한국인의 심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만만하게 보이는 자가 외국인이니 심보는 더 고약해진다. 사람들도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문제를 안다. 하지만 그 끝에 외국인이 있으면 구조보다 사람만 본다. 건설 현장 근처에는 흡연하는 노동자가 넘쳐 나는데, 평소에 그 연기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흡연자가 외국인이면 사람을 불쾌해한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들의 나라 수준을 운운한다.
이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일하러 온 모든 외국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이주노동자라 불리는 그들은 비자도 다르다. 주로 E-9(비전문비자) 비자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하는 비전문취업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비자다. 선원으로 일할 수 있는 E-10 비자와 해외동포에게 주로 발급되는 H-2 비자도 비슷한데, E-9 비자로 한국에 올 수 있는 나라가 제일 많다. 스리랑카 포함 총 16개 국이다. 이 고용허가제는 일터 옮기는 게 쉽지 않다. 적성에 맞지 않으니 옮기겠다는 수준이 아니라 부당함을 당해도 쉽사리 못 옮긴다. 그러니 별짓을 당하면서도 버틴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왜 그 모양이냐?", 이런 말에 일희일비하다간 여기선 일 못한다. 벽돌 더미에 몸이 비닐로 감겨도 입을 다문다.
그러다가 스스로 미등록 이주민의 상태를 택하기도 한다. 불법체류자로 일을 하는 게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여겨서다. 하지만 불법이니까 더 낮은 대우를 감수해야 한다. "시키는 대로만 해라, 신고하기 전에", 이런 말에 감정적으로 반응했다가는 한국 생활 끝이다. 지게차가 본인의 목숨을 갖고 장난을 쳐도 참고 또 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법체류자로 한국을 떠도는 것보다는 괜찮으니까. 그게 다다. 천인공노. 후안무치, 인면수심. 그보다 더 심한 표현일지라도 납득이 되는 그 야만적인 일은 이런 구조에서 등장한 결과일 뿐이다.

이주노동자들이 3D 업종을 선택하니
<아노라>로 아카데미상을 휩쓴 션 베이커 감독의 초기작 가운데 <테이크 아웃>(take out, 2004)이란 다큐멘터리 풍의 영화가 있다. 2003년을 배경으로, 뉴욕으로 건너와 중식 테이크 아웃 식당에서 일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삶이 담겨있다. 저녁까지 많은 돈을 갚아야 하는 주인공이 종일 비 맞으며 고물 자전거로 음식을 배달하고 팁을 받는 하루의 이야기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 건너오는 것이 엄격해져 빚을 지고 낯선 땅으로 와야만 했던 이들이, 외국인을 경계하는 뉴욕의 한복판을 영어도 못 하면서 돌아다니는 게 어찌 평범하겠는가.
감독은 이들이 '어찌' 사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인지는 묻지 않는다. 그 배달원 외국인이야? 어디? 중국? 중국 사람들은 좀 그렇다는데, 아시아계 인종들이 좀 그렇지 등등의 상상력을 사전에 차단한다.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강자를 향해선 그런 질문이 아주 유효하다. 어떤 인간이 전쟁을 일으키는지, 계엄을 선포하는지 분석해야 사회가 안전하니까 말이다. 차별을 일삼는 이들이 어떤 부류인지를 파악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하지만 다수가 소수인 약자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일방적으로 묻는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혐오가 싹튼다. 한국에도 흔하다. 난민들이 어찌 여기에 도달했는지에 관심이 없다. '어디 사람? 중동? 혹시 이슬람? 무슬림들은 이상한데' 등등의 상상력은 매번 넘쳐난다.
어떤 사람인지를 우선적으로 차단하면, 사람은 사람을 응원할 수 있다.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를 매몰차게 대하는 시선에 함께 반응한다. 조롱 가득한 말투에 혀를 차며, 혐오의 시선에는 분노한다. <테이크 아웃>을 보다 보면 팁 많이 주는 손님이 그렇게 고맙고, 적게 주는 모습엔 아쉬움이 교차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뉴욕에서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중국인 노동자는, 밥벌이의 서러움을 느끼는 건 매한가지인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된다.
그때,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션 베이커 감독은 20년간 모든 작품을 비슷하게 접근했다. <탠저린>(2015)에서는 트랜스젠더를,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서는 빈곤층을, <레드 로켓>(2021)에서는 포르노 배우를, 그리고 <아노라>(2024)에는 성매매 노동자를 어쭙잖은 연민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왜? 그게 미국이니까.
우리는 어떠한가. 어찌 사는지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2020년 12월 20일, 비닐하우스 내 조립식 패널 가건물 숙소에서 캄보디아 국적 이주노동자가 영하 20℃의 날씨에 사망했다. 이게 사회적 사망인 산재로 인정받는 데 499일이 걸렸다. 개인 질병 아니냐는 의심을 헤쳐 나가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업주에게 건강검진 미실시만을 이유로 고작 30만 원의 과태료만을 부과한 나라에서 누구의 목숨값은 이토록 가볍다. 죽은 자를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서다. 그 사람이 '어떤'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2024년 3월 2일, <뉴욕타임스>는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한국은 이주노동자가 필요하지만 그들을 보호하는 데는 종종 실패한다(South Korea Needs Foreign Workers, but Often Fails to Protect Them)." 필요한 정도가 아니다. 지금 당장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그만두면 밥상에서 많은 음식들이 사라질 거다. 오징어나 고등어도 마찬가지다. 망하는 기업도 많을 거다.
이주노동자들은 사회와 지독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들은 4D 업종 종사자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3D 업종을 강제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도 부끄럽고 고마운데, 그들이기에 D가 하나 추가된다. 그 D는 죽음(death)이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 이 간단한 사실이, 한국에선 참으로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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