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포고령 1호'의 뿌리를 캐물을 또 다른 특별검사가 필요하다

[장석준 칼럼] 윤석열 뒤에 도사린 박정희의 그림자

'윤석열 전 대통령 등에 의한 내란-외환 행위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이하 '내란 특검)의 수사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내란 특검은 재판부와 검찰의 미심쩍은 공조 덕분에 자유를 만끽하던 윤석열을 다시 구속시킨 데 이어 외환 음모와 연루된 김용대 드론작전사령관을 긴급체포했다. 지지부진하던 검찰 수사와 달리 특검은 조만간 위헌-위법적 비상계엄 시도와 전쟁 도발 음모의 전모를 밝힐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수사만으로 충분할까? 수사를 통해 사실 관계를 명확히 정리하고 주범 윤석열의 책임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란의 근본 원인까지 다 밝혀냈다고 할 수 있을까? 윤석열 일당이 그토록 쉽게 친위쿠데타라는 정신 나간 선택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광기어린 선택을 지지하고 나선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물음들은 내란 특검의 수사만으로는 풀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철저하고 준엄한 수사, 재판과 더불어 또 다른 의미의 '특검'이 함께 추진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란, 외환을 시도하고 이에 동조한 정신 상태에 대한 '특별검사(檢査)', 친위쿠데타와 극우 광풍을 낳은 정신적 뿌리에 대한 '특별검사' 말이다.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외환 의혹을 수사하는 조은석 특별검사팀이 출석을 거부하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3차 강제구인에 나섰다. 사진은 16일 내란 특검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서초구 서울고검 모습. ⓒ연합뉴스

'민주정치'를 송두리째 부정한 비상계엄 포고령 1호 첫 항

작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 시민들은 평소대로 일과를 정리하고 잠자리를 준비하다 갑자기 비상계엄 선포라는 일격을 당했다. 이때 TV 화면에서 낯선 말을 윽박지르던 대통령의 모습, 군대가 국회의사당에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것은 비상계엄 포고령 1호였다. 첫 항부터가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부정하고 파괴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이 문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12월 3일 사건은 반역행위임이 분명했다. 이 문구만으로도 헌법재판소가 내릴 결론은 대통령 파면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었다.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에서 모든 국가기구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다. 기본권을 명시한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바로 다음에 "제3장 국회"가 나온다.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대통령 중심 정치관과는 달리, 대통령이 등장하는 "제4장 정부"보다 앞이다. 그만큼 국회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기관이다.

그런데 그 국회 활동을 금한다고 대통령이 선포했다. 제6공화국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권한 따위는 없다.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할 수는 있어도, 대통령은 법률안 거부권 행사 외에 국회 활동을 제약할 어떠한 합법적 수단도 없다. 하지만 윤석열은 감히 헌법에 없는, 더 나아가 헌법이 금한다고 할 수 있는 행위를 자행했다.

국회만이 아니다. '정당' 또한 금지 대상 목록에 올랐다. 다들 의외라 느끼겠지만, 헌법에서 정당은 국회보다도 더 먼저 등장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유명한 제1조로 시작하는 "제1장 총강"에 정당 관련 내용을 담은 제8조가 포함돼 있다. "정당의 설립은 자유이며, 복수정당제는 보장된다"는 문구로 시작하는 8조의 내용이 그만큼 민주공화국의 근간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데 윤석열은 이 역시 단호히 부정하고 파괴하려 했다.

더 나아가, 금지 대상에 '지방의회'까지 포함된 것은 비상계엄 포고령 1호가 나름대로 얼마나 확고하고 일관된 시각에 따라 작성됐는지 보여준다. 국회야 윤석열 정부와 빈번히 충돌했다는 사정이라도 있었지만, 광역의회, 기초의회 활동은 왜 금지되어야 했는가. 한 마디로, 대의기구는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념의 발로였다. 국회든 지방의회든 대의기구는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대통령 윤석열'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비상계엄 포고령 1호 첫 항의 뒷부분은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 또한 금지한다고 밝혔다. 민주정치의 가장 원초적 요소라 할 시민들의 자생적 정치활동마저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이었다. 친위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뒤에 대통령 탄핵을 외친 시민들뿐만 아니라 이에 반대한 윤석열 지지자들까지도 몇 달 동안 열성적으로 실행했던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는 친위쿠데타가 성공한 '윤석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무참하게 민주주의의 심장을 부정하고 파괴하려 할 수 있었을까? 헌법재판소 판결문이 지적하듯이, 어떻게 이렇게 확신에 가득 차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물려"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 대목에서 더 착잡한 것은 이런 반역 행위를 보면서도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거나 이를 지지하고 나서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헌법재판소 판결문에 반영된 상식은 여전히 대한민국 시민 전체의 신념은 아니다.

바로 이 현실을 캐물어야 한다. 내란 특검의 수사가 내란, 외환을 모의한 현장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 어떤 일이 시작됐는지 재구성해야 한다면, 또 다른 '특별검사'는 비상계엄 포고령 1호와 그 지지를 낳은 역사적 현장을 덮쳐야 한다. 국회, 지방의회, 정당, 시민들의 정치활동을 모두 '금지'할 대상쯤으로 여기는 상당수 한국인의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떤 곡절을 거쳐 다져진 것인가? 그 뿌리는 무엇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3일 서울역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뒤에 도사린 박정희의 그림자

나는 내란의 뿌리를 밝히는 특별검사 작업에 커다란 도움을 줄만한 책을 알고 있다. 진보정당운동가이자 법학자인 윤현식의 <지역정당: 거대 양당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세상을 바꾸는 정치>(산지니, 2023)가 그 책이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오랜 정체와 교착 상태를 뚫고 다시 전진하려면 현행 정당법이 금지하는 지역정당이 허용되어야 하고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데 이런 주장을 펼치면서 저자는 현재 한국 정치를 짓누르는 낡은 굴레의 연원을 제6공화국의 시간 경계를 넘어 더 먼 과거에서 찾는다. 저자가 제시하는 시점은 박정희 세력에 의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1년이 지난 '1962년'이다.

이 해에 박정희 세력은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제3공화국의 골간을 이룰 헌법과 각종 법률을 마련했다. 새 헌법의 골자는 제2공화국이 채택했던 의회제(내각제) 정부 형태를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즉, 국회가 주도하던 정치 체제를 대통령 1인이 주도하는 체제로 바꿨다. 그리고 정당, 지방자치 등과 관련한 법률을 정비했다.

정리하면, 국회, 지방의회, 정당 등등을 군부 세력 입맛에 맞게 손봤다. 국회, 지방의회, 정당이라니, 이것은 고스란히 윤석열의 비상계엄 포고령 1호 1항이 다루는 대상이다. 특별검사 작업에 나선 역사 수사관이라면, 결코 간과할 수 없을 유사성이다.

아니, '유사'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동일'하다고 해야 옳다. 쿠데타 당일인 1961년 5월 16일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선포한 '포고령 4호'는 "참의원, 민의원, 지방의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또한 "일체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고 못 박았다. 1주일 뒤인 5월 23일에는 아예 "모든 정치사회단체의 해체"를 명하는 포고령 6호를 발표했다. "모든 정치사회단체의 해체"만 제외하면, 모두가 다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 포고령 1호 첫 문장에 담긴 내용이다.

이렇게 기존 민주주의 제도를 철저히 파괴한 뒤에 박정희 세력은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이른바 '부패한 구정치인'을 퇴출하는 작업에 나섰다(1962. 3). '부패한 구정치인'의 목록에는 과거 자유당 정권을 이끌던 진짜로 '부패한 구정치인'도 있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부류의 정치세력이나 인사가 더 많았다. 우선 제2공화국의 여당이던 민주당 정치인들이 있었고, 다양한 혁신정당 인사들도 목록에 올랐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전국피학살자유족회' 같은 4월 혁명 공간의 대표적 민주시민단체도 '정화' 대상으로 지정됐다는 사실이다(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당시 사정이 잘 묘사돼 있다). 군부 세력은 사실상 '정치' 일반을 범죄시한 셈이었다. 그리고 제6공화국 헌법 전문이 '대한국민'의 뿌리로 밝히는 '4. 19'의 자식들을 잔혹하게 짓밟았다.

이 폐허 위에서 박정희 세력은 어떤 새 질서를 세웠던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 중심제로 돌아간 제3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실은 '돌아갔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제3공화국은 제1공화국보다도 훨씬 더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 헌법은 줄곧 "국무회의 의결은 과반"이라는 조항을 유지했다. 국무회의가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를 수행하는 기구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의회제 정부의 내각 성격을 지닌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제3공화국 헌법에는 이런 조항이 없다. 누가 보더라도, 국무회의가 대통령의 하위기구라는 사고가 전제돼 있다. 실제로 제3공화국부터 한국 국가기구의 실질적 사령탑은 국무회의가 아니라 '청와대'가 된다.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만큼 국회의 위상과 권한은 축소됐다. 제3공화국 헌법에서도 국회는 정부보다 먼저 등장하지만, 이제 이는 형식적 잔재에 불과했다. 박정희 세력은 한편으로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불철주야 행정기구를 지휘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띄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방해하는 쓸모없는 정치꾼들(기본적으로는 야당을 뜻하지만 심지어는 여당 안에서 박정희를 비판하는 흐름도 포함됐다)이 싸움만 벌이는 '국회'라는 새로운 상식을 정착시켰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무능, 낭비와 동일시하고, '국회'를 불신하며, 오로지 '대통령' 선출 방식(직선제냐 아니냐)만이 민주주의의 기준점이 되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관념이 이때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국회가 이런 운명을 맞이했으니 지방의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행정기구는 민생의 버팀목인 반면 대의기구란 이런 행정을 방해하는 세금 도둑에 불과했다. 통치는 가난을 떨쳐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선거는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통치의 교란일 뿐이었다. 그러니 지방자치는 발 딛을 틈조차 없었다. 그 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지방자치가 법률이 정한 대로 실행되지 못했지만, 박정희 세력은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부터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통해 지방자치 실시를 무기한 연기시켜 버렸다.

박정희 세력이 새롭게 족쇄를 채운 민주정치의 또 다른 중대한 요소는 정당이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정당은 (중략)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신설했는데, 이것은 정당의 민주적 발전을 바라는 충심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정당 설립과 활동을 행정기구가 규제할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정당 활동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정당 활동에 대한 시시콜콜한 규제가 전혀 없었던 그 전까지의 정당 관련 법제는 박정희 세력에 의해 현 정당법의 원형이 되는 규제 중심 '정당법'으로 개정됐다. 이때부터 정당의 중앙당은 반드시 서울에 있어야 하게 되었고, 전국 조직을 갖추지 못한 지역정당은 존재할 수 없게 됐다.

1962년을 기점으로 성립된 이 정치 체제(<지역정당>에서 윤현식은 '1962년 체제'라 일컫는다)가 한국인 다수의 상식으로 새롭게 정착시킨 사고방식은 한 마디로, 경제 개발/성장을 위해 정치는 최소화할수록 좋다는 것, 아니 통치가 효과적으로 관철되기 위해 정치는 아예 없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끈덕진 반정치주의의 출발점이다. 한국인들이 본래부터 반정치주의의 신봉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5.16 쿠데타 세력의 작품이었고, 윤석열과 친위쿠데타 하수인들, 지지자들은 이들의 완벽한 정신적 계승자다.

▲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계엄군이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프레시안(박정연)

개헌, 정치개혁 논의의 핵심은 '1962년 체제' 극복

박정희 독재의 치명적 유산인 반정치주의를 지금에라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이유는 명확하다. 12월 3일 밤과 같은 광경을 앞으로 다시는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절박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박정희식 정치관은 20세기 중후반 한국 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이라는 과제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점을 늘 정당성의 근거로 삼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같은 속도의 경제성장이 미래를 여는 해법이 될 수 있는 때가 아니다. 복합위기의 시대이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 곳곳의 지혜와 합의가 소중해진 시대다. 박정희식 정치관의 중요한 요소인 고도의 중앙집권적 통치는 이렇게 지혜를 모으고 합의를 형성한다는 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박정희의 정치적 유산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는 '무능'하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내란의 정신적 뿌리를 뽑는 또 다른 특별검사 작업이 하루빨리 시작돼야 한다. 이 작업은 결국 헌법개정과 정치제도 개혁을 둘러싼 토론의 일부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개헌, 정치개혁 토론의 필수 의제가 되어야만 한다.

이런 토론이 시작되기만 하면, 누구나 절실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내란의 뿌리를 뽑는 일과, 복합위기 시대에 맞설 새로운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일, 그리고 극우 정치의 득세를 선제적으로 막는 일은 결국 하나의 작업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 모두는 다 1962년 즈음에 시작된 한국형 반정치주의를 극복하는 과업의 다른 얼굴들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