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집에 없을 때 에리카는 일부러 자신의 몸을 벤다. 그녀는 벌써 오래전부터 남에게 들키지 않고 몸에 칼을 댈 수 있는 순간을 항상 엿보고 있다. 문이 찰칵 소리를 내자마자 아버지가 쓰던 그녀의 부적, 즉 다목적 면도칼을 꺼내온다. 그녀는 다섯 겹으로 싼, 처녀막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비닐 주머니에서 이 면도칼을 풀어낸다. 면도칼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 그녀는 아주 능숙하다. 더 이상 어떤 생각으로도 흐려지지 않고 더 이상 어떤 의지로도 주름지지 않는 아버지의 텅 빈 이마 밑 부드러운 뺨을 그녀가 면도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이 면도날을 자신의 살에 대려 한다. <피아노 치는 여자>(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피아니스트가 되는 데 실패하고 음악원 피아노 선생으로 남게 된 에리카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에리카는 30대 후반의 나이로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에리카는 부모가 결혼한 지 20년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태어났기에 어머니가 나이로는 할머니뻘이다. 아버지는 정신이상자가 되었고 세상에 위험한 존재가 될까 봐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어머니는 에리카를 '내 귀여운 회오리바람'이라고 부르며 딸의 생활 전체를 통제한다. 모녀는 부부나 다름없이 산다. 딸이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걸 차단하기에 어머니와 딸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딸이 오로지 '내 아이'로 혹은 심리 깊은 곳에서 '내 남편'으로 남아야 하기에 에리카에게 옷, 구두, 장신구 따위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에리카가 예쁘게 꾸미고 다녀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이러한 극단적 통제로 인해 에리카는 어려서부터 남들이 가진 물건을 부러워한다. 시샘은, 자신이 갖지 못한 타인의 물건들을 파괴하고 소유자들을 학대하는 사디즘 성향으로 발전한다. 에리카는 피아노 선생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기 학생들을 괴롭힌다. 교습이 끝나면 포르노 영화관 부근에 숨어 그곳을 배회하는 남학생들을 지켜보다가 자기에게 피아노 배우는 학생이 걸려들면 그 학생의 서투른 피아노 솜씨를 심하게 비난하며 그를 인격적으로 모욕한다.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지배는 에리카에게 사디즘뿐 아니라 자신을 학대하는 마조히즘적 성향도 길러준다.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면 에리카는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자기 몸을 베는 자해를 한다.
에리카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클레머라는 대학생이 그녀에게 남성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둘 사이는 정상적인 연인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 에리카는 자신의 성적 취향에 선입견을 품어 클레머에게 비정상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동시에 상대가 자신의 비정상적인 요구를 넘어서 다정한 연인으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관계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클레머는 어느 날 에리카를 찾아가 그녀가 요구한 대로 변태적인 방식으로 성적으로 학대한다. 그 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에리카는 다음 날 복수하려고 칼을 지니고 그를 찾아간다.
그러나 복수는 실현되지 않는다. 칼날이 상대 대신 자기의 어깨로 향한다. 금방 피가 솟아오른다. 세상은 그대로다. 에리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 이제 그녀는 집으로 향한다. 그녀의 걸음은 차츰 빨라지고 있다.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엘프리데 옐리네크(1946년~)는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주에서 태어나 빈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등 음악 교육을 두루 받았다. 비엔나 대학에서 연극학, 미술사를 공부하였고 그러면서 1967년 첫 시집 <리자의 그림자>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데뷔했다. 이후 독일을 근거지로 집필 활동을 해 <노라가 남편을 떠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클라라 S.> 등 페미니즘 계열의 희곡을 발표했다.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발표해 '하인리히 뵐 상'(1986년), '페터 바이스 문학상'(1994년),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1998년) 등 독일어권의 큰 상을 연이어 받은 데 이어 여성 작가로는 열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83년 발표한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작가의 출세작이자,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하인리히 뵐 상'을 받는 데 기여한 작품이다.
옐리네크 작품들은 여성 억압, 권력 남용, 반유대주의 등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조명한다. 솔직하고 과감한 표현 때문에 종종 논란을 휩싸였고, 비슷한 맥락에서 페미니즘을 표방함에도 일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
작가의 대표작인 <피아노 치는 여자>는 칸 영화제 최초로 2001년에 그랑프리와 남녀 주연상을 모두 받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원작이다. 영화를 잘 만들었겠지만, 원작이 워낙 흥미로워서 좋은 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모녀 및 남녀 관계의 폭력성을 기이한 설정과 예리한 언어로 표현했다. 이 설정의 기이함과 언어의 예리함이, 작가가 페미니즘을 표방함에도 많은 다른 페미니스트로부터 '반 페미니즘'적이란 비판을 받게 했다. 논란은 페미니즘에 국한하지 않는다. 실험정신과 문제의식을 부각하는 천재성으로 많은 칭찬을 받으면서 동시에 칭찬을 받은 그 지점에서 비판을 초래했다.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다. 주인공 에리카처럼 옐리네크도 어린 시절 자신을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만들겠다며 스파르타식으로 딸을 훈련한 어머니를 증오했고,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음악가의 길을 가지 않고 독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고 한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옐리네크의 아버지 역시 정신병원에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소설은 자서전이 아니다. 옐리네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배·종속적이고 비정상적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연민 같은 감정을 배제한 채 냉정하게 그려냈다. 문학이 보여주어야 하는 뚜렷한 형상과 담아내야 하는 확고한 주제를 놓치지 않았기에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데에 이견이 없는 듯하다.
소설의 분석에는 정신분석학이 등장한다.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오이디푸스, 팔루스(남근) 등이 거론되고 에리카의 성격과 사랑을 설명할 땐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출현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동전의 앞뒷면인 양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소설의 에리카도 마찬가지다.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자기 몸을 베는 인용문이 표현한 행위는 작가가 확실히 정신분석학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으로 보인다.
정신분석학적 특성은 소설의 두 축인 모녀와 남녀 관계를 관통한다. 권력관계와 지배·종속을 벗어나 실존적으로 바로 서려는 에리카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에리카는 자신의 여성성을 패배와 결손의 표시라고 비하하며 '무(Nichts)' 또는 '구멍(Loch)'이라는 부정적이고 열등한 단어를 동원한다. 어머니에게서 끝내 벗어날 수 없다는 비극적 결말은 역설적으로 작가의 창의성과 강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반대로 작가는 이러한 문학적 성취를 통해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실존적으로 우뚝 섰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문학적이고 실존적인 성취가 종국에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일 테니, 페미니스트로 불러 큰 무리는 아니지 싶다. 2004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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