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건 오로지 몸뚱이뿐인 완전한 자유

[안치용의 노벨문학상의 문장] V. S. 나이폴 <자유 국가에서>

"자유는 내게 이런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내가 가진 건 오로지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사실, 어떻게 해서든 그 몸뚱이를 입히고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모든 게 끝난다는 사실을."

<자유 국가에서>(V. S. 나이폴, 정회성 옮김, 민음사)

소설 안에 5개의 독립된 이야기가 들어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시작과 끝에 두고 중간에 3개 이야기를 배치했다. 프롤로그 '피레우스의 방랑자'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배 여행을 그렸다.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알렉산드리아행 배의 모습은 낭만적인 항해와 거리가 있다. 프롤로그의 주인공은 승객 중 백인 영국인이다. 방랑자인 이 사람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채 비좁은 선실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다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폭행을 당한다.

프롤로그에 이어진 두 번째 작품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는 작가가 책 출판 일로 상당 기간 워싱턴에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모시던 주인을 따라 인도 뭄바이에서 워싱턴으로 건너온 산토시는 자유나 인격 없이 하인으로만 존재하다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유에 눈을 뜬다. 그러나 자유를 누릴 준비도 조건도 갖추지 못한 탓에 고립된 생활을 하며 워싱턴에서 죄수처럼 살아간다. 다시 뭄바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던 그는 미국에 이미 자리 잡은 다른 인도인에 고용돼 그를 주인으로 섬기며 비로소 미국 생활에 안착한다.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는 화자인 '나'의 정체가 모호하다. 장소 국적 등 사실관계와 시제 등을 불투명하게 처리하며 확실한 것은 '나'가 동생 데이요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간다는 사실뿐이다. 포스트식민시대 희생자들의 쓸쓸한 삶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한 마리 고립된 늑대처럼 혼자 외롭게 살아온 화자의 과거는 실의와 좌절로 채워졌고 현재는 출구 없는 절망뿐이다.

전체 책 제목과 같은 '자유 국가에서'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로 감정이 배제된 채 객관적으로 서술된다. 작가가 객원 교수로 머물렀던 아프리카 우간다가 배경인 듯하다. 영국인 남자와 여자가 차를 몰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줄거리로 쿠데타가 정치적 배경이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에 잔류한 정부 산하 기관의 행정관인 남성 바비와 유럽인 거주 구역의 행정관 아내인 여성 린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식민시대가 끝난 만큼 이들이 누릴 특권은 없고 쿠데타 상황에서 오히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현지인의 눈치를 살핀다. 식민지를 벗어난 아프리카 국가의 모습을 내부자이자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백인의 심리를 그렸다.

'룩소르의 서커스단'은 에필로그이다. 공간은 카이로와 나일강으로 "유일하게 순수했던 시대는 태초뿐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성찰로 이 이야기와 전체 소설을 마무리한다.

이 소설은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로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며 순환 구조를 취한다. 사회비판이 강하거나 강한 실존적 비극을 드러내지 않지만, 책을 덮으며 독자는 애잔한 느낌에 젖어 드는 이런 글쓰기는 작가의 삶과 불가분의 연관이 있다.

식민지 출신의 세계시민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1932~2018년)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V. S. 나이폴로 소개된다. 영국 국적이지만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는 이름이 대영제국 스타일이 아니어서 외우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나이폴은 카리브해의 영국령 섬 트리니다드에서 인도계 부모 아래 태어났다. 1802년 아미앵 조약에 의해 트리니다드섬이 스페인으로부터 영국에 할양되었고, 1814년 파리 조약으로 토바고섬이 프랑스로부터 영국에 넘어왔다. 베네수엘라에 인접한 두 섬은 카리브해에서 오랫동안 영국령으로 존재해 이질적 문화를 보인다. 유럽인 진출 이후 이곳의 원주민은 오래전에 멸족한 상태였다. 트리니다드 정청의 해외 유학 장학생으로 1950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고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BBC의 카리브 지역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등 작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23살에 창작을 시작하여 1957년 첫 소설 <신비한 안마사>를 발표했다.

1959년에 발표한 <미겔 스트리트>로 명성을 얻고, 1971년 <자유 국가에서>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1994년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데이비스 코언 상을 받았다. 나이폴은 <콘래드의 암흑> (1974년)을 비롯해 영문학의 거두 조지프 콘래드 관련 논문을 집필하였는데, 제3세계 출신 포스트식민주의 작가로서 지식인과 소외의 문제를 강하게 탐구하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파헤쳤다는 측면에서 콘래드와 비교되기도 한다. 2008년에 《타임스》가 선정한 '1945년 이후의 위대한 영국 작가 50명'에 선정됐다.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다른 영국령인 카리브해 트리니다드로 계약노동자 신분으로 이주한 인도인 후손인 나이폴은 정체성의 부재를 자기 문학의 정체성으로 한다. 소설 속의 "나는 전에 미남이었지만 지금은 그 얼굴을 잃어버렸다. 나는 전에 자유인이었지만 지금은 그 자유도 잃고 말았다"는 문장이 아마 자신과 포스트식민주의 시대 제 3세계의 특색을 보여주는 셈이다.

문학적 항해자

이 책은 소설집 같기도 하고 하나의 소설 같기도 하다. 모두 네 개의 단편과 한 개의 중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서로 연관성이 없고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는다. 네 개의 단편 중 두 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배치했다.

공통된 주제나 소재를 중심으로 독립된 짧은 이야기 여러 개를 엮어내는, 즉 캐릭터와 배경만을 공유하는 이야기 형식인 옴니버스 구성이 아니다. 즉 명시적인 공유 사항이 없다. 각각의 이야기는 별개로 연속성이 전혀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작가는 이 책에서 독자를 문학의 배에 태우고 그리스 아테네의 피레우스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가('피레우스의 방랑자') 인도 품바이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가기도 하고('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 제 3세계의 이름 모를 (작가의 고향인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로 추정되는) 시골 마을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기도 하며('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 아프리카 한 나라(우간다?)의 수도에서 남부로 차를 타고 가기도('자유 국가에서') 한다. 마지막 공간이동은 이탈리아 밀라노를 거쳐 이집트 룩소르로 간다('룩소르의 서커스단'). "문학의 배로 세계를 두루 항해하는 사람(Literary Circumnavigator)"라는 평을 듣는 작가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공간구성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이집트를 전체 여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설정했다. 별개인 듯한 다섯 작품이 어쨌든 하나의 순환 구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V. S. 나이폴은 포스트식민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적 항해자'로 불리는데, 이 작품이 전형적이다. 방랑자들과 함께 식민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 속 개인과 자유의 의미를 묻고 그 여정을 그려냈다. 작가 자신이 방랑자이다. 나이폴의 조부는 브라만 계급 출신의 인도인으로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로 트리니다드섬에 이주했다. 작가 안에는 인도, 카리브해, 영국의 정체성이 혼재한다. 인도 이주자 집안이기 때문에 카리브적인 특성 또한 모호하다.

전 생애에 걸쳐 자유와 제3세계, (포스트)식민주의를 주제로 작품 활동에 매진해 "엄정하고 면밀한 시각에 통찰력 있는 내러티브를 결합해 억압의 역사를 직시하게 해준다"는 이유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카리브해라는 시원을 공유하지만 프랑스 식민지 출신이란 차이를 보이는 프란츠 파농의 사유 및 삶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할 수 있을 법하다. "백인의 눈 안에서 흑인은 존재론적 저항이 없다(Le Noir n'a pas de résistance ontologique aux yeux du Blanc)"는 파농의 경구가 나이폴에서 살아남는가 하면 변용되기도 한다. 포스트식민주의와 트리니다드, 아프리카가 아닌 인도 출신이라는 사실 등 현대사의 많은 특성이 특별한 방식으로 중첩돼 있기 때문이다. 변방의 또 다른 변방으로서 소외의 소외를 존재론으로 받아들이는 기이한 세계시민이자 세계시민 문학이다. 2001년 수상.

▲ Free of Clouds (between 1919 and 1920), Arthur Bowen Davies (American, 1862 -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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