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함께 지냈다" "나는 소녀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며 목돈 챙기는 '가짜 유대인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22]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50

"나는 나치 수용소에서 죽다 살아남았다." "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이 글을 준비하며 자료를 뒤져보니, 나치의 전쟁범죄를 들먹이며 사기를 친 사례들이 적지 않아서 놀랐다. 홀로코스트를 팔아 관심을 끌고 돈을 챙기려 든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인인 척했고, 그러면서 유대인 표와 돈을 노린 양심불량 정치인도 있다. 나중에 들통나면 "나는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인스러운(jew-ish) 사람"이라고 발뺌했다. 이런저런 사례를 모으면, 1000쪽 짜리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은 될 듯하다.

다행히도 한국에선 그렇게 뻔뻔한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나는 '위안부' 성노예였다"고 거짓 증언을 하고 나선 사례가 없다. 그런 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법적 처벌을 받은 사람도 없다. '위안부' 성노예와 관련한 증언 기록에서 일시․장소 등 착오로 비롯된 아주 작은 오류라도 나온다 치면, 일본 극우파들은 이를 트집 잡아 "그것 봐라! 위안부는 없었다"며 입에 거품을 물기 마련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증언은 (일본의 진정성 어린 사과를 받지 못했지만) 우리 학계의 연구와 자료 검증을 통해 그 진실성을 인정받았다.

늑대 무리와 함께 지낸 소녀

1980년대 중반 놀라운 사연을 지닌 한 이야기꾼이 미 보스턴 교외의 작은 마을 밀리스로 이사를 왔다. 그의 이름은 미샤 데폰세카(1937-). 벨기에 출신 이민자인 미샤는 그 지역 라디오 방송과 유대교회당(시너고그)에서 △어릴 때 부모가 나치에 잡혀가자 △나침반 하나를 들고 무작정 부모를 찾아 동유럽으로 수천km를 걸어갔고 △숲속에서 늑대 무리들과 함께 지냈다는, 그야말로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사실이라면 엄청난 모험담이다. 입소문을 들은 보스턴의 한 작은 출판사가 미샤에게 책을 내자고 설득했고, 대필작가를 붙여 <미샤: 홀로코스트 시절의 회고록>(Misha : A Memoire of the Holocaust Years, 1997)을 냈다. 책은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출판사는 초대박을 노리고 '오프라 윈프리 쇼'에 미샤를 출연시키려 했다. 바로 그 무렵 갈등이 생겼다. 미샤는 출판사가 인세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며 소송을 걸었다. '오프라 윈프리 쇼' 제작진이 늑대 사육장에서 미샤와 예비 촬영까지 마쳤지만, 출연 얘기는 쑥 들어갔다. 무대는 TV 공연장이 아닌 법정으로 옮겨졌다.

분위기는 출판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배심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출판사가 착취했다"는 원고 쪽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2001년 8월 출판사가 225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책 판권은 프랑스 출판사로 넘어갔고, 20개국 언어로 번역본이 나왔다(일본어 번역본은 있지만 한국판은 없다). 책이 베스트셀러로 화제를 모으면서 미샤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강연회를 가졌고 TV에 잇달아 출연했다. 2007년 '늑대와의 생존'(베라 밸몽 감독)이란 프랑스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계보학자가 밝혀낸 10년 동안의 사기극

항소심에서도 지고 파산 위기를 맞은 미 출판사 대표 제인 다니엘은 절망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반격에 나섰다. '베스트셀러'(Bestseller)라는 블로그를 인터넷에 올려 전문 연구자들의 도움을 청했다. 인터넷 세상에서나 가능한 '21세기 스타일' 반격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미샤는 유대인이 아니고, 그녀의 아버지는 벨기에 레지스탕스 조직 명단을 비밀경찰(게슈타포)에게 넘긴 '배신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021년 넷플릭스 다큐 '미샤와 늑대들'을 검색하면 지금도 볼 수 있다. 미샤가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가길 거부해 출판사와 갈등을 빚은 것도 거짓말이 들통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미샤가 사기꾼임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두 여성 연구자가 있다. 보스턴의 샤론 서전트(보스턴대학)와 벨기에 현지의 에블린 헨델이다. 둘 다 유대인이고 전공이 계보학(genealogy)이란 공통점을 지녔다. 헨델은 어릴 때 부모가 나치에 끌려가고 양부모 집에서 자라난 아픔을 지녔다. 두 연구자는 브뤼셀 현지의 문서고를 뒤진 끝에 △미샤가 유대인이 아니라 가톨릭 집안 출신이고 △우크라이나 숲속에서 늑대들과 지냈다고 주장하는 시점엔 그녀의 미래 남편의 여동생과 함께 문법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2007년 다니엘의 블로그 '베스트셀러'에 폭로 글이 올라가자, 유럽 신문들은 제1면에 '늑대 소녀는 거짓말쟁이'란 기사를 올렸다. TV도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 <늑대와의 생존> 영화가 개봉한 지 딱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미샤는 마침내 변호사를 통해 늑대 이야기가 거짓이라 털어놓았다. 미국에서 <미샤>란 책을 낸 지 10년만의 일이다. 계보학자 샤론 서전트는 보스턴대학 계간지 <Bostonia>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샤 사건의 경우는 인간의 비극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악용하려는 비양심적 시도에 맞서 기록을 바로잡을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그래서 그 사건에 끌렸다. 하지만 벨기에의 계보학자 에블린 헨델이 현지 조사를 하면서 많은 것(과거사의 아픔)을 떠올려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어머니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던 시청 계단에 서서 그토록 교활한 사기를 저지른 여성을 조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홀로코스트 무대에 동화를 올리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정말 추악하고 씁쓸한 이야기다."(Caleb Daniloff, 'Untrue Stories', <Bostonia> 2009년 여름호.⇒https://www.bu.edu/bostonia/summer09/hoax/)

▲ 나치에 끌려간 부모를 찾아 떠났다가 늑대와 함께 지냈다는 미샤 데폰세카, 거짓 증언을 담은 책과 영화 포스터. 진실이 밝혀지기까진 10년이 걸렸다. Ⓒ위키미디어

"내가 그런 일을 안 겪었단 말인가?"

미 출판사 대표 다니엘이 입은 마음의 상처와 재산상 피해는 컸다. 아버지가 물려준 42만 5000달러의 유산과 살던 집이 넘어갔다. 다니엘은 그 집을 돌려받기 위한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한편으로 다니엘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제목은 <베스트셀러>(Bestseller, 2008)다. 2014년 3월 매사추세츠 주 항소법원은 미샤가 다니엘에게 1700만 달러(230억 원)를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미샤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을까?

"그들은 나를 배신자의 딸로 불렀다. 고문에 시달린 아버지가 비밀을 누설했다고 의심한 탓이다. 이 책과 이야기는 나의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나만의 현실이었고 그 안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나는 오로지 내가 짊어진 고통을 떨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끔은 잘 모르겠다. 나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내가 그런 일을 안 겪었단 말인가' 하고.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특히 동물이 나오는 부분을. 지금도 눈에 선하다. 늑대들이랑 땅바닥에서 뒹굴던 장면이. 우리 예쁜 늑대들은 언제까지나 내 늑대로 남을 것이다. 영원히 나랑 같은 편이다."(넷플렉스, '미샤와 늑대들' 속 인터뷰).

궁색한 변명뿐이다. 어릴 때의 고통을 말할 뿐 진정성 담긴 사과가 없다. 실제로 늑대와 함께 지낸 것 같다는 알쏭달쏭한 말만 길게 늘어놓았다.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은 한 계보학자 헨델은 실제로 어릴 때 부모를 나치에게 빼앗기고 양부모에게 입양됐다는 사실을 40살 때 알게 된 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랬기에 헨델은 이렇게 말한다. "미샤에게 역겨움(repulsion)과 더불어 연민(pity)을 느꼈다." 물론 역겨움 쪽이 크다.

미술품 팔아 거액 챙긴 '소녀 홀로코스트 생존자'

미국 뉴욕에는 예술가로서 이름을 떨치려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든다. 그들의 꿈은 뉴욕의 대형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작품을 거는 것이다. '모던 아트 뮤지엄'이나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들에게는 꿈의 공간이다. 로즈마리 코치(1939-2007)는 구겐하임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 이스라엘의 유명 미술관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리는 전시회들을 열었다. 숨지기 전까지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드로잉 작품을 1만 2000개나 만들었다. 유대인 갑부들은 거액의 수표를 건네고 그녀의 작품을 사갔다.

로즈마리가 이른바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술가'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그녀의 '유대인 혈통'이 큰 힘이 됐음은 말할 나위 없다. 로즈마리 본인의 말에 따르면, 1939년 독일 서부 루르지방의 소도시 레클링하우젠에서 헝가리 유대인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고, 1942년 3살 때 바이에른 주 트라운슈타인 수용소(다하우 수용소의 분소)에 갇혔다가 6살 때 풀려났고, 그 뒤 고아원에 머물다가 양부모에게 입양이 됐다.

'소녀 홀로코스트 생존자' 이력은 사기였다. 로즈마리가 죽고 10년 뒤인 2017년, 그녀의 출생지인 레클렝하우젠에서 작품 전시회가 열렸을 때다. 그 지역 전문가들이 관련 문서들을 뒤진 끝에 △그녀의 가계는 헝가리 유대계가 아니라 가톨릭이었고 △어린 시절에 수용소에 간 적도 없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그녀의 오랜 주장은 거짓말임을 알아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 여러 미술관과 홀로코스트 기념관들이 갖고 있는 로즈마리의 작품들은 폐기됐을까. 그렇지 않다. 홀로코스트 사기가 드러날 경우 특히 유대인들이 보이는 태도는 너그러운 편이다. 일반 대중에게 나치의 잔학상을 알렸고,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일깨운 공로(?)가 있으니 "더 따지거나 캐묻지 말고 그만 덮자"는 쪽이다. 예루살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도 마찬가지다. 로즈마리가 만든 '아이들의 추방'(Deportation of the Children)이란 대형 조각품과 드로잉 작품들을 갖고 있는 야드 바셈은 그 작품들이 '홀로코스트를 예술적으로 나타낸' 것이란 이유로 소장품 목록에서 빼질 않고 있다.

▲ '유대인 소녀 생존자'로 행세했던 미술작가 로즈마리 코치와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드로잉 작품. 22명의 가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만들어 낸 역사학박사 블로거 마리 힝스트(오른쪽). Ⓒ위키미디어

오프라 윈프리 울린 '러브 스토리'

수용소에 얽힌 환상적인 러브 스토리를 꾸며내 대중의 마음을 울렸고 그걸로 떼돈을 챙긴 사기꾼 부부도 있다. 폴란드 유대인 이민자인 헤르만 로젠블라트(1929-2015) 부부다. 1996년 '오프라 윈프리 쇼'의 '러브 스토리 경연대회'에 나간 헤르만은 △어릴 때 부헨발트 수용소에 갇혀 지냈고 △수용소 근처 마을에 숨어 살던 유대인 소녀가 철조망 울타리 너머로 사과와 빵을 7개월 동안 던져줬고 △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서 그 소녀를 우연히 소개팅으로 다시 만나 결혼했다고 밝혔다. 경연대회 우승 상금은 그에게 돌아갔다. 오프라는 "내가 22년 동안 진행한 쇼에서 들어본 가장 위대한 러브 스토리"(the single greatest love story in 22 years of doing this show)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헤르만은 <울타리의 천사>(Angel at the Fence)라는 제목을 내기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얘기는 헤르만의 상상일 뿐이었다. 어릴 때 부헨발트 수용소에 헤르만이 갇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짓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소녀가 사과를 던져줬다는 얘기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미래의 아내가 될 소녀는 수용소에서 340km 떨어진 독일 농장에서 살았다. 데보라 립스타트(에모리대, 현대유대사)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수용소의 구조나 다른 여러 정황으로 미뤄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지적했다. 2007년 2월 립스타트가 자신의 블로그에다 올린 글이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헤르만 로젠블라트의 홀로코스트 이야기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수용소의 한 수감자에게 수용소 밖의 한 소녀는 매일 담장 너머로 사과를 던져준다. 1945년 5월 어느 날, 그는 다음 날 오전 10시에 가스실로 가서 죽기로 돼 있으니 더 이상 사과를 던지지 말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부헨발트에는 가스실이 없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몇 날 몇 시에) 가스실에서 처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없었다.]⇒http://lipstadt.blogspot.com/2007/12/apples-over-fence-holocaust-story-that.html)

나치 수용소 경비탑에 배치된 무장 경비원들은 24시간 내내 울타리 양쪽을 감시했고, 울타리에 접근하는 사람은 누구든 죽을 가능성이 컸다. 거짓이 드러나자, <울타리의 천사>를 내기로 계약을 맺은 버클리 북스(펭귄 그룹의 출판사)는 출판을 없던 일로 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지기 전 헤르만 부부는 '어틀랜틱 해외영화사'(Atlantic Overseas Pictures)에 이 책의 영화 판권을 팔아 거금을 챙겼다.

"거짓말이 아니다. 내 상상력이었다"

헤르만의 증언이 거짓임을 지적한 사람은 데보라 립스타트뿐 아니다. 글 위의 '늑대 소녀' 미샤의 거짓을 밝혔던 샤론 서전트(보스턴대, 계보학), 케네스 월처(미시간대, 역사학)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잇달아 의구심을 나타내자, 2008년 말 헤르만은 마침내 진실을 털어놓았다. "소녀가 날마다 사과를 던져줬다"는 대목은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다. 2009년 2월 ABC방송의 'Good Morning America'에 출연해서는 듣기 민망한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어릴 때 늑대와 함께 지냈다는 미샤의 변명과 닮았다.

"내 의도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글을 쓸 당시에는 일련의 사건들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내 상상력이었다. 상상 속에서, 마음속에서 나는 그것을 믿었다. 지금도 그녀가 그곳에 있었고 나에게 사과를 던졌다는 사실을 믿는다."(Caleb Daniloff, 'Untrue Stories', <Bostonia> 2009년 여름호)

이 사기극이 드러나기 바로 앞서 어린이판 <천사 소녀>(Angel Girl)가 2008년 9월 출간됐다. 출판사는 이미 판매된 책들을 환불하고 모두 거두어들였다. 헤르만이 1996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사기극을 시작한지 12년만의 일이다. 헤르만의 증언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해왔던 케네스 월처는 "사람들이 헤르만 부부의 엉터리 이야기를 얼마나 빨리 받아들이는지를 보고 놀랐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뉴 리퍼블릭> 잡지에 실린 인터뷰 내용이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날마다 철조망으로 가서 어린 소녀를 만나 먹거리를 던져주고 받았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수감자들은 철조망이 쳐진 울타리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슬프다. 홀로코스트 러브 스토리를 지어내고 명성과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은 당연히 비난받아야 한다. 하지만 출판사와 영화 제작자, 그리고 10년 넘게 이 이야기를 들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엉터리 이야기를 믿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Gabriel Sherman, 'Ken Waltzer On Canceled Memoir', <New Republic> 2008년 12월27일)

'사기꾼 블로거'가 된 역사학 박사

인터넷 세상답게 '21세기형 홀로코스트 사기꾼'도 나타났다. 2013년 독일에서 아일랜드로 옮겨온 마리 힝스트(1987-2019)는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쭉 읽어봐요, 내 사랑, 쭉 읽어요'(Read On, My Dear, Read On)란 이름을 붙인 블로그에서 유대계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그녀가 겪었다는 경험담을 많이 올렸다. 조회수는 수십 만을 넘어섰다. 2017년에 독일의 소셜 미디어 '황금 블로거'(Die Goldenen Blogger)에서 '올해의 블로거'로 뽑히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마리는 똑똑한 여성으로 비쳐졌다. 2017년 트리니티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주제는 '17세기 아일랜드에서의 영국 식민지배')를 받았다. 바로 그 무렵엔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주는 '유럽의 미래 프로젝트'에 논문을 내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성공에 자신감을 얻었을까, 마리는 친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비롯한 친인척 22명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라면서 허위 서류를 꾸며 예루살렘 야드 바셈 기념관으로 보냈다.

진실을 말하자면, 독일 비텐베르크의 개신교(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난 마리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 모두 유대인 혈통이 없었다. 그런데도 친할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해마다 여름이면 티파티를 열었다고 했다. 언제까지 거짓말이 통할 수는 없다. 2018년 독일 역사학자와 계보학자 등 몇몇 전문가들이 마리의 주장이 사실인지 조사해보니, 22명 가운데 실존 인물은 3명뿐이고 나머지는 유령 인간이었다. 실존 3명도 유대인이 아니었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도 물론 아니었다. 이를 바탕으로 2019년 6월 독일 언론 <슈피겔>은 마리의 사기 행각을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다. 영어판 기사의 일부를 보자.

"이런 종류의 사기극(con job)은 그 자체로 범죄가 아닐 수 있지만, 그럼에도 추악한 짓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거짓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나치에게 실제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모든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다."(Martin Doerry, 'The Historian Who Invented 22 Holocaust Victims', <Der Spiegel>, 2019년 6월6일)

<슈피겔>에 폭로 기사가 실린 뒤로도 마리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고용해 맞서려 했다. 그 무렵 <아이리시 타임스>의 데릭 스칼리 기자가 마리를 인터뷰했다. 그 만남에서 기자는 마리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마리는 불쑥 주머니에서 인조가죽 지갑을 꺼내 지퍼를 열어 무언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가운데에 '유다'(Jude)라고 쓰인 노란색 별이 달린 천 조각이었다. 뉘른베르크 법(1935)에 따라 모든 유대인이 달아야 했던 노란별이었다. "이 별과 깨진 안경 한 쌍이 아우슈비츠 이후 할머니가 가진 전부였어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만져보고 제가 없는 얘길 지어낸 건지 다시 물어봐 주세요." 마리가 나를 바라보며 반응을 기다리는 게 느껴졌다. 먼저 홀로코스트가 생각났고, 그 다음에는 이베이가 떠올랐다.] (Derek Scally, 'The life and tragic death of Trinity graduate and writer Sophie Hingst', <The Irish Times>, 2019년 8월 1일)

기자의 머릿속에 '이베이(eBay)가 떠올랐다'는 것은 마리가 유대인 식별표를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서 구입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사기꾼 블로거' 마리의 32살 삶은 허무하게 끝났다. 인터뷰 다음 달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리의 얼굴 사진을 보면, 사기꾼과는 거리가 멀고 해맑은 느낌마저 준다. 박사학위를 지닌 젊은 지식인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독일 역사학자 미하 브루믈릭(프리츠 바우어 홀로코스트 연구소 전 소장)은 독일 언론 <도이체 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마리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과 그녀 자신을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소속감을 느끼려는 무의식적인 의지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22명을 홀로코스트 희생자로 등록 신청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너그러운 해석이다. 마리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녀가 정신적으로 아팠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 헤르만 로젠블라트 부부. 나치 수용소 울타리 너머로 사과를 주고받았다는 러브 스토리 사기극이 드러나기까지 12년 걸렸다. Ⓒ위키미디어

'유대인' 행세하는 윌코미르스키 증후군

위의 마리처럼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자신을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후손' 또는 심지어 '홀로코스트 생존자'라고 우기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이와 관련해 '윌코미르스키 증후군'(Wilkomirski-syndrom)이란 용어가 쓰인다. '윌코미르스키'란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인인 척, 수용소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고아였다는 내용을 담은 문제의 책 <파편들>을 쓴 벤저민 윌코미르스키를 가리킨다(연재 121 참조).

1999년 <파편들>이 '홀로코스트 문학 사기작'이란 게 드러나자, 연구자들(심리학자, 역사학자 등)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럴 듯하게 자극적으로 꾸며낸 '홀로코스트 이야기'로 관심을 끌고 돈을 챙기려는 양심불량 행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개론서 같은 데에 나오는 얘기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거나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싶다는 욕망,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다고 한다. 어릴 때 학대를 당했거나 고아로 자라면서 힘든 유년기를 보낸 이들 가운데는 남들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면서 일탈 행동을 하는 수도 있다. 바로 앞서 살펴본 마리 힝스트만 해도 그렇다. 역사학 박사학위를 지닌 그녀가 오로지 돈을 바라고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다고 보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되풀이된다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겐 새 트집거리들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홀로코스트 문맹과 맹신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죽음의 수용소들이 문을 닫은 지 올해로 꼭 80년이 됐다. 그동안 미국이나 유럽에는 홀로코스트와 수용소에 관한 숱한 연구서, 회고록, 영화들이 나왔다. 미국에만도 각 주마다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을 주제로 한 박물관·기념관·전시관들이 많이도 들어서 있다. 그런 곳들에서는 가끔씩 검증이 제대로 안 된 증언자들이 강연자로 나서 나치의 잔혹성을 자극적으로 부풀린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풀어내곤 했다.

미시간대학에서 '유대인 연구 프로그램'을 이끄는 케네스 월처 교수는 수용소 담장 너머로 사과를 주고받았다는 헤르만 로젠블라트 논란 무렵인 2008년 12월30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헤르만의 사과 얘기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강력하기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터무니없는 증언들을 사람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만큼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문맹(illiteracy)이 널리 퍼져 있다는 얘기다.

월처 교수는 '문맹'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했지만, 달리 말하면 맹신(盲信)이다. 홀로코스트가 돈벌이가 된다고 여기는 출판사나 영화사들, 그리고 이들과 손을 잡은 친이스라엘 언론들이 그 맹신을 부추긴다. 이들은 증언자의 말을 '팩트 체크' 차원에서 꼼꼼히 따져보려 하지 않고 서두른다. 다른 누군가가 계약을 맺기 앞서 먼저 달려가 사기꾼의 손을 잡으려든다. 엄청난 홍보비를 들이기에 앞서, 단돈 수천 달러의 조사비용으로 사기 피해를 막을 수도 있지만 그러질 않는다. 사기꾼의 거짓말을 '감동적인 실화'로 포장해 언론 홍보와 광고를 하면, 미디어들은 장단을 맞춰주기 마련이다.

오프라 윈프리조차 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사과를 주고받았다는 헤르만의 이야기가 사실인지를 알아보려 들지 않았다. 월터 교수는 이를 가리켜 '사탕발림의 홀로코스트 러브스토리'(candy-coated Holocaust love story)를 상업적인 전략으로 승화시켰다고 꼬집었다. 진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를 들어도, 시청률이 높아지면(아울러 광고가 따라붙으면) 좋은 일이고, 시청자는 그저 믿을 뿐이다. 돈벌이를 으뜸으로 여기는 '홀로코스트 산업'의 그늘이다.

홀로코스트 이용해 실속 챙기는 유대인 파워

유대인들 '눈치보기'도 문제다. 누군가가 "내가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요"라고 나서면, 그 말을 믿고 감동해야 한다. 미국에선 특히 더 그렇다. 자칫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유대인 파워가 워낙 강하기에 진실 확인은 뒷전이다.

21세기 이스라엘에게 홀로코스트는 모든 잘못을 덮어주는 '면죄부'로 변질됐다. 누군가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인권 침해와 전쟁범죄를 비판해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모독'이라고 핏대를 세운다. "당신은 영국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데이비드 어빙을 추종하느냐?"는 모욕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어빙에 대해선 연재 120 참조).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홀로코스트를 팔아 사기를 치는 자들의 거짓 증언은 여러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게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는 반격의 빌미를 만들어줄 뿐 아니라, '진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조차 믿지 못하게 만든다. '기억의 윤리'를 어기는 것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흐릴 뿐 아니라 '기억 문화'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보다 큰 문제는 '홀로코스트 희생'을 내세우며 이득을 챙기는 훨씬 큰 규모의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를 면죄부인양 여기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세계유대인회의(WJC)를 비롯한 유대인 압력단체들이다. 이들은 지금껏 살펴본 '홀로코스트 사기꾼'들과는 규모와 차원이 다르다. 비판자들의 눈에는 이들이야말로 홀로코스트를 이용해 영향력과 목돈을 챙기는 '노골적인 갈취자'들이다. '홀로코스트 산업'의 어두운 실상을 다음 주에 들여다보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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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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