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의 문화정치

[게임필리아] 아프리칸 사무라이, 진부한 소격효과라는 역설

유비식 오픈월드라는 테일러리즘

프랑스의 게임 개발사·퍼블리셔인 유비소프트는 역사에 기반한 오픈월드 잠입액션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로 큰 인기를 누려왔다. <어쌔신 크리드>는 할리우드 영화업계에 비유하자면 <007>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만큼 전 세계적인 팬을 보유하고 있다. 2007년 이후 18년 동안 14편의 본편이 나왔다. 플레이어는 세계의 역사적 분쟁에 개입하는 암살자들의 지하조직 '형제단'의 일원이 되어 고대 그리스, 로마, 중세 중근동과 유럽, 르네상스 이탈리아와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19세기 런던, 이집트와 북유럽 신화에 이르기까지 문명 차원의 역사적 시공간을 탐험할 수 있다.

이 IP가 2000년대 이후 게임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다. 매력적인 설정과 다채로운 시공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유비식 오픈 월드'라는 포맷을 창조, 정형화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포맷은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 탐험하고, 서사를 풀어나가고, 엔딩에 도달하기까지 공간과 오브젝트를 배치하는 구조적 전략으로, 플레이어가 이미 체화된 매커닉과 에르고딕으로 게임에 오랜 시간 머무르면서 편안하게 플레이하도록 만든다.

'유비식 오픈 월드'란 바꿔 말하면 게임 제작에서의 테일러리즘이다. 할리우드가 정형화된 세트장과 미장센, 촬영 기법을 제작에 적용해서 영화를 대량으로 생산한 것처럼, 유비소프트 또한 이 포맷을 창조한 장본인이다. <어쌔신 크리드>의 오픈 월드는 당연히 다른 IP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고스트리콘>, <와치독>, <디비전>에도 거의 비슷한 시스템이 나온다. 플레이어는 사실상 외형 및 기믹만 약간 다른 동일한 게임을 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다른 대형 게임 제작사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게임을 개발하는데, '유비식 오픈 월드'라는 포맷은 그 자체로 게임 제작 기간 단축, 기술 및 노하우 개발, 개발 인원 관리에 너무도 매력적인 솔루션이기 때문이다. 반면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유비식 오픈월드’란 경멸의 대상이다. 동일한 레시피로 겉모양만 다르고 맛은 똑같은 요리를 내놓는 프랜차이즈 식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유비식 오픈 월드'는 공허하다. 방대한 공간과 수많은 지형, 오브젝트, 아트를 구현해 놓았지만 실은 '복붙'된 것들의 연속이다. 플레이어는 월드를 탐험하는 것 같지만 사실 테마파크의 미궁을 반복적으로 진입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딜 가도 똑같은 적, 똑같은 건물, 똑같은 퍼즐이 난이도만 높이며 다가온다. 대중문화의 무한한 루프와 반복을 비판한 T.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문화 산업의 특징인 '새롭게하기'는 대량 복제의 개선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시스템'의 핵심적 요소라 할 수 있다(207쪽)."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초창기에 매우 신선한 충격을 안겼지만, 무한히 반복 재생산되는 오픈 월드는 이 게임이 8비트 시대의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나 <젤다의 전설>과 비교해 뭐가 진보했는지 의심케 만든다. 새롭게 방문하는 장소는 이미 방문했던 장소의 연속이다. 똑같은 건물 구성, 똑같은 기믹, 똑같은 길들은 플레이어를 환희가 아니라 기시감의 미로로 빠트린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에서 발 디디는 비트의 공간이 꿈꾸던 가상이 아니라 결국 테일러리즘, 즉 '은밀한 생산의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고 배신감에 휩싸인다. 관광 명소에 가서 식도락을 즐기려는데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밖에 없다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팬들, 더 나아가 천편일률적인 '유비식 오픈 월드'가 되어버린 트리플A 게임에 플레이어들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다.

욕망하지 않는 타자의 신체를 받아들이는 경험

'유비식 오픈 월드'의 딜레마는, 그 뻔한 생산 공정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 플레이한다는 것이다. 많은 비판이 있지만 그래도 <어쌔신 크리드>는 장기간 개발 노하우와 피드백이 축적되어 익숙한 재미를 주는 게임이다. 복사해서 붙여 넣은 듯 나타나는 퍼즐(즉 암살 과정)은 반복 숙달의 재미를 주고, 지난 20여 년간 고도로 발달한 포토리얼리즘은 이 게임을 일종의 관광 패키지 경험처럼 만들었다. 화려한 시각 효과, 실제 장소를 고증해서 만들어진 명소,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과 사건 등은 최소한의 재미와 신선함을 담보해 준다. 즉, 그 정도의 기대로 게임을 사서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시리즈마다 200만~300만 이상 존재한다는 뜻이다.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 ⓒ유비소프트

'유비식 오픈 월드'라는 은밀한 생산의 장소를 가리기 위해 유비소프트가 취하는 전략은 공간의 다양성이다. 매 시리즈마다 이색적이고 매력적인 역사적 시공간을 골라 월드를 구축한다. 최신작인 <섀도우스>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동양에 환상을 가진 서방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속된 말로, 와패니즘이라고도 표현되는) 전국시대 일본의 풍경, 도시, 건축물이 화려하게 배치됐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사무라이와 시노비, 오다 노부나가와 핫토리 한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실존 인물을 만나는 경험은 분명 흥미진진하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주인공은 두 명이다. 한 명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시노비 '나오에'이고, 다른 한 명은 포르투갈 선교사에 의해 이역만리 일본까지 오게 되는 아프리카 노예 '야스케(포르투갈명 디오고)'이다. 참고로 야스케는 기록이 많진 않지만 실존 인물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거둬들여져 그를 호위무사 또는 하인으로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스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 알려지자 게임 출시 전부터 격렬한 논쟁이 촉발됐다. 대중문화에서 과소 재현과 다양성을 둘러싼 문화 전쟁, DEI를 둘러싼 언설이 전 세계 커뮤니티를 격렬히 강타했다. 유비소프트는 디즈니와 마찬가지로 게임 업계에서 가장 강력한 DEI 정책을 펴는 회사로 유명하다. 남성 이용자가 주류인 게임문화에서 DEI는 영화나 TV쇼, OTT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격렬한 논쟁거리다. 게이머들은 흑인 여성이나 소수자가 등장하는 게임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PC주의, 워키즘 등 다양성을 둘러싼 정체성정치의 주된 전선은 게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거리를 두고 카메라의 시각에서 조망하는 관객성(spectatorship)과 달리,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에서 겪는 모험을 주인공의 신체와 고도로 연동되기 때문에 게임에서 '신체 강탈자에게 신체를 넘기는 경험'처럼 받아들인다. 익숙하지 않은 타자(예컨대 과소 재현 되어온 소수자, 여성, 흑인 등)가 주인공이고 그를 조작할 시, '신체 강탈자에게 빼앗기는 경험'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매번 해당 무대 출신의 주인공을 내세웠던 이전 시리즈와 달리 아프리카 출신의 야스케가 일본 전국시대 배경 활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타자를 향한 욕망을 강탈당해 공백 상태를 직시하게 된' 주체, 플레이어들에게 아주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DEI 정책의 일환으로 무대에 서게 된 흑인, 여성, 아시아인 등 '동일화가 불가능하며 다른 정체성을 가진 타자'들을 응시하는 경험은 애착이 아닌 대립 관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소외받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친구가 돼라'는 환대의 윤리학이 특히 게임에서는 격렬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왜 욕망하지도 않는 그들의 신체 감각까지 받아들여야만 하지? 분명히 말하지만, 난 인종차별주의자나 혐오주의자가 아닌데 말야!"가 되는 것이다.

레딧을 비롯한 전 세계 커뮤니티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고, 일본의 게이머들 또한 크게 반발했으며, 일본 정계의 정치인들까지도 <섀도우스>에 대한 심심한 불만을 표시했다. 물론 야스케를 반대하는 논리는 조야했다. '야스케가 노부나가의 경비병은 했을지 몰라도 귀족인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거나, 일본 고유의 건축물이나 양식이 고증과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물론, 이 게임의 건축물이나 역사적 사건은 실재와 다른 측면들이 없잖아 있긴 하다. 그러나 사실 비판론자들은 역사적 고증이 맞지 않아서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불안과 무지의 충돌

요컨대 야스케에 대한 불만은 트리플A 상업 게임답게 매끄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타자, '일본인 남성 사무라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다시 말해 욕망할 수 있는 타자, 내가 되고 싶은 타자)의 발로라고 읽을 수 있다. 일본인 여성 주인공인 '나오에'의 존재감이 뚜렷하기 때문에 불만은 대부분 사그라들었지만, 야스케에 불만을 품었거나 여전히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무의식 기저에는 '왜 거칠고 화끈한 일본 남자 사무라이를 플레이할 수 없단 말인가'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들은 애초에 다양성 같은 의제에 관심이 없거나 반대하며, DEI 정책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놀랍게도, 이 불안은 이용자들뿐 아니라 야스케를 창조해 낸 개발자들에게서도 역전된 거울상으로 나타난다. <섀도우스>의 개발자들은 '왜 일본인 사무라이가 아닌 야스케가 주인공이냐'는 이용자들의 반발에 "일본인 남성은 어쌔신크리드의 주인공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더 정확히는 "우리는 일본인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을 찾아야 했다"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일본을 포함한 상당수의 게이머들이 흑인·여성·소수자를 환대나 욕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방 개발자들이 동아시아 남성을 '신체가 섞일만한 타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 속에서 야스케는 자메이칸 라스타파리안 드레드헤어를 하고 있다. ⓒ유비소프트

이 증거는 야스케가 재현되는 방식에서 확인된다. 야스케는 게임 속에서 밥 말리와 비슷한 외모로 그려진다. 야스케는 자메이카의 라스타파리안 드레드헤어를 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고증의 문제가 아니다. 재현의 오류 문제도 아니다. '밥 말리 같은 외모를 한 야스케'에게서 우리는,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이 펼치는 정체성 정치가 얼마나 오만한가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즉 욕망하는 타자로서 허용할 수 있는 아프리카인이란 매력적인 드레드헤어를 한 밥 말리 같은 인물이라는 걸 야스케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야스케가 기원한 동남아프리카 (모잠비크로 추정됨)는 레게와 거리가 멀며 포르투갈 또한 카리브 해가 아닌 브라질로 향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드라마 <퀸 클레오파트라>(2023). ⓒ넷플릭스

이런 유럽중심주의적 정체성 정치는 사실 게임뿐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서 종종 나타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가 클레오파트라 역으로 아프리카계 미국 배우를 캐스팅해서 이집트인들의 공분을 산 사건이 좋은 예제다. 고고학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남유럽에서 건너온 백인이라는 것이 정설이고, 이집트는 고대부터 지중해와 아프리카, 중근동의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는 국가다. 이집트인들의 불만은 클레오파트라를 미국 출신 흑인이 연기하면서 '이집트인'이라는 정체성을 침해당한 것에서 온다. 현대 이집트인들의 정체성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문화의 혼종에 가깝고 아프리카 내륙과는 거리가 멀다. 아프리카는 중국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더 방대한데, 북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를 하나로 규정하는 이런 시각은 마치 한국인과 투르크메니스탄인의 정체성을 하나로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 이쯤에서 문화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유명한 문구를 가져와 보자. "서구와 이슬람 국가 간의 대립은 문명 간의 충돌이 아닌 무지의 충돌이다." 야스케를 둘러싼 문화적 갈등 또한 그러하다.

흑인 사무라이라는 소격효과가 남긴 것

사실 야스케라는 실존 인물이 있었고, 역사적 고증이 어떻건 간에 그가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 활극에 등장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이미 전국시대와 에도시대의 사무라이 활극은 대중문화의 보편사적 장르 문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킬빌>이 좋은 예다. 사무라이와 이소룡, 오리엔탈리즘적인 일본의 정원과 야쿠자 누아르가 뒤섞인 이 영화는 굳이 일본과 전국시대라는 배경 없이도 '사무라이'라는 문법이 너무나 보편적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이방인 사무라이라는 설정도 야스케가 처음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도 이입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타인,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라스트 사무라이>(2003)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매력적인 백인 배우가 사무라이로 분하는 이 블록버스터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즐겼다. 일본 개발사 팀 닌자가 개발한 소울라이크 게임 <인왕> 시리즈에서도 야스케는 사무라이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백인 사무라이는 되고 흑인 사무라이는 안 되는가?

▲톰 크루즈 주연 <라스트 사무라이>(2003).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를 투과해서 흐르는 어떤 정치적인 무의식을 마주했다. 야스케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소격효과라고 볼 수 있겠다. 일본 게이머들은 야스케가 고증을 파괴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그가 귀족인 '사무라이'로 그려진 것이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탈아입구를 외치며 제국이라는 개념을 자의식과 동일시해 온 일본의 뿌리 깊은 국가 가부장적 무의식, 그리고 그것을 재해석한 서구의 와패니즘은 톰 크루즈가 사무라이가 되는 건 허락해도, 고향과 기원을 잃어버린 노예 출신의 남자 야스케가 일본도를 하사받는 장면으로부터는 당혹스런 '낯설게 되기'를 경험한다. '봉건 일본 사회의 귀족이 되는 아프리칸 사무라이'라는 서사는 혁명적 변화를 창발하는 서사극의 문턱에서 미끄러지고, 대신 당연하게 주어져야 할 것들을 거머쥐지 못한 상실감이 그 자리를 채워 넣는다. "고증이 틀렸잖아, 이건 못 받아들여!"라는 지적 너머에는, 계몽으로 이행하지 못한 고리타분한 '소년' 자아가 애초에 오인되거나 부재했던 정체성을 침범당하는 듯한 열패감으로 덧칠되어, 몽니를 부리는 심리가 공존한다.

그래서 야스케는 사무라이가 되어서도 외롭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임은 한편 이런 측면들을 굉장히 섬세하게 묘사한다. 플레이어는 야스케를 조작할 때 주변을 지나는 NPC들에게서 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NPC들(상인, 주민, 농사꾼, 여성, 아이 등)은 야스케(플레이어)를 곁눈질로 흘깃거리면서 그 거대한 덩치와 피부색에 놀라움을 표하며, 가까이 가면 고개 숙여서 사무라이에게 걸맞은 예를 갖추기도 한다. <섀도우스>가 몇몇 고증 오류와 유럽중심적 정체성정치라는 도그마에도 불구하고 할 만한 게임일 수 있는 것은, 낯선 존재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는 소격의 경험을 플레이어에게 뜻하지 않게 제공하고 있어서이다.

야스케라는 소격효과는 앞으로 게이밍을 포함한 대중문화의 문화전쟁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 것인가, 교차성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전망으로도 이어진다. 자메이카 출신의 문화연구자인 스튜어트 홀에 따르면, 고정불변의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별, 인종, 지역, 민족 등에 기반한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안정적인 서술'이라는 욕망에서 온다. 그러나 정체성의 본질은 원래 모순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동하는 축제이자 의미를 새롭게 재현하고 해독할 수 있는 문화의 역동성을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재미있게도,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는 출시되고 난 후에야 논란과 언설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많은 한계와 오인이 교차하는 게임이지만, 야스케를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이게도 많은 화해와 깨달음이 교차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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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저술로는 <게임의 이론>(공저), <인공지능, 플랫폼, 노동의 미래>(공저) 등이 있으며 계간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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